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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공백 세미나] 후기 - 박상순 +2
토라진 / 2017-08-06 / 조회 1,422 

본문

 

  지난 주에는 박상순의 시들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보았습니다. 시들은 (그의 시집 제목인) ‘슬픈 감자 200그램’처럼, 알알이 박힌 슬픔들이 200그램 정도씩 언어들 속에 박제되어 있는 듯싶었습니다. 박제된 언어들은 낯설었으나 살아 있는 현실들과 너무 닮아 있어 어느새 자세히 들여다 보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마치 사랑에 빠지지 않을 거라고 장담하던 사람과 어느새 사귀고 있게 된 것 같은 기분이었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첫 데이트를 하는 심정으로 후기를 적어내 보겠습니다. 더듬거리고 주저하며 머뭇거리게 되더라도 이해해주시길......처음은 언제나 아무리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새로운 설렘들이 있을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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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센소


무의미를 뜻하는 말입니다. 나는 이 말을 책상 위에 올려 놓았습니다. NOnSEnso. 이렇게 생겼습니다. 붉은 껍질을 가졌습니다. 껍질을 열어보겠습니다. 물렁물렁합니다. 양 쪽으로 갈라집니다. 껍질의 안쪽은 검붉은 색입니다. 껍질을 가르니 더 깊은 속이 들여다보입니다. 아주 엷은 붉은 색입니다. 껍질을 마저 벗겨내지 않고 나는 책상 위에 그것을 올려놓았습니다.


Non SEnso. 이렇게 보이지는 않습니다. 그냥 껍질이 갈라진 논센소입니다. 낮에는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보지 않아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밤에만 봅니다. 내가 처음 만든 말은 아닙니다. 하지만 내가 처음 만들어 낸 말처럼 들여다봅니다. 크게 보일 때도 있지만 그리 크기는 않습니다. 껍질을 갈라보았지만 더 깊은 속을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논센소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논센소도 나를 알아보지 못한다면 더 좋겠습니다. 이것은 매일 변하기도 하지만 매일 다르게도 보입니다. 그래서 밤마다 들여다보아야만 합니다. 영원히 변치 않을 나만의 논센소이기를 바라지만, 매일 변합니다. 그래도, 꼭 NOnSEnso 이렇게는 생겼습니다. 나의 논센소! 그것은 내게, 또 한 번, 이 여름을 살게 하고, 바라보고, 증오하고, 침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나의 논센소.

 

 ‘논센소’(‘nonsense’의 이탈리아어)는 말 그대로 ‘무의미’입니다. 하지만 시인은 무의미한 말들을 책상 위에 올려놓고 껍질을 까보기도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기도 하면서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싶어 합니다. ‘무의미’와 ‘알 수 없음’을 향해 ‘인식’과 ‘의미’의 시선을 놓지 않고 있는 것이죠. 아이러니한, 말 그대로 무의미한 시도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아이러니는 ‘낮에는 보지 않기로 했습니다. 보지 않아도 생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밤에만 봅니다.’라는 구절에서 극대화됩니다. 보통 우리는 낮에 빛을 통해 현상과 사물을 바라봅니다. 밤에는 어둠 속에서 시야를 닫은 채 생각하게 됩니다. 하지만 시인은 밤에 본다고 말합니다. 밤에 보기 위해서는 더 자세히 봐야 하며 눈으로만이 아닌 다른 감각으로 봐야 하는 수고로움과 예민함을 가져야 합니다.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죠. 하지만 그런 수고로움을 다시 시인은 가볍게 날려버립니다. ‘껍질을 갈라보았지만 더 깊은 속을 볼 필요는 없습니다. 그냥 논센소입니다.’
 그러나 그 가벼움은 가벼움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논센소’는 시인에게로 달려듭니다. 아니, 어쩌면 시인이 붙잡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나의 논센소!’ 이렇게 부르며 그것을 수도 없이 쓰다듬고 다듬어온 것처럼 여기니까요. ‘그것은 내게, 또 한 번, 이 여름을 살게 하고, 바라보고, 증오하고, 침묵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논센소’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시인에게 다가온, 시인이 바라보는 세상의 모든 언어, 그리고 그에게서 비로소 완성되는 시어들이 아니었을까요?
 이제 그의 시를 다시 읽어봅니다. 희음 님의 말씀이 생각나서(희음님 처럼) 키득, 웃음이 터져나옵니다. 알파벳의 대문자를 떼어 읽어보면, ‘노세, 노세’ 라는 말이 됩니다. 놀 듯 언어를 가지고 유희하고 싶은 시인의 장난스런 유머가 느껴집니다. 박상순 시인의 시에 매력을 느끼게 되는 첫 순간이었습니다. 무언가 소중히 간직할 줄 아는, 그러나 지나치게 무거워지지 않는 산뜻한 가벼움을 지닌, 기분 좋은 시작이었습니다.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23년 뒤 –2


