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 세미나] 선집읽기: 번역자의 과제 발제(2017.8.8)
승운
/ 2017-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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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자의 과제(1923)
17.8.8 승운
“개개의 낱말을 번역할 때의 충실성은 원작에서 그 낱말이 갖는 의미를 거의 한 번도 충분히 재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의미라는 것은 그것이 원작에 대해 갖는 문학적 의미를 두고 볼 때 의도된 것 속에서 소진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문학적 의미를 다름 아닌 바로 특정 낱말에서 그 의도된 것이 의도하는 방식에 어떻게 연결되느냐를 통해 획득하기 때문이다.”(p.136)
“그 본체를 풀어내는 일, 상징하는 것을 상징된 것 자체로 만드는 일, 순수언어를 형상화한 모습으로 언어운동에 되찾아주는 일, 이것이야말로 번역이 지닌 엄청나면서 유일한 능력이다.”(p.139)
“낯선 [원작의] 언어 마력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순수언어를 번역자 자신의 언어를 통해 해방시키고 또 작품 속에 갇혀 있는 언어를 그 작품의 재창작을 통해 해방시키는 것이 번역자의 과제이다.”(p.139)
- 결코 어떤 예술작품이나 예술형식을 대할 때 수용자를 고려하는 것이 그것의 인식을 위해 생산적인 것으로 드러나는 법이 없다. 어떤 특정 관객이나 그 관객의 대표자에 대한 모든 관계가 제 길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만이 아니라 심지어 ‘이상적인’ 수용자라는 개념도 모든 예술이론적 논의에서 해롭다. 그 이유는 이러한 논의들이 단지 인간 일반의 존재와 본질을 전제하게끔 되어 있기 때문이다. 예술 역시 그 자체가 인간의 신체적이고 정신적인 본질을 전제하기는 한다. ㅡ 그러나 어떤 예술작품도 인간의 주의력을 전제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어떤 시도 독자를 위해, 어떤 그림도 관람객을 위해, 어떤 교향악도 청중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번역이란 원작을 이해하지 못하는 독자들을 위해 있는 것일까? … 시에서 본질적인 것은 전달이나 진술이 아니다. 그럼에도 매개[전달]하고자 하는 번역은 전달 이외의 아무것도 매개하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비본질적인 것만 전달할지 모른다. … 하지만 한 편의 시에 전달 이외에 들어 있는 것 ㅡ 그리고 열악한 번역자도 그것이 본질적이라는 것을 인정한다 ㅡ 그것은 일반적으로 파악할 수 없는 것, 비밀스러운 것, ‘시적인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가? 그러니까 번역자 역시 시작을 함으로써 재현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실제로 열악한 번역의 두 번째 특징이 연유하는데, 사람들은 이러한 열악한 번역을 그에 따라 어떤 비본질적인 내용의 부정확한 전달로 정의해도 좋을 것이다. 이러한 상태는 번역이 독자에게 기여할 것을 요구하는 동안에는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번역이 독자를 위해 있는 것이라면 원작 역시 독자를 위해 있어야 할 것이다. 원작이 독자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면 번역은 이 관계에서 어떻게 이해될 수 있을까?
