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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0807 <캘리번과 마녀> 5장 발제문
소리 / 2017-08-07 / 조회 2,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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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장 식민화와 기독교화: 신세계의 캘리번과 마녀들] 2017.08.07 소리

 

분열된 몸, 확대되는 자본주의 그리고 마녀

페더리치는 마지막 5장에서 식민주의 시대의 여러 식민지에 퍼지던 기독교화와 함께 자행되던 마녀사냥에 대해 얘기하고 있습니다. 유럽에서 일어났던 마녀사냥과 마찬가지로, 식민지에서 일어나던 마녀사냥도 동일한 사회적 기능을 위해 이용되었습니다. 토지에서 지역공동체를 추방하고, 빈곤을 확산시키며, 기독교 개종을 강요하면서 민중들의 공동체를 파괴하여 그들의 자율성을 빼앗을 수 있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유럽에서 신세계로 수출된 억압체계는 그 지역에서 수정된 억압체계로 탈바꿈 하게 되고, 이를 유럽이 꾸준히 역수입하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신세계의 식민화와 기독교화를 통해 새로운 국제분업의 체계를 구축하게 되고, 글로벌 프롤레타리아로 분화되게 됩니다. 이를 통해 노동 계급 간의 갈등을 구조적으로 재생산하는 구조를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원주민들의 악마화

이러한 자본주의의 확장 그리고 이식 과정에서 마녀사냥은 중요한 기술이었습니다. 아메리카를 식민화하는데 핵심적인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아메리카의 토속 종교를 (기독교적 의미의) ‘악마화’하면서, 식민지 원주민들 자체를 악마화했습니다. 이 악마화 과정은 공동체 전체를 침묵시키고, 구성원들 간의 반목을 이끌어내기 위한 고의적 전략이었습니다. 결국 이것은 문화적 인클로져 운동이기도 했는데, 인간성의 말살, 신체와 토지, 사회적 관계에 대한 인클로져 운동이었습니다.

이 악마화 과정에서 이용된 것은 “식인, 악마숭배자, 남색가”라는 주제입니다. 당대 유럽인들 사이에서도 식인적인 형태의 풍습이 있었고, 인간이나 동물의 창자를 사용한 문화가 있었으므로 그것이 낯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유럽인들은 식민지의 원주민들을 착취하기 위해, 그리고 남성에게 우호적인 자본주의 사회로 재편하기 위해서 이들의 악마화는 꼭 필요했습니다. 식인과 남색, 마녀는 악마 숭배의 증거로 채택되었고,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적극적으로 기독교 개종을 강요했습니다. 동시에 이 원주민들은 악마의 지배를 받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땅과 생명을 빼앗아도 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이들의 식인 풍습은 마녀들의 사바트를 연상시키는 것이었고, 이와 관련된 삽화와 이야기들이 유럽 전역으로 퍼졌습니다.

1550년대 이후 원주민들에 대한 공포, 식인과 악마숭배자라는 낙인으로 인한 공포는 이들을 노예로 만들기 위한 수단으로 적극적으로 이용되면서 더욱 혹독한 착취로 이어집니다. 더욱 혹독해진 착취체제는 우상숭배 반대캠페인과 반 인디언 선동의 전환점이 됩니다. 그동안에는 원주민들의 생산해 낸 잉여상품을 착취했다면, 이제 본격적으로 이들을 노예화-프롤레타리아화 시키기 위한 착취체제를 만들어갑니다. 우상숭배를 하는 이들에 대한 가혹한 형벌과 자살로 몰아가는 환경이 그것입니다. 이들이 믿는 지방신 후아까스를 믿지 못하게 하고 공격하는 것은 공동체와 그 역사의 뿌리, 그리고 사람과 대지의 관계와 이들과 자연의 영적인 존재와의 관계 전반을 공격하는 것과 같았습니다. 그리고 스페인인들은 이를 잘 알고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스페인인들은 자신들이 새로 설계하여 원주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는 재정착 프로그램에 이들을 몰아 넣었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기독교 개종을 하지 않은 이들에게 죽음과 폭력의 공포로 통치를 했습니다. 이들이 만들고자 했던 것은 ‘죽음의 공간’을 구축하여 이들을 굴복시키려는 것이었습니다. 끊질긴 투쟁이 있었지만 결국 이 폭력적인 권력 앞에 원주민들의 유대와 공동체는 파괴되었고, 종교는 그 원래의 공동체적 성격을 잃고 개인적 행위로 변화했습니다.

