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차이와 반복 - 발제 : 대자적 반복 2 +4
토라진
/ 2017-08-11
/ 조회 2,5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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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2. 대자적 반복
3절
세 번째 종합 안의 반복 : 결핍에 의한 조건, 변신의 주체, 무제약적 특성
“세 번째 반복, 그것은 과잉에 의한 반복, 영원회귀에 해당하는 미래의 반복이다.”
여기서의 반복은 두 번에 걸쳐 일어난다. 한 번은 과거를 구성하는 양태에 따라 반복하고, 다음 번에는 변신의 현재 안에서 반복한다. 이 두 번의 반복을 통해 새로운 것이 탄생하는데, 영원회귀는 이 새로운 것에만 관계한다. 이 때 새로운 것이란 결핍을 조건으로, 그리고 변신의 단계를 거쳐 생산되는 어떤 것이다. 영원회귀는 이러한 결핍을 조건으로 하지만 과잉의 반복을 통해 결핍을 겪는 어떤 것도, 동등하게 –되기에 이르는 어떤 것도 존속시키지 않는다. 또한 그것은 자신의 원심력 전체를 통해 그 조건과 행위자를 추방하고 부인하며 생산물의 자율성과 작품의 독립성을 구성한다.
“영원회귀는 태양을 돌아오게 하지 않는다. 태양의 폭발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단지 성운들에만 관계될 뿐이다. 성운들과 하나가 되고 오로지 성운들을 위해서만 운동한다.”
영원회귀를 시간 집합 전체에 적용되는 것인 양 해석해서는 안 된다. 순수하고 텅 빈 형식으로서의 시간을 통해 단순환 환원(지나가는 현재를 내용으로 하고 상기의 과거를 형태로 하는)은 와해되고, 그런 와해는 훨씬 비밀스럽고 훨씬 더 찌그러져 있는 어떤 환원을 위해서, 성운에 더욱 가깝고 영원히 궤도를 벗어나는 원환을 위해서 일어난다. 이 새로운 원환은 오로지 계열상의 세 번째 시간 안에서만 재형성되는 차이의 원환, 탈중심화된 원환이다.
이 새로운 원환이 시간의 순서와 같음의 원환을 깨뜨리고 시간을 계열화했다면, 이는 오로지 그 계열의 끝에서 어떤 다름의 원환을 재형성하기 위해서였다. 시간의 순서 안에 ‘결정적인 어떤 한 순간’이 있다면, 이는 오로지 그 비의적 의미의 마지막 원환에서 성립하는 ‘매 순간’을 위해서이다.
영원회귀의 관점에서 본 비극, 희극, 역사, 신앙
“현재, 과거, 미래는 세 가지 종합을 거쳐서 일어나는 본연의 반복으로 드러나지만, 이는 서로 매우 다른 양태들을 통해서이다.”
첫 번째 종합, 습관의 종합은 시간을 어떤 살아 있는 현재로 구성했고, 이런 구성은 과거와 현재가 의존하는 어떤 수동적 정초 안에서 이루어졌다. 두 번째 종합, 기억의 종합은 시간을 어떤 순수 과거로 구성했고, 이런 구성은 현재를 지나가게 하고 또 다른 현재가 도래하게 하는 어떤 근거의 관점에서 이루어졌다. 그러나 세 번째 종합에서 현재는 제거될 운명에 처한 저자, 행위자에 불과하다. 시간의 종합은 이 세 번째 단계에 이르러 어떤 미래를 구성하고, 이 미래는 조건에 대한 생산물의 무제약적 특성을, 저자나 배우에 대한 작품의 독립성을 동시에 천명했다.
현재는 반복을 일으키는 어떤 것에 해당한다. 과거는 반복 자체에 해당한다. 그리고 미래는 반복되는 것에 해당한다. 최상의 반복은 바로 미래의 반복이다. 이 미래의 반복을 통해 다른 두 반복은 종속적 지위에 놓이게 되고 자율성을 상실한다. 그런데 이 미래의 반복이 가진 비밀은 반복되는 것 안에 있다. 반복의 철학은 반복 자체를 반복할 수밖에 없도록 운명지어져 있고, 그런 한에서 이 모든 단계들을 통과해간다. 그리고 이 단계들을 거치면서 반복의 철학은 확실한 프로그램을 마련하게 된다.
반복을 미래의 범주로 원용한 키에르케고르와 페기
키에르케고르와 페기는 미래의 범주에 해당하는 지고한 반복을 신앙에 내맡긴다. 그리고 신의 사변적 죽음을 극복하고 자아의 상처를 메우려는 염려를 신앙에 내맡길 때, 그들은 칸트주의를 실현했다. 여기에서는 다시 발견된 자아와 다시 주어진 신의 약혼이 문제가 된다. 이 문제 안에서 신앙인은 조건을 박탈당한 상태에 놓여 있는 한에서 비극적인 죄인으로 살아가지만 그 조건 안에서 이분화 되고 반조되는 한에서는 또한 희극배우나 광대로, 자기 자신의 허상(시뮬라크르)로 살아간다.
니체적 반복, 영원회귀의 반복
니체적 반복, 영원회귀의 반복은 죽은 신과 분열된 자아의 약혼, 흡사 장례식에 가까운 약혼들을 본다. 이 때 죽은 신과 분열된 자아는 각기 결핍에 의한 참된 조건을, 행위자의 참된 변신을 형성한다. 하지만 그 둘은 모두 생산물의 무제약적 특성 안에서 사라져버린다. 영원회귀는 어떤 신앙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이다. 영원회귀는 희극성을 해방하여 그 자체를 초인의 요소로 만들었다. (클로소브스키가 말하는 것처럼) 영원회귀는 어떤 교의라기보다 모든 교의의 허상(지고한 반어)이며, 어떤 믿음이라기보다 모든 믿음의 패러디(지고한 해학)이다.
4절
반복과 무의식 : “쾌락원칙을 넘어서”
들뢰즈는 자신의 시간 이론을 관통하는 끈과 묶기의 비유를 프로이드의 텍스트를 통해 구체적으로 개진하고 있다. 그 첫 번째 출발점은 ”쾌락원칙을 넘어서“이다. 쾌락은 개체화의 장들의 강도적 차이들을 해소하는 과정이다. 이렇게 강도적 장에서 일어나는 차이들의 유동적 할당과 국소적 해소들이 어떤 총체를 이루는 것이 이드라고 할 수 있다. 들뢰즈는 이것을 움직이는 장소의 부사, 흥분과 해소들이 일어나는 “여기저기”라 표현하고 있다. “여기저기”는 프로이드의 ‘묶이지 않은’이라는 표현을 환유적으로 함축하여 의미를 살린 것이다.
결국 ‘쾌락원칙을 넘어서’가 의미하는 것은 쾌락이 실제적으로 원칙이 될 수 있는 조건들에 대한 규정을 지시하고 있을 뿐이다. 즉 ‘묶기’ 혹은 리비도 집중이 일어나고 그 결과 흥분이 체계적으로 해소되는 과정에서 쾌락, 그 자체가 아니라 쾌락이 획득되는 원리적 가치, 즉 이행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것은 분산적인 해소의 상황에서 어떤 통합의 국면으로 옮겨가는 이행이다. 이 통합의 국면을 통해 이드의 두 번째 층 혹은 어떤 조직화의 첫 단계가 구성된다.
첫 번째 종합과 묶기 : 하비투스
“눈은 빛을 묶는다. 눈은 그 자체가.어떤 묶인 빛이다"
'묶기’는 진정한 재생의 종합, 다시 말해서 어떤 하비투스이다. 이 종합은 복잡하며 