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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진실의 용기 0810 : 7~8강 발제 +8
아라차 / 2017-08-07 / 조회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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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진실의 용기 7강~8강 발제_ 아라차

 

7강. 푸코가 파레지아 사례로 <라케스>를 뽑는 네 가지 이유

 

소크라테스의 고유한 진실-말하기, 즉 예언, 지혜, 가르침의 진실-말하기와 구분되는 파레지아의 사례를 다른 대화편에서도 찾을 수 있다. 그럼에도 푸코는 <라케스>를 뽑는다. 

 

그 이유는 첫째, <라케스>에서는 <변론>에서 본 세 가지 기본 옵션이자 소크라테스의 진실-말하기를 다른 것과 구분시켜 주는 것들이 서로 연관된 형태로 분명하게 정식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먼저 파레지아라는 개념이 분명하고 빈번하게 나타난다. 여기서 일종의 파레지아적 협약이 대화 초반부에 정식화된다. 그러고 나서 소크라테스는 파레지아를 가진 사람으로서 출현한다. 그리고 이그제타시스, 검증하고 시험하기라는 개념이 나온다. 실질적이고 중요한 논의가 시작되기 전에, 대화참여자들이 소크라테스가 제안한 게임을 수락할 때 그들이 이 시험의 원리 아래에 놓이는 것을 보게 된다. 이 검증의 원리는 대화참여자들이 따라야 할 게임의 기본규칙이다. 또 에피멜레이아라는 개념이 대화의 상수로 존재한다. 이들의 대화는 젊은이들에 대한 관심, 교육, 훈련, 견습, 정치에서 필요로 하는 덕과 자질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 대화를 관통하여 우리는 세 가지의 연결, 결합을 보게 된다. 진실-말하기에 있어서 용감한 솔직함으로서의 파레지아, 영혼 검사 내지 시험의 실천으로서의 이그제타시스, 그리고 이 파레지아, 솔직한 검증의 목표와 대상으로서의 돌봄.

 

두 번째는 정치적 장면과 관련되어 있다는 점이다. <라케스>에 등장한 어른들은 대화 당시 이미 특정한 역할을 맡고 있는 정치인들이다. 소크라테스는 정치적 무대와 직접적인 관계를 맺고, 정치인들에게 직접 이야기하며 정치적 활동과 직접 연루되어 있다. 그런데 대화 전체는 그가 정치적 게임과는 다른 형태의 게임을 제안하는 걸 보여준다. 그는 정치적 담화, 정치적 진실-말하기가 아닌 형태의 진실-말하기를 제안하고 그 정치인들을 정치와는 다른 곳으로 이끌고 간다.

 

세 번째 이유는 이 대화편 전체를 관통하는 용기의 테마 때문이다. 이 대화의 주제는 용기에 관한 진실을 말하는 것, 용기의 본성을 규정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엉뚱한 제안을 받아들이고 소크라테스의 질문에 대답하는 데 있어 용기를 보여준 두 장군이자 정치인, 라케스와 니키아스의 용기가 있고, 그런 중요한 사람들과 마주한 소크라테스의 용기가 있다. 용기는 시민의 자질로서, 서로 다른 인물들의 지닌 덕의 징표로 제시된다. 이 대화의 핵심에는 진정으로 용감한 사람들, 진실의 문제와 대면할 용기가 있으며 용기의 진실과 대면한 사람들이 제기한 진실의 용기라는 문제가 있다.

 

우리는 보통 진실의 윤리에 관한 문제를 주체의 순수성 혹은 순수화의 문제형식 안에서 찾곤 한다. 진실에 접근하기 위해 주체는 감각적인 세계, 오류, 이해관계, 쾌락의 단절 속에서 진실의 영원성이나 순수성과 관련해서 불순함의 우주를 구성하는 세계와의 단절 속에서 자신을 구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정화이론은 피타고라스학파뿐만 아니라 근대철학에서도 발견된다. 데카르트도 결국 정화이론이다. 그러나 순수하다는 것은 진실의 윤리학의 단지 한 측면일 뿐이다. 진실의 윤리에는 용기라는 다른 측면이 있다. 더 이상 진실을 위한 순수함의 분석이 아닌 다른 형태의 진실을 향한 의지의 분석이 필요하다. 호기심, 전투, 용기, 결단력, 그리고 인내와 같은 것이다. 