 

아메리카의 마녀와 여성

원주민들의 종교에서는 여성의 역할이 중요했습니다. 콜럼부스 이전 사회에서 여성신들이 많았고, 따라서 여성도 강력한 지위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스페인인들이 오면서 모든 것은 변했습니다. 이들은 여성혐오적인 신념을 주입하여 남성들에게 우호적인 방식으로 경제와 정치권력을 재조직했고, 전통 족장들이 권력을 지키기 위해 공동체 토지를 인수하고, 공동체의 여성구성원이 토지와 물을 이용하지 못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과거 일상생활에 필요한 옷과 그릇을 만들고, 약초를 재배하고 의사로 활동하며 사회 내의 큰 역할을 차지하던 여성, 집 안의 신을 위해 봉사하는 사제의 역할을 하던 식민지 경제 내의 여성들은 이제 하녀나 직조공으로 전락했습니다. 또한 일부다처제를 불법화하면서 여성들은 남편과 헤어지게 되거나 법률상 하녀로 분류되거나, 아이들은 다섯가지 형태의 서자들로 구분되어 서열화되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유럽의 백인 남성을 유혹하는 인디오 여성’이라는 환상에 봉사하기 위해 ‘인디오’남성들은 자신의 여성 친족들을 사제나 식민자들에게 바치기도 했습니다.

 

이렇게 폭력적인 유럽인들의 침입으로 여성들의 삶은 더욱 힘들어졌고, 여성들을 중심으로 저항운동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만큼 마녀사냥도 커져갔지만, 유럽과 아메리카가 다른 점이 존재합니다. 마녀사냥의 목표는 지역공동체로부터 여성의 고립이지만, 안데스의 마녀들은 마을 공동체에서 버리지 않았습니다. 이들을 적극적으로 수용하고, 이들과 함께 하고 싶어했습니다. 따라서 원주민들에게 마법과 전통은 분리되지 않았고, 여성들을 중심으로 종교적 실천은 이어져갔습니다. 지방신 후아까스와 그와 관련된 장소들도 파괴되지 않았습니다.

중앙 멕시코와 남부멕시코에서도 여성의 저항은 비슷했습니다.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공격적으로 저항했고, 자신들의 문화를 지하로 쫓겨나긴했지만 지켜나갔습니다.

 

이후의 마녀사냥 그리고 지금도...

아메리카의 마녀사냥은 17세기 말까지 이어지다, 권력이 안정화되고 인구가 감소하면서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마녀의 모습은 이제 노예 플렌테이션의 현장으로 갑니다. 마녀는 이제 노예의 모습으로 서술되었습니다. 노예들의 반란 선동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에 대한 악마화로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이후 노예제가 폐지된 상황에서도 부르주아의 레파토리에서는 마녀사냥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1840년대 서인도에서는 마녀사냥이 일어나, 남편이 죽으면 아내를 함께 태워죽이는 풍습인 사티가 있을 때보다도 더 많은 여성들이 죽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도 마녀사냥은 위세를 떨쳤고, 많은 아프리카의 나라들을 분열시키는 핵심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여기서 사용된 마녀사냥은 자본주의의 성장과 자원을 둘러싼 강력한 투쟁으로 인한 여성의 지위하락과 동시에 진행되었습니다. 이제는 신자유주의적 의제의 도입으로 약화되었습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세계 곳곳에서 마녀사냥이 재등장했었던 것은 “시초축적”과정의 약탈, 한때 끈끈했던 공동체에 분열의 씨뿌리기 같은 것들이 다시 세계적인 의제로 상정되는 것을 의미한다. ... ... 마녀사냥이 탈취에 대한 저항의 번죄화를 위한 수단으로서 위로부터 수행되든, 오늘날 아프리카 일부 지역에서 그런 것처럼 줄어드는 자원을 전유하기 위한 수단에서 아래로부터 수행되든, 이는 마녀사냥과 함께 나타나는 현상이다.“

 

마녀사냥은 예전에 있었던 것이라고 착각해서는 안되는 현재적으로 반복해서 나타날 수 있는 것임을 상기시켜주는 문구였습니다. 자본주의를 떠받치는 이 기반은 시초축적을 가능케하는 마녀사냥은 가부장제적 식민화 이데올로기의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수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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