- 번역은 하나의 형식이다. 번역을 그 자체로서 파악하려면 원작으로 되돌아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원작 속에 그 번역의 법칙이 그 원작의 번역 가능성을 통해 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 작품의 번역 가능성에 대한 물음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그것은 작품의 독자들 전체 가운데 언젠가 그 작품을 충분히 번역할 사람을 찾게 될 것인가라는 물음을 뜻한다. 또는 보다 본래적인 물음으로서, 작품은 그 본질에 따라 볼 때 번역을 허용하는지, 그리고 그에 따라 ㅡ 이 형식의 의미에 맞게 ㅡ 그 번역을 요구하기도 하는지 라는 물음이다. 근본적으로 첫 번째 물음은 단지 문제성 있는 것으로, 두 번째 물음은 정언적인 것으로 결정할 수 있다. … 그러니까 그 삶과 순간이 잊히지 않을 것을 요구한다면 그러한 술어는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며, 오히려 사람들이 부응하지 않는 어떤 요구를 내포할 것이고, 그와 동시에 어쩌면 그 요구에 부응할 수 있을 어떤 영역, 즉 신의 기억에 대한 지시까지도 내포할 것이다. 그와 유사하게 언어적 형상물들의 번역 가능성은 그것들이 사람들에게 번역 불가능할 경우일지라도 고려할 수 있는 것으로 남을 것이다. … 이처럼 [문제를] 분리하는 가운데 특정 언어적 형상물들에 대한 번역을 요구할 수 있는가의 물음을 제기할 수 있다. 왜냐하면 번역이 하나의 형식이라면 번역 가능성은 특정 작품들에는 본질적일 수밖에 없다는 명제를 내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 번역 가능성이 특정 작품들에는 본질적으로 속한다. 이 말은 그 작품들의 번역이 그 작품들 자체에 본질적이라는 뜻이 아니라 원작들에 내재하는 어떤 일정한 의미가 그 원작들의 번역 가능성 속에서 표출된다는 것을 뜻한다. … 삶의 언표들이 살아 있는 자에게 무언가를 의미함 없이 그 살아있는 자와 내밀하게 연관되는 것처럼 번역은 원작에서 나온다. 그것도 원작의 삶에서라기보다 원작의 ‘사후의 삶’에서 나온다. … 위대한 예술 작품들의 역사는 그 혈통을 원천으로부터 알고, 그 형상화를 예술가가 살던 시대에 얻으며, 근본적으로 영원한 사후의 삶을 이후의 세대들에게서 발견한다. 이 마지막 단계의 삶은 그것이 표출될 때 명성이라 불린다. 번역들은 그것들이 매개 이상의 것일 경우 한 작품이 사후의 삶에서 자신의 명성의 시대에 도달했을 때 탄생한다. 그렇기 때문에 번역들은 열악한 번역자들이 자신들의 작업에 요구하곤 하듯이 명성에 기여하기보다는 오히려 이 명성 덕택에 생겨난다. 그 번역들 속에서 원작의 삶은 언제나 새롭게 자신의 가장 뒤늦으면서 포괄적인 전개의 단계에 도달한다.
- … 그리하여 번역은 종국에 언어들 상호 간의 가장 내밀한 관계를 표현하기 위해 합목적적이다. … 그러나 번역의 경우 위에서 사유한 언어들 사이의 가장 내적인 관계는 독특한 수렴의 관계이다. 그 관계란 언어들은 서로 낯설지 않고 선험적으로, 그리고 모든 역사적 관계를 차지하더라도 그 언어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에서 서로 근친관계에 있다는 점이다.
- … 원작과 번역 사이의 진정한 관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인식비판이 모사론의 불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전개하는 사고 과정과 전적으로 유사한 의도를 갖는 어떤 숙고를 해볼 수 있다. 그러한 인식비판을 통해 인식에서 객관성이란 그것이 현실적인 것의 모사 속에 존재할 것 같으면 성립할 수 없고, 심지어 객관성에 대한 요구조차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점이 드러날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번역이 원작과의 유사성을 그 자신의 마지막 본질에 따라 추구할 경우 어떠한 번역도 가능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 입증될 수 있다. 왜냐하면 사후의 삶이라는 것이 살아 있는 것의 변천과 새로워짐이 아니라면 그렇게 불릴 수도 없을 터인데, 그러한 사후의 삶 속에서 원작은 변화하기 때문이다. 확정된 말들도 뒤늦은 성숙 과정을 겪는다. … 그처럼 번역은 두 개의 죽은 언어들 사이의 생명 없는 동일성과는 동떨어진 것이며, 바로 모든 형식들 가운데 번역에는 [원작의] 낯선 말이 사후에 성숙하는 과정과 번역자의 언어가 겪는 출산의 고통을 감지하는 것이 가장 고유한 과제로 주어져 있다.