 

마지막으로 서구철학의 한 가지 발전경로의 출발점으로 이 텍스트를 자리매길 수 있기 때문이다. <알키비아데스>처럼 <라케스>에서도 교육에 있어서 돌봄의 원칙을 근거로 삼는다. <알키비아데스>에서 우리는 영혼을 돌보아야 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러나 <라케스>에서는 비슷한 문제의식으로부터 출발하지만 전혀 다른 방향으로 전개된다. 정확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대상이 무엇인지 정확히 제기되지는 않지만, 자기 돌봄의 출발이자 최종 목표로서의 영혼을 지정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돌보야 하는 목표로 지목되는 것은 영혼이 아니라 삶(bios)이다. 살아가는 방식이다. 에피멜레이아의 근본목적을 구성하는 것은 이 실존의 양식 내지 실천이다.

 

<라케스>와 <알키비아데스>를 비교할 때 우리는 철학적 반성과 실천의 두 가지 발전경로의 출발지점을 확인할 수 있다. 한 편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돌보게끔 독려하면서 그들을 영혼의 형이상학적 실재로 이끄는 철학이 있고, 다른 한편에는 삶의 검증으로서의 철학, 실존의 테스트, 특별한 종류의 삶의 양식과 형식의 고양으로서의 철학이 있다. 즉, 영혼에 관한 인식에 강조점을 두며, 이 지식으로부터 자기(self)의 존재론을 형성하는 철학과 자기에 대한 기술(art)의 목표이면서 윤리적 재료인 비오스, 삶의 검증으로서의 철학이 있다.

 

<라케스>는 영혼에 대한 지식이 아니라 삶의 검증으로서의 자기 돌봄이라는 문제의식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이 대화에서 세 가지 모멘트를 분석해 보겠다. 첫 번째 텍스트는 대화편의 시작부분에서 대화를 조직하는 구절이다. 이것은 솔직함의 협약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구절은 대화가 1/3쯤 끝나는 부분으로, 소크라테스의 검증(이그제타시스)를 정의하고 수락하는 부분이다. 세 번째는 결론 부분으로, 선생의 필요성, 선생을 구하는 문제와 자기 돌봄의 정언명령 간의 상호작용을 볼 수 있다. 

 

대화에 참여한 뤼시마쿠스, 멜레시아스, 니키아스, 라케스는 자식들에게 해야 할 돌봄의 주제를 보게 되며, 이것이 파레지아와 직접 결합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그들은 자식을 돌보는 문제를 제기하기 위해 파레지아에 호소해야, 진실을 말하는 자신의 용기에 호소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 자신이 어렸을 때 방치되었고, 그래서 어떤 모범을 보여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후 이들의 대화가 정치적 논쟁이나 신체적 대결처럼 흘러 장벽에 부딪힐 때, 소크라테스가 등장한다. 소크라테스의 개입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제에 접근하고 다른 방식으로 논의가 전개됨을 예고한다. 그 전환은 간단한다. 첫째 정치적 논의에서 기술적 논의로의 전환이다. 다수결에 따라 하나가 결정되는 정치적 영역과 결별하고, 한편으로는 선생의 자질, 다른 한편으로는 업적의 자질에 의해 우세함이 결정되는 다른 차원을 불러오게 된다. 테크네의 진실-말하기, 혹은 가르침의 진실-말하기는 선생과 업적의 이중적 관계에 의해 권위를 갖게 된다. 소크라테스 자신은 이런 논증을 피한다. 그는 기술적 문제만 제기하고 다시 대화자들이 유능함의 문제와 관련해서 검증 게임에 들어가게 한다. 이것이 두 번째 전환이다. 그리고 나서 전문지식을 전수하기 위한 그들의 자질을 물음으로써 소크라테스는 또 완전히 다른 영역을 끌어들인다. 그들에게 자신의 전문지식에 대한 견해를 말하는 선생의 자격이 있는지 물음으로써, 그는 정치적인 것도 아니고 테크닉한 것도 아닌, 파레지아적이고 윤리적인 게임, 에토스의 문제를 향한 파레지아 게임으로 끌어들인다. 

 

8강. <라케스>를 통해 알 수 있는 소크라테스의 파레지아 실천 

 

첫 번째 질문 : 이 게임은 어떻게 드러나고 받아들여지는가? 소크라테스가 질문으로 제안하고 참여자들이 동의한다. 최상의 파레지아 협정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자기가 말해야 할 모든 것을 솔직하고 자유롭게 말하게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질문 : 파레지아 협정이 수락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그는 자기에 대해 설명하라고 요구받게 된다. 즉 자기와 로고스 사이의 관계를 보여 달라고 요구받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살아가는 방식에 관한 질문이다. 소크라테스의 담화와 파레지아가 초점을 맞추는 것은 바로 이 실존의 영역, 이 실존의 양태, 삶의 방식이다. 즉 그것은 기술적 가르침 속에서 이뤄지는 일련의 합리성도 아니고, 영혼의 존재양태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삶의 스타일, 살아가는 방식, 삶에 부여하는 형식이다. 자기에 대한 설명은 권위를 부여하는 기술적 유능함의 설명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시금석에 맡기는 것, 즉 우리의 삶에서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게 해 주는 검증에 맡기는 것이다. 우리는 이 지점에서 소크라테스적인 파레지아와 담화의 대상으로서 삶의 양식이, 검증하고 시험하고 선별하는 작업이 필요한 삶의 양식이 출현하는 것을 보게 된다. 행동하고 존재하고 살아가는 방식에서 좋은 것과 좋은 않은 것 사이의 올바른 구분을 만들기 위해서 삶은 시금석을 따라야 한다. 

