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제 [그라마톨로지] 2부 자연, 문화, 에크리튀르(PP.150∼178)
안지영
/ 2017-08-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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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는 레비스트로스에게서 발견되었던 살아 있는 음성에 대한 찬양이 루소에게 나타나는 특정 모티브에 충실한 결과로 본다. 그런데 이 모티브는 역설적이게도 충만한 음성언어에 대한 불신이라는 반대항과의 작용과 더불어 작동한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루소가 거울 이미지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 언급된다. 거울의 박탈은 나를 성립시키면서 동시에 해체하며 이는 언어활동의 법칙이 작동하는 방식과 일치한다. 마찬가지로 담화에서 현전은 약속되면서 동시에 거부된다. 우리는 언어 행위 속에서 우리가 현전을 붙잡으려고 시도하는 것에 의해 현전을 빼앗긴다.
루소는 이러한 힘을 인정하기보다 추방하는 데 서두른다. 그는 에크리튀르를 신뢰하지 않았다. 루소는 에크리튀르를 현전의 파괴로, 그리고 음성언어의 병으로 단죄한다. 루소는 음성언어가 박탈당한 것의 재전유하는 정도 내에서만 에크리튀르를 복원시킨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그러나 그것보다 더 오래되고 자리 잡은 어떤 에크리튀르(a writing)를 통하지 않고 무엇을 통해 복원시킨다는 말인가?”라고 물음을 던진다. 물론 루소는 글쓰기로의 이동이 자신의 현전을 복원하는 것이라고 기술하며 글쓰기가 음성언어를 간직하거나 되찾을 유일한 수단임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음성언어는 스스로를 내줌으로써 스스로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이로써 기호의 경제가 조직된다. 여기서 데리다는 에크리튀르가 음성언어를 대체하는 작업이 현전을 가치로 대체하는 작업과 일치한다고 지적하며, 이를 죽음을 통해 삶을 개시하는 것과 관련짓는다(“나는 내가 나를 죽은 사람으로 바라보았을 때 비로소 살기 시작했다.”- 『고백록』).
이것이 루소가 생각한 고전적 개념이라면 데리다는 에크리튀르 작업과 차연의 경제가 이와 같은 존재론이나 인식론에 의해 수동적으로 지배되지 않는다고 강조한다. 차연은 전유에 저항하지 않으며 그것에 외적 한계를 강제하지 않는다. 그것은 소외를 개시하면서 시작되지만 결국은 재전유가 개시되게 내버려둔다. 죽음은 차연의 움직임이다. 다시 말해 차연은 현전과 부재의 대립을 가능하게 한다. 차연의 가능성이 없다면 현전에 대한 욕망은 숨 쉬지 못한다. 차연은 그것이 금지하는 것을 생각하고 그것이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 자체를 가능하게 만든다. 활발한 운동을 하는 차이는 형이상학에 선행할 뿐 아니라 존재의 사유를 넘어서는 것이다.
맹목으로부터 대리보충으로
데리다는 루소의 고유한 이름을 결합, 분리(‘장 자크’와 ‘루소’로)시키면서 이들을 결부시키는 일치와 불일치를 생각해보자고 제안한다. 루소는 에크리튀르를 위험한 수단으로 간주하고, 다만 음성언어가 현전을 보호하는 것에 실패할 때 긴급하게 말에 첨가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그는 문자에 대한 의존을 위험한 것으로 치부하며 인위적이고 교활한 술책, 언어의 자연적 운명에 가하는 폭력으로 인지한다. 대리보충은 첨가되는 것이고 잉여물이며 다른 충만함을 풍요롭게 해주는 충만함이고 현전의 과잉이다(257).