- 번역에서 언어들의 근친성이 표출된다면 그것은 모사와 원작 사이의 모호한 동일성을 통해 표출되는 것이 아니라 그와는 다른 방식으로 표출된다. … 두 언어 사이의 근친성은 역사적 근친성을 차치한다면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어쨌거나 문학작품들 사이의 유사성에서도 아니고 그것들의 말들 사이의 유사성에서도 아니다. 오히려 언어들의 초역사적 근친성은 각각의 언어에서 전체 언어로서 그때그때 어떤 똑같은 것이, 그럼에도 그 언어들 가운데 어떤 개별 언어에서가 아니라 오로지 그 언어들이 서로 보충하는 의도의 총체성만이 도달할 수 있는 그러한 똑같은 것이 의도되어 있다는 점에 바탕을 둔다. 그것은 곧 순수언어이다. 즉 서로 낯선 언어들의 모든 개별적 요소들, 단어, 문장, 구문들은 서로를 배제하는 반면, 이 언어들은 그것들의 의도 자체에서는 서로 보완한다. 언어철학의 기본 법칙들 중 하나인 이 법칙을 정확하게 파악한다는 것은 의도에서 의도하는 방식과 의도된 것을 구별하는 것을 가리킨다. … 그처럼 오랫동안 그 의도된 것은 언어들 속에 숨겨져 있다. 그러나 언어들이 이처럼 그것들의 역사의 메시아적 종점에 이를 때까지 성장한다면, 작품들의 영원한 사후의 삶에서, 그리고 언어들의 무한한 생기에서 점화되면서 항상 새롭게 언어들의 성스러운 성장을 시험해보는 것이 바로 번역이다. 즉 언어의 감추어진 그것이 계시에서 제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고 또 이렇게 떨어진 거리는 아는 가운데 현재적이 될 수 있을지라도 말이다.
- … 번역 속에서 원작은 말하자면 언어가 살아 숨쉴 보다 높고 순수한 권역으로 성장한다. 그 권역에서 원작은 지속적으로 살 수는 없고 자신의 형상의 모든 부분이 그러한 권역에 도달하지 못할지라도 그럼에도 적어도 그 권역을 언어들에게 미리 정해져 있으면서 이루지 못한 화해와 성취의 영역으로서 놀라울 정도로 인상적인 방식으로 지시하고 있다. 그 권역에 원작은 완전하게 도달하지 못하지만 그 속에는 어떤 한 번역에서 전달을 넘어서는 무엇이 놓여 있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 본질적인 핵은 그 번역 자체에서 다시금 번역할 수 없는 어떤 것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 번역자의 과제는 원작의 메아리를 깨워 번역어 속에서 울려 퍼지게 하는 의도, 번역어를 향한 바로 그 의도를 찾아내는 데 있다. … 번역의 의도는 문학작품의 의도와는 무언가 다른 것을 지향하는 것, 즉 낯선 [번역자의] 언어로 재현된 개개 예술작품의 언어 전체를 지향하는 것만 아니다. 번역의 의도는 그 자체가 또 다른 것이기도 하다. 즉 작가의 의도가 소박하고 일차적이며 구체적이라면 번역자의 의도는 파생된 것이고 궁극적이며 이념적이다. 왜냐하면 다수의 언어들을 하나의 진정한 언어로 통합하려는 거대한 동기가 그의 작업을 채우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진정한 언어라는 것은 그 속에서 개개의 문장, 문학작품, 판단들이 결코 소통하지 못하지만 ㅡ 그렇기에 그것들은 변역에 의존하고 있는데 ㅡ 언어들 스스로 의도하는 방식에서 보완되고 화해되어 서로 합일되는 그러한 언어이다. 그러나 모든 사유가 얻으려고 노력하는 마지막 비밀들이 긴장 없이, 그리고 서로 침묵하며 그 속에서 보존되어 있는 진리의 언어라는 것이 있다면, 이 진리의 언어는 진정한 언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바로 이 진정한 언어, 그것을 예감하고 기술하는 데 철학자가 기대할 수 있는 유일한 완전성이 놓여있는 그러한 언어가 번역들 속에 집약적으로 숨겨져 있다. … 충실함과 자유는 ㅡ 즉 의미에 맞게 재현할 자유의 그러한 직무를 수행할 때 낱말에 충실하기는 ㅡ 번역에 대한 모든 토론에서 예로부터 전해져온 개념들이다. 