구름이 내 손을 묶고, 발을 묶고
높은 지붕 위에 나를 올렸다.
다음 날,
내 입을 막고, 눈을 가리고
가을 숲에 나를 던졌다.
그리고
구름은 그의 차가운 발자국들을
내 얼굴 위에 쌓아놓고
떠났다.


다음날, 배나무 가지 저 끝에서 태양은 빛났다.


아이의 가방 속에는 여러 마리의 작은 낙타들이 들어 있다. 아이는 달리기 시작한다. 불룩한 가방 안에서 연필들이 덜커덕거린다. 가방 속에 들어 있던 작은 낙타들이 좌우로 휩쓸린다. 낙타들이 뒤집힌다. 달아나는 아이의 뒤를 따라 한 여인이 달리기 시작한다.


달아난다. 달린다. 강을 건넌다. 아이는 또 달리다가 걸음을 멈춘다. 천천히 걷기 시작한다. 한참을 걷고 있을 때, 뒤를 쫓던 여인이 달려온다. 아이의 불룩한 가방을 뒤에서 붙잡는다. 여인이 달려온다. 아이의 불룩한 가방을 뒤에서 붙잡는다. 달아나는 아이를 돌려세운다. 가방 속의 낙타들이 또 뒤집힌다.


아이의 머리 위로 여인의 목소리가 햇빛이 되어 쏟아진다. 아이는 말이 없다. 아이의 가방에 들어 있던 여러 마리의 작은 낙타들은 이리저리 휩쓸리고 뒤집히다가 목이 부러지고, 다리가 부러지고, 배가 터져버렸다.