대리보충이 무언가를 대리 표상하고 이미지가 된다면 어떤 현전이 이전에 결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리보충의 위치는 구조 속에 빈 곳의 표시를 통해 할당된다. 그런 점에서 기호는 언제나 사물 자체의 대리 보충이다. 이런 점에서 데리다는 대리보충의 외재성에 주목한다. 루소가 ‘악의 부정성’을 사유하면서 그것의 외재성(대리보충성)에 주목하는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이와 대비되어 자연적 현전(루소의 경우 모성적인 현전)은 그 자체 스스로 충분해야 하는 것이다. 루소의 사상에서 ‘교육’ 역시 자연이라는 구축물을 가능한 한 가장 자연스럽게 재구성하게 해주는 대리 체계로서 기술되거나 규정된다. 모성적 배려는 결코 대리보충되지 않는다할지라도, 부족한 자연(건강하지 않은 어머니의 젖)을 문화(건강한 유모의 젖)가 대리보충해야 한다.
유년기는 결핍의 최초 발현이고 이 결핍은 자연 속에서 보충을 요청한다. 교육은 필요악이다. 이것은 가능한 한 가장 적게, 가장 늦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대리보충은 인류의 기회이자 타락의 기원이다. 그것은 타락의 가능성으로서의 진보와 관련되며, 이 돌이킬 수 없는 스캔들에 의해 자연이 기술과 사회의 대리보충이 되고 만다. 해서 루소는 인간을 ‘자연적 삶’으로서의 식물에서 멀어지게 하고 야금술로 향하게 하는 폭력이 사회의 기원이라는 점을 지적한다. 이러한 루소의 견해를 이어받아 데리다는 이성으로는 파악할 수 없는 맹목이 사회와 더불어 탄생하는 것(언어, 사물에 대한 기호의 대체, 대리보충의 질서 등)을 생산한다고 본 루소의 견해를 자기 에로티시즘의 경험(자위)의 측면에서 분석하기 시작한다.
자위행위에 의한 죄의식은 아이들에게 거세의 위협을 내면화하도록 강제한다. 이에 따라 쾌락은 광기와 죽음에 노출되는 것으로 체험된다. 모성적 ‘자연을 기만하는’ 대리보충은 에크리튀르처럼 작용하며 에크리튀르처럼 생명에 위험하다. 이는 이미지의 위험이다. 이미지로부터 음성언어의 위기가 열리듯 자위행위는 상상에 의한 유혹으로 생명력의 파멸을 예고한다는 것이다. 이 위험한 대리보충은 유혹적이다. 그것은 탈선시키고 욕망을 자연적인 도상으로부터 방황하게 한다. 위험한 대리보충은 자연과 단절한다. 진정한 어머니의 사라짐으로서의 ‘엄마’, 이때 ‘엄마’는 상상이 작동할 수 있도록 비가시적이자 보지 않는 존재이어야 한다. 이는 다음절에서 루소의 엄마이자 연인이었던 바랑부인과의 관계를 통해 상술된다.
대리보충의 연쇄
위험한 대리보충의 발견은 위와 같은 ‘어리석음’ 사이에서 언급되나 그것은 여전히 어떤 특권을 간직하고 있다. 데리다는 루소가 이러한 대리보충의 성격을 이성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상태에 대한 설명 이후에 환기한다는 점을 지적한다. 엄마(바랑 부인)에 대한 루소의 경험은 장 자크 루소의 ‘생명’과 ‘텍스트’가 끝날 때까지 재활성화 되고 구성되어야 하는 ‘현재’에 대한 활성화된 강박으로 남는다. 루소는 부재하는 아름다운 것들을 소환하면서 스스로의 현존을 줌으로써 애착하는 그 자위행위에 계속해서 의지하는 한편으로 자신을 탓하였다. 데리다는 이를 자기촉발(Selbstaffektion, auto-affection)이라는 개념을 끌어다 설명한다. 만일 현전이 어떤 다른 현전의 대체적 상징일지라도, 이 다른 현전은 이러한 대체 유희 그리고 자기촉발의 상징적 경험 이전에는 결코 ‘몸소’ 욕망될 수 없었다. 물자체가 자기 촉발의 가능성이 없이는 존재하지 않는 상징적 체계의 바깥에서는 나타나지 않는다.