이 개념들은 의미의 재현이 아닌 다른 것을 번역에서 찾는 이론에는 더 이상 아무런 기여를 할수없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이 개념들은 이들이 전통적으로 사용해온 맥락에서는 늘 해소할 수 없는 분열 속에 있다. 왜냐하면 충실성은 의미의 재현을 위해 무엇을 수행할 수 있을지 묻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개개의 낱말을 번역할 때의 충실성은 원작에서 그 낱말이 갖는 의미를 거의 한 번도 충분히 재현할 수 없다. 왜냐하면 의미라는 것은 그것이 원작에 대해 갖는 문학적 의미를 두고 볼 때 의도된 것 속에서 소진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문학적 의미를 다름 아닌 바로 특정 낱말에서 그 의도된 것이 의도하는 방식에 어떻게 연결되느냐를 통해 획득하기 때문이다. … 끝으로 형식의 재현에서의 충실성이 의미의 재현을 얼마나 어렵게 만드는지는 명약관화하다. 그처럼 직역의 요구는 의미를 살리는데 대한 관심에서 도출할 수 없다. 의미를 살리는 데는 그보다 훨씬 더 ㅡ 하지만 문학과 언어에는 훨씬 덜 ㅡ 영악한 번역자들의 방만한 자유가 기여한다. 따라서 그 권리가 명백하지만 그 근거가 감추어져 있는 직역의 요구는 필연적으로 보다 더 적확한 맥락에서 이해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진정한 번역은 훤히 비쳐나오는 번역으로서 원작을 덮지 않고 원작에게 빛을 가리지 않으며, 오히려 순수언어를 번역 자신의 매체를 통해 강화하여 그만큼 더 원작 위로 떨어지게 한다. 그것은 무엇보다 구문의 번역에서의 직역이 해낼 수 있으며, 바로 직역이야말로 문장이 아니라 낱말이 번역자의 근원적 요소임을 드러낸다. 왜냐하면 문장이 원작의 언어 앞에 세워진 장벽이라면, 직역이 좇는 낱말은 홍예문(아치문)이기 때문이다.
- … 모든 언어와 그 언어의 형상물들에는 전달 가능한 것 이외에 전달 불가능한 어떤 것, 그것을 만날 수 있은 그때그때의 맥락에 따라 어떤 상징하는 것 또는 상징된 것이 남아 있다. 유한한 언어적 형상물들에서는 상징하는 것일 뿐인 그것은 언어들의 생성 과정에서 재현되려고 하고 실제로 만들어지려고 하는 이것이야말로 순수언어의 핵 자체이다. 그러나 이 핵이 감춰져 있든 단편적으로든 상징된 것 자체로서 삶 속에 현전하고 있다면, 형상물들에서 그 핵은 오로지 상징하는 것으로서 내재할 따름이다. 여기서 순수언어 자체인 이 마지막 본체가 언어들 속에서는 단지 언어적인 것과 그것의 변화들에 묶여 있다면, 형상물들 속에서 그 본체는 무겁고 낯선 의미가 부착된다. 이 의미에서 그 본체를 풀어내는 일, 상징하는 것을 상징된 것 자체로 만드는 일, 순수언어를 형상화한 모습으로 언어운동에 되찾아주는 일, 이것이야말로 번역이 지닌 엄청나면서 유일한 능력이다. 더 이상 아무것도 의도하지 않고 아무것도 표현하지 않으며 표현할 수 없는 말, 창조적인 말로서 모든 언어 속에 의도된 것이라 할 이 순수언어 속에 결국 모든 전달, 모든 의미, 그리고 모든 의도가 하나의 층위에서 만나며, 이 층위에서 그것들은 소멸하게끔 되어 있다. 또한 바로 이 순수언어에서 번역의 자유가 새롭고 높은 권리를 부여받는다는 점이 확인된다. 번역의 자유는 전달되어야 하는 의미를 통해 그 정당성을 획득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전달의 의미로부터 해방되는 것이 바로 충실성의 과제이다. 오히려 번역의 자유는 순수언어를 위해 번역자의 언어에서 실증되어야 한다. 낯선 [원작의] 언어 마력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순수언어를 번역자 자신의 언어를 통해 해방시키고 또 작품 속에 갇혀 있는 언어를 그 작품의 재창작을 통해 해방시키는 것이 번역자의 과제이다. … 이 자유의 진정한 의미를, 물론 그 의미를 명시하거나 규명하지는 못한 상태에서, 루돌프 판비츠는 <<유럽문화의 위기>>에 들어 있는 한 서술에서 부각시켰다. 