다음 날


두 개의 기둥이 있었다. 하나의 몸으로 붙어 있는 살아 움직이는 기둥이었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기둥을 어루만졌다. 한쪽 기둥 속에서 낙타달의 거친 숨소리가 흘러나왔다. 다른 한쪽 기둥 속에서는 누군가 달려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나의 날개를 잘라 두 개의 기둥 위에 걸었다. 내 등 뒤에서 오랫동안 조금씩 돋아난, 얇고 커다란 날개였다. 나의 날개가 기둥들을 품고 펄럭였다. 날개 위로 어둠이 쏟아져내렸다. 잠시 후, 두 개의 기둥이 날개를 펄럭이며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나는 강물처럼 흘러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 택시를 탔다.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는 시인의 첫 시집에서부터 시간을 두고 꾸준히 발표하고 있는 연작시입니다. 이 시에는 고통스러운 사건들을 겪은 아이의 쓰린 가슴이 담겨 있습니다. 그 쓰린 가슴을 들여다보는 것은 구름에 의해 높은 지붕으로, 가을 숲으로 던져진 지금의 ‘나’입니다. 구름에 입이 막히고 눈이 가려지고 수많은 인연과 기억의 발자국들이 쌓여갑니다. 하지만 이런 어둡고 서늘한 구름을 통과하는 시간들은 차라리 잠시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안식처럼 느껴집니다. 다음에 펼쳐지는, 아무리 벗어나려 해도 여전히 햇빛의 감옥 속에 갇히게 되는 시간들에 비한다면 말이죠.
 이제 햇빛 아래에 여러 마리의 작은 낙타들이 들어 있는 가방을 매고 달리는 아이가 보입니다. 가방 속에 낙타는 뒤집히고, 여인이 쫓아옵니다. 햇빛이 되어 쏟아지는 여인의 목소리는 어쩌면 비명 같습니다. 그 비명 같은 햇빛 속에서 낙타는 목과 다리가 부러지고 배가 터져버립니다.
 그러나 다음 날(다음 날은 오늘 날처럼 읽힙니다.), 상처투성이의 낙타와 햇살의 비명을 피해 도망가던 발소리가 두 개의 기둥이 하나의 몸을 이룹니다. 날개로 변한 나의 등이 이 두 개의 기둥을 품고 날아오릅니다. ‘어둠 속으로 날아갔다.’ 라는 구절에서 어둠은 다시 지치고 상처 받은 가슴을 위로하는 듯 보입니다. 맘을 쉬게 하는 것은 어쩌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시간과 공간과 존재를 지우는 어둠인지도 모를 테니까요.
 이제 다시 세상 밖 현실로 돌아올 시간입니다. ‘나는 강물처럼 흘러서 세상 밖으로 나왔다. 택시를 탔다’ 세상의 순리대로 흘러왔지만, ‘나’는 택시를 타고 또 어딘가로 떠나갑니다. 대수롭지 않은 일상처럼 집 앞에서 잡아탄 택시는 과연 ‘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걸까요?
 시인은 섣부른 희망도, 반복되는 절망도, 어떤 것도 힘주어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어딘가로 향하기 위해 택시에 실리는 것처럼, 삶은 그저 어딘가로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고 있는 듯합니다. 마지막 시 구절의 ‘택시를 탔다’가 뫼비우스의 띠의 한 점처럼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입니다.  

 

                                                                                공구통을 뒤지다가  
 
아홉 살의 나는 철길에서 돌아와 공구통을 뒤집니다.
나사못, 대못, 구부러진 녹슨 못,
아주 튼튼한 놈들만 긁어모았습니다.
 
당신께 보냅니다.
 
내년에 나도 열한 살이 됩니다.
열 살 때의 일들은 그냥 없던 걸로 합시다.
 
당신께 보냅니다.
즐거운 편지처럼
 
내년엔 나도 통통한 애인과 함께
오동도나 제주도.
아니면 카프리 섬의 소형 버스 안에서
삼십대를 보냅니다.
 
껄렁한 이십대는 없던 걸로 합시다.
나사못, 대못, 구부러진 녹슨 못,
아주 뾰족한 놈들만 당신께 보냅니다.
선물로 보냅니다.
 
내년에 나도 여덟 살이 됩니다.
여덟 살의 나로 다시 돌아갑니다. 
 
당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구멍을 뚫고, 튼튼한 나사못으로
당신이 가는 길을 막아버린 뒤
 
다시 아홉 살이 되면 나는 철길에서 돌아와
내 인생의 공구통을 뒤지다가
당신이 내게 보낸 편지를 읽습니다.
내게 남겨진
당신과 나의 기나긴 이별의 편지를.