현재 시제로 우리에게 배달되는 현전은 키메라이다. 자기촉발은 순전한 사변이다. 부재하는 현전을 대리보충하러 오는 기호, 이미지, 표상은 기만하는 환상이다. 좌절의 경험이 죄의식에 첨가되고 죽음 및 거세의 불안에 첨가된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것은 이것들과 동일시된다. 물자체의 향락은 그것의 행위 그리고 그것의 본질에서 좌절에 의해 반복된다. 이것이 대리보충의 구속이고 형이상학의 모든 언어를 뛰어넘는 구조이다. 데리다는 이러한 상황의 복잡성을 설명하면서 대리보충이 무서운 위협이면서 동시에 최초의 보다 확실한 보호, 즉 위협 자체에 맞서는 보호라고 부연한다. 대리보충은 기호의 대리를 통해 부재하는 현전을 얻게 해주면서 현전을 거리를 두고 유지하며 제어한다. 이 현전은 욕망되면서 두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대리보충은 금지를 위반하면서 동시에 준수한다. 그것의 경제는 힘들과 힘의 차이들의 유희에 따라 우리를 노출시키며 동시에 보호한다.
더불어 그는 향락과 죽음을 연결시킨 루소의 명제에 대해 언급하며 헤테로-에로티시즘은 자신의 대리보충적 보호를 자신 안에 받아들일 수 있을 때만 체험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즉 자위와 헤테로-에로티시즘 사이에는 경계가 아니라 경제적 배분이 있다는 것이다. 루소의 차이도 그렇다. 루소는 자신의 모든 삶을 이른바 자위행위라는, 그리고 작가로서의 그의 활동과 분리될 수 없는 위험한 대리보충의 유형에 의탁해야만 했다. 테레즈에게 사랑을 바치는 대신 자위(혹은 기호)에 만족하는 것. 외관상 이기주의적인 이러한 경제는 또한 하나의 도덕적 표상 체계 전체 속에서도 기능한다. 이기주의는 죄의식에 의해 속죄된다.
이처럼 장 자크는 다음과 같은 조건으로만 자신의 부인 테레즈에게서 대리 보충을 추구할 수 있었다. 즉 대리보충성 일반의 체계가 이미 그 가능성이 열려져 있고 대체의 유희가 오래 전에 개시되었고 어떤 식으로든 테레즈 자신이 이미 하나의 대리보충이었다는 것이다(“나에게는 전부와 전무 사이에 중간은 결코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테레즈에게 내가 필요한 대리 보충을 만났다.”). 이러한 대리보충들의 연쇄를 통해서 하나의 필연성이 예고된다. 대리보충적인 매개들을 불가피하게 복수화 하는 무한한 연쇄 고리의 필연성들은 그것들이 지연시키는 것 자체의 의미를 생산한다는 것이다. 물자체, 직접적인 현전, 시원적 지각, 이런 것들에 대한 신기루. 직접성은 파생된다. 이것이 ‘이성으로는 생각할 수 없는’ 것이다.
궤도를 벗어난 것(exorbitant). 방법에 대한 질문
중간이라는 것은 환경이고 매개이며 현전의 총체적 부재와 절대적인 충만 사이의 절충이다. 데리다는 매개성이야말로 루소가 집요하게 지우고자 했던 모든 것의 이름이라고 말한다. 그런데 장 자크는 그가 어떤 어머니나 어떤 자연을 대체하기 위해 서로 연결된 대리보충들을 하나하나 쓰는 그 순간에 상기시키고 있다. 여기서 대리보충이 완전한 부재와 완전한 현전 사이의 중간 지점을 차지한다. 그러나 루소는 마치 대리보충에의 의존이 매개 앞에서 그의 초조함을 진정시켜 줄 것처럼 말한다. 그것이 이성적으로 통제되고 길들여질 수 있다는 듯 말이다. 대리보충의 위험성은 그렇게 진정된다.