이 서술은 어쩌면 <<서동시집>>에 대한 노트에서 괴테가 한 말과 더불어 독일에서 번역이론에 관해 발표된 것 중에서 가장 훌륭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번역은, 비록 그것이 가장 좋은 번역이라고 하더라도 잘못된 원칙에서 출발하고 있다. 이들 번역은 독일어를 힌두어화, 그리스어화, 영어화하는 대신 힌두어, 그리스어, 영어를 독일어화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우리 번역자들은 외국 작품의 정신에 대해서보다는 그들 자신의 언어 사용에 대해 더 큰 존경심을 갖고 있다. …… 번역자의 기본적 오류는, 자신의 언어가 외국어를 통해 강력하게 영향을 받도록 하는 대신 자신의 언어가 외국어를 통해 강력하게 영향을 받도록 하는 대신 자신의 언어가 처해 있는 우연적 상태를 고수하는 데 있다. 번역자는 특히 자신의 언어와는 멀리 떨어진 언어에서 번역할 때에는, 언어 그 자체의 궁극적 요소들, 즉 말과 형상과 어조가 하나로 합쳐지는 점에까지 소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는 외국어의 수단을 통해 자신의 언어를 확대하고 심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 우리는 어느 정도까지 그것이 가능하고 또 어느 정도까지 모든 언어가 변화할 수 있는지를, 그리고 마치 방언과 방언이 서로 다른 것처럼 언어와 언어 또한 서로 다르다는 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언어를 너무 가볍게 여기지 않고 이를 매우 심각하게 생각한다면 이런 점이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을 것이다.”
- 어디까지 번역이 이러한 형식의 본질에 상응할 수 있는지는 객관적으로 원작의 번역 가능성에 의해 규정된다. 원작의 언어가 가치와 품위를 적게 지니면 지닐수록, 그것이 전달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여기서 번역을 위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적으며, 결국에 그러한 [의역이 추구하는] 의미의 비중이 과도하게 커짐으로써 그것이 풍부한 형식의 번역을 위한 지렛대가 되기는커녕 번역을 좌초시킨다. 작품은 그 종류가 고귀하면 고귀할수록 그 작품을 번역하는 일은 그것의 의미를 아주 잠깐 스치면서도 더욱더 가능하다. 이것은 물론 원작에 대해서만 해당하는 말이다. 그에 비해 번역들은 의미가 그 번역들에 무겁게 부착되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부착되는 양상이 너무 민속하기 때문에 번역할 수 없는 것으로 드러난다. … 소포클레스 번역들은 횔덜린의 마지막 저작이다. 그 번역들에서 의미는 이 절벽에서 저 절벽으로 추락해가다가 마침내 바닥 없는 언어의 심연 속으로 사라지려고 한다. 그러나 정지할 때가 있다. 그렇지만 그러한 정지는 의미가 더 이상 흘러나오는 언어와 흘러나오는 계시의 분수령이 되지 않는 성서 이외의 어떤 텍스트로 허용하지 않는다. 그 성스러운 텍스트는 그것이 직접, 의미에 의한 매개 없이, 글자 그대로의 의미에서 진정한 언어, 진리 또는 가르침에 속하는 곳에서 완전히 번역할 수 있다. 하지만 더 이상 텍스트 때문이 아니라 언어들 때문이다. 그 성서 텍스트에 대해서는 아무런 긴장이 없이 성서에서 언어와 계시가 합일되듯이 번역에서도 직역과 자유간 행간 번역의 형태로 합일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무한한 신뢰가 번역으로부터 요구된다. 왜냐하면 일정한 정도로는 모든 위대한 저술들이, 최고도로는 성서가 행들 사이에 그것의 잠재적 번역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성서 텍스트의 행간 번역은 모든 번역의 원상이거나 이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