 우선 이 시는 ‘시간성’이 가장 두드러집니다. 아홉 살에도, 열 살에도, 이십 대에도, 삼십 대에도 여전히 현재형입니다. 따라서 당신께 ‘나사못, 대못, 구부러진 녹슨 못’을 보내는 것은 언제나 현재에 진행되는 일입니다. 어쩌면 과거와 현재, 미래가 동시에 공존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마치 영화 <컨택트(원제:Arrival)>에 나오는 외계인 헵타포드의 언어처럼 말이죠.  그러고 보니, 예술가들은 작품을 통해 시공간을 초월하고 자신도 모르게 어떤 경험의 한계 지점을 넘어서는 경우가 많은 듯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결국 시인의 심상에 깊이 박혀 있는 ‘못’입니다. 그 못으로 또 다른 ‘나’인 ‘당신’의 가슴에 대못을 박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상처를 주기 위한 목적이 아닙니다. 당신이 가는 길을 막아버리기 위한 것입니다. 다시 시간 속으로 흘러들어가 반복되는 고통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 같은 것이죠.
 이런 기도는 아마도 미래의 내가 이미 수도 없이 했던 일이었나 봅니다. 마지막 연에서 당신(‘나’)이 내게 보낸 편지를 읽게 되니 말입니다. 그리고 간절히 다시 새로운 기도를 올립니다. 당신과 내가 다시 만나지 않기를 바라는 기도 말입니다. ‘당신과 나의 기나긴 이별의 편지’는 다시 세상에 돌아오지 않기를 바라는, ‘절대 절멸’ 상태를 꿈꾸는 듯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별을 고하기 전, 그 긴 편지에는 아마도 이런 말들이 적혀 있을 것 같습니다. 완전히 사라지기 전까지 이생에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그저 다시 밀려오는 파도 같은 시간에 몸을 맡기고 생의 이면을 견디는 일이라고 말이죠.
 ‘공구통을 뒤지다가’ 문득, 시인은 흐릿한 붓질처럼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반복해서 덧칠해보고 싶은 충동이 일었든가 봅니다. 그 작업들 속에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어쩌면 점점 더 희미해지는 ‘나’라는 ‘존재’였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존재’들은 서로 부대끼며 깊이 파고들다가 다시 빠져나오기를 반복하며 안간힘을 쓰고 있는 듯 느껴졌습니다. 그 속에서 나는 슬픔을 앓았던 것도 같습니다.

 그 슬픔들은 박상순 시인의 시어들에 촘촘히 박혀 있습니다. 그것은 어떤 때는 딱딱하게 굳어 이어 붙어 있는 조형물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또 어떤 때는 말랑한 고무 찰흙처럼 손 안에서 이리저리 굴리고 가지고 놀고 싶어집니다. 그리고 다시 돌아보면 기체로 변해 어디론가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물질과 시간, 공간에 대한 반복과 변주는 시인만의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차이’들은 시들을 반복해서 읽는 동안 어떤 공감을 불러일으킵니다. 기시감과 미시감을 동시에 들게 하며 익숙한 일상을 새롭게 들여다보게 합니다. 
 낯선 시인과의 첫 데이트. 서먹했지만 느낌이 나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인이 꽤 나이가 많다는 사실을 알고는 좀 놀랐습니다. 이런 감각을 간직하기 위해 하루하루 벼리고 살아낸 시인의 시간들은 어떠했을까 생각하니 저절로 한숨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그의 시를 좀 더 가까이 하면서 저도 그 시간들에 감염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다음 날, ‘나’는 ‘당신’이 보낸 편지를 받아 들었습니다. 그것은 ‘감염된 시간’들 속에서 읽을 때마다 다른 시어로 바뀌어 버리는, 기다긴 이별의 편지였습니다.
 
  

댓글목록

희음님의 댓글

희음

토라진 님의 후기를 읽는 동안 박상순을 함께 읽고 함께 슬픔을 앓았던 시간이 고스란히 되살아나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토라진 님 말씀처럼 당시에 느끼던 정서와는 또 묘하게 그 맛이 달라져 버린 것 같기도 해요.
'물질과 시간, 공간에 대한 반복과 변주'가 시인의 시 안의 차이와 특개성을 드러내는 것처럼,
그 시인의 시를 다시 읽고 느끼는 동안 저는 제 각각의 시공간 속에서 향유의 '차이'를 선물받게 되었다고나 할까요.
논센소,  빵공장으로 통하는 철도로부터 23년 뒤 –2, 공구통을 뒤지다가, 이 세 편의 시를 따라나가는 동안
그의 슬픔 안으로, 그의 더한 옛날 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만 같던 일도 무척 기억에 남아요.
시를 세심히 골라오신 덕분이라고 믿어요. 그리고 덤으로 이렇게 아름다운 후기까지, 무척이나 감사드려요. 아니, 감동입니다.^^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댓글의 댓글

희음님의 댓글을 보니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이 변주되고 새로운 '차이'로  서로에게 스몄던 것이 환기되어 되살아납니다.
우리 매주 새로운 시의 환기로 무더운 여름의 공기를 날려버리자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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