이 문제는 루소의 에크리튀르 뿐 아니라 우리의 독서에 대한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하나의 언어, 하나의 논리 속에서 글을 쓰지만 그의 담론은 그것의 고유한 체계, 법칙들 그리고 삶을 절대적으로 지배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의 독서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것은 그가 사용하는 언어의 도식 가운데 그가 지배하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사이의 관계, 즉 작가가 인지하지 못하는 관계이다. 이는 비판적 독서가 생산해야 하는 의미화 구조이다. 물론 이는 작가가 소속된 역사와의 교환 속에서 성립시키는 관계를 재생산하는 일이 될 수 없다. 데리다가 여기서 제안하는 텍스트 읽기의 방법은 텍스트 밖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근본적인 이유가 있다. 어떤 흔적, 대리보충에의 호소 등에서 의미를 떠맡으면서 스스로를 덧붙이는 것으로 오로지 대리보충만이 있을 뿐이다. 데리다는 절대적 현재, 자연, ‘실제적인 어머니’ 같은 것이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이 이미 텍스트 속에 나타나 있다고 말하며, 의미와 언어활동을 여는 것은 결국 에크리튀르라고 정리한다.
텍스트 읽기와 관련해 데리다가 강조하는 것은 순수한 기의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기표로부터 기의의 환원불가능한 층위로 주어지는 것과 관련해 서로 다른 여러 관계들이 있다는 점이다. 문자화된 철학 텍스트는 그것이 전달하려는 의미화된 내용과 마주하여 스스로를 지우려는 기획을 포함하고 있다. 철학적 문학은 이 역사에서 가장 의미심장한 축에 속한다. 문학적 글쓰기는 거의 언제나 그러한 초월적 읽기에 적합하다. 데리다는 루소의 글쓰기야말로 전달할 수 있는 메시지가 고갈되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그런 글쓰기로서 이것이 재단/절단(裁斷, découpage)의 문제를 제기한다며 세 개의 예를 든다.
1) 데리다는 우선 ‘대리보충’에 대한 읽기가 정신분석학적이 아닌 이유를 설명한다. 관습적으로 문학에 대한 정신분석은 문학적 기표를 괄호 속에 집어넣는 것으로 시작한다. 또한 정신분석학 이론 자체가 우리의 역사와 문화에 속한 일부 텍스트들의 집합이기도 하다. 정신분석학은 에크리튀르의 환원불가능한 독창성을 중심으로 조직되고 교차하는 구조들과 총체성의 재단과 해석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가정한다. 하지만 데리다는 이미 대리보충에 대한 해석을 통해 이런 과제가 실패할 수밖에 없음을 측정했다며 이런 방식을 추구하지 않을 것임을 밝힌다.
2) ‘대리보충’이라는 말을 따라갔을 때 루소의 텍스트 내에서 특정한 길을 가로지르게 되는데, 이는 어떤 시놉시스의 경제를 보장해줄 것이다. 이에 대해 데리다는 그렇다면 다른 길은 가능하지 않은지, 그리고 모든 길들의 총체가 실질적으로 다 파헤쳐지지 않는 한 어떻게 이 궤적을 정당화할 수 있는지에 대한 물음을 던진다.
3) 마지막으로 데리다는 루소의 『언어기원론』을 비롯한 언어와 에크리튀르에 대한 단편 텍스트들을 혹자가 궤도를 벗어났다고 판단할 방식으로 다루고자 한다고 알린다.
그렇다면 궤도를 벗어났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데리다는 자신이 로고스 중심적인 시대의 총체성과 관련한 어떤 외재성의 지점에 다다르고자 했으며, 이는 이로부터 어떤 해체가, 다시 말해 순환적인 궤도의 해체가 개시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그런데 이러한 해체가 경험주의적인 것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그는 경험주의란 자기 담론의 정연함을 주장할 수 없고 회의주의의 내적 모순을 벗어날 수 없는 무능력의 다른 이름일 뿐이라는 것이다. 데리다는 루소를 역사 속에 위치 지우려는 것도 역사와 무관한 존재로 다루려는 것도 아니다. 중요한 것은 로고스 중심적인 시대의 결정적인 분절을 인정하는 것이다. 이러한 인지를 위해 루소는 매우 훌륭한 계시자이다. 흔적의 사상은 하나의 출발점을 절대적으로 정당화하는 일이 불가능함을 가르쳐주었으며, 따라서 우리는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어딘가에서 시작해야 한다. 우리 자신이 그 속에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하나의 텍스트, 이미 존재하는 하나의 텍스트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말이다.
텍스트를 넘어서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우리의 궁극적 정당화는 다음과 같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