 

세 번째 질문 : 소크라테스가 다른 이들에게 이 방법을 사용하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는 것은 무엇인가? 소크라테스적 파레지아가 가능했고, 그 대화가 받아들여진 이유. 라케스는 “말하는 사람의 삶이 그의 담화와 조화로울 때, 어떤 이의 담화와 그의 실존이 조화로울 때 나는그 담화를 받아들인다. 즉 살아가는 방식과 말하는 방식 간의 관계가 조화로울 때 나는 담화를 받아들이고 또 담화를 사랑하는 이가 된다”고 얘기한다. 정확히 소크라테스의 경우를 얘기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적 담화는 사람들이 자기를 돌볼 수 있게 하는 담화이다. 정치적이거나 기술적 양식은 이 근본적인 필요한 돌봄에 답해줄 수 없다. 오직 소크라테스적 관심, 적용, 열정, 에피멜레이아만이 사람의 돌봄이라는 문제에 답해줄 수 있다. 소크라테스적 파레지아는 유능함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테크네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그저 실존의 양식, 삶의 양식에 대해 말한다. 사람에 대한 돌봄/관심의 영역에서 진실-말하기는 그들의 삶의 양식을 질문하고, 이 삶의 양식을 시험에 놓고, 삶 속에 좋은 것으로 승인하고 인정할 것과 거부하고 비판해야 할 것을 정의내리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다른 이들을 자기 돌봄으로 그리고 가능하면 타인을 돌볼 수 있게끔 인도하는 사람이다. 자신과 자녀를 돌보는 것은 사실 소크라테스 프로젝트의 핵심이며 파레지아에 입각한 실천의 목표이다. 진짜 선생은 학교선생이 아니라 로고스이기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다른 이들처럼 그것에 귀 기울여야 하고, 그 자신과 다른 이들을 돌보아야 한다고 얘기한 것이다. 에피멜레이아(돌봄)의 협약, 시금석에 의한 검증, 로고스에의 최종 순종. 신이 소크라테스가 사람들 속에 가야하고 사람들에게 그들이 사는 방식을 설명하도록 요청해야 하고 이런 식으로 사람들이 자신을 돌보도록 가르쳐야한다고 계시했고, 소크라테스는 그 자신의 담화와 실천을 통해 이를 증명했다. 

 

 

댓글목록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빠르쥬? 알곡만 뽑아서 발제해보았슴다!
목욜날 뵈요.

연두님의 댓글

연두 댓글의 댓글

발제여왕. 순서를 바꾸어 나 대신 이번 주에 해 주니 어찌나 든든한지.
다들 뜨겁게 푸코와 해후하시길! 유후!

빙꼬병님의 댓글

빙꼬병

우이C... 이런 멋진 발제.. 우짜라규.. 그리고 푸코 세미나.. ㅠㅠ
머리에 붙은 변덕을 끄집어 내리는 마음으로 잘 읽었어요.
이 얼마만의 푸코 텍스트인가요.. 몇주 쉬었더니...
쉬니 좋대요.. 허나 또 울 푸코 텍스트 없으면 또 허전..
이건 뽕 수준이야 뽕...! ㅎㅎ

연두님의 댓글

연두 댓글의 댓글

유택은 세미나에서 하차하는데
빙꼬병은 계속하는 뭐 그런 건가요? ㅎㅎ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댓글의 댓글

빙꼬뼝~~ 이번 주 목욜날 꼭 봐! 변덕도 유택의 고귀한 덕! ㅎㅎㅎㅎ

삼월님의 댓글

삼월

푸코뽕 금단증상에 시달리는 1인 추가요.
척 봐도 멋진 발제네요. 히히
중독자를 부르는 이 유혹적인 손짓이라뉘.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댓글의 댓글

삼월 금단증상이 더 큼 ㅎㅎ 어여오세용(유혹)(유혹)

소리님의 댓글

소리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다들 어서오세요~ㅋㅋㅋㅋ아라차 고생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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