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기 [그라마톨로지] 6Th 세미나 (PP.115∼150)
namu
/ 2017-08-07
/ 조회 1,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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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그라마톨로지] 6Th 세미나 (PP.115∼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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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번 세미나에서는 제 2부, 제 1장(문자의 폭력; 레비스트로스에서 루소로)에 딸린 두 개의 하위 제목 가운데 <고유명사들의 전쟁>에 이어 <문자, 그리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를 논의하였습니다.
<<슬픈 열대>>의 남비콰라족 얘기의 도입부에서, 우리는 그들 유랑민 부족의 영토를 가로지르는 두 개의 길에 대한 서사적인 정경 묘사를 볼 수 있는데요. 하나는 유목민 무리가 이용하는 덤불숲과 거의 구별이 안되는 피카다picada라는 거친 오솔길이고, 또 하나는 외부에서 수입된 전신선입니다. 이 선은 전화선 특유의 윙윙거리는 소리를 내고 있는데, 원주민들은 이를 작업중인 야생 벌들의 벌꿀통으로 오인하여 인디언들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고 하지요.
소설식으로 이해하자면, 레비(스트로스)의 이와 같은 배치는 굉장한 복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는 우리가 앞으로 보겠지만, 평화로운 공동체에 이질적인 전신선이라는 외부적인 침입에 의해 남비콰라족의 흉악함이 표출되는 것을 외부에서의 문자의 침입으로 인해 갑작스럽게 폭력이 도래했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 <문자의 교훈>이라는 클라이맥스를 위해 신중하게 의도된 서술전략이라고나 할까요.
데리다는 이 장에서 남비콰라족 족장에 관한 에피소드에 주목하는데요. 레비는 문자의 출현이 남비콰라족 사회에서 이루어진 내재적인 발달이라기보다는 갑작스럽고 즉각적인 그 무엇으로, 외재적인 침입이라는 ‘후성설주의後成說主義’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더불어 문자의 목적은 지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목적이었다고 합니다. 부연하자면 문자라는 게 뭔가를 알고 기억하고 이해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타자를 희생시켜 한 개인의 위세와 권위를 증대시키는 도구(예속화와 위계화)였다는 것입니다. 데리다는 이 점에 대해 드물게 가차없는 비판의 칼날을 들이댑니다. 레비의 사실적 확신과 이에 대한 해석적 반복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하고, 가장 큰 괴리는 ‘비상한 사건’의 매우 얄팍한 사실과 문자의 일반적 철학 사이에서 발견된다는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문자는 남비콰라족에게 결코 수고스러운 학습 끝에 나타난 건 아니었지만, 그것은 기원의 장면이 아니고, 다만 문자를 모방하는 장면이었던 것이지요.
그렇다면 레비는 왜 개인적인 특수한 경험에서 경험 일반으로서의 이론으로 비약하려 하는 것일까요? 데리다는 레비가 남비콰라족을 본질적으로 순수하고 소박한 공동체로 위치시킬 필요가 있었다고 봅니다...그래야 문자와 더불어 당도한 타락을 보다 강력히 비난할 여지를 가질 수가 있기 때문이지요. 아울러 데리다는 레비가 남비크롸족을 평화롭고 조화로운 부족으로 추측하는 것이 가능한 유일한 이유는 그가 그 사회의 얼개에 귀속된 뭔가를 배제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즉, 원문자, 기원 문자를 말하는 것이지요. 사실 문자의 폭력은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그 부족 사회 자체의 구조에 내재하는 뭔가로부터 온다는 점에서 폭력은 기원적인 것인데 말이지요..
레비는 <문자의 교훈>을 통해 경험적인 인상을 토대로 이론의 여지가 많은 가정들 내지는 확인할 수도 반박할 수도 없는 여러 성찰들을 쏟아놓고 있습니다. 이런 배경에는 레비의 인류학 담론이 전적으로 루소의 기원신화(루소 주의)에 의해 형성되었기 때문이지요. 다시 말해, 루소적인 ‘크리스털 같은’ 구조를 갖고 있고,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 현전하고, 가까운 이웃 관계 속에 결합된 소공동체의 모델을 염두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루소는 인류의 역사를 유토피아(자연상태)로부터의 타락으로 보았다고 하는데, 이는 레비에게도 다를 바가 없다고 여겨지는 군요.
레비 스트로스는 자신의 저서 <<날것과 익힌 것>>에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현명한 사람은 참된 답을 제시하는 사람이 아니라, 참된 물음을 던지는 사람이다.” 레비가 궁극적으로 무리한 답을 내놓고 싶어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과 함께, 참된 물음으로 만족했어야 하지 않나, 하는 씁쓸한 생각이 드는군요. 다음에 우리의 텍스트 두 대목을 옮김으로써 이번 후기를 갈음하고자 합니다. 첫 대목은 방금 전 저의 의문을 확인할 수 있는 부분이고, 그 다음 대목은 이번 세미나의 결론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에의 현존, 얼굴을 마주 대한 가운데 투명한 인접 그리고 음성의 직접적인 효력 등, 사회적 진실성의 이 같은 규정은 고전적이다. 이는 루소적이지만 , 이미 플라톤 철학을 계승하고 있고, 법·권력·국가 일반에 반대하는 무정부주의적이고 절대 자유주의적인 항의와 통하고 있으며, 19세기의 공상적 사회주의들의 꿈, 푸리에주의와 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연구실 혹은 작업장에서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의 부품이나 도구처럼 이 꿈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민족학자가 ‘언제나 자기 자신의 무언가를 담아내는’ 집요한 동일 욕망에 봉사하면서, 이 도구는 다른 ‘응급수단’들과 타협을 해야 한다. 민족학자는 또한 프로이트주의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그가 추종하는 마르크스주의는 그 비판적 작업이 ‘불교적 비판’과 대립되지도 모순되지도 않는 그런 ‘마르크스주의자’이다)이기를 원하고, 그 자신이 ‘통속적인 유물론’에 유혹받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247쪽
“음성언어에서 문자(에크르튀르)를 인지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음성 언어의 차연과 부재를 인지한다는 것은 미끼를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타자의 존재 없이 윤리는 없으며, 따라서 또한 부재, 숨기기, 우회, 차연, 문자 등이 없이는 윤리는 없다. 원문자는 비도덕성으로서의 도덕성의 근원이다. 윤리의 비윤리적 개방성, 폭력적 개방성, 문자에 대한 통속적 개념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도덕의 계보를 반복하기 위해서는 폭력의 윤리적 판단 기준을 엄격하게 지연시켜야 할 것이다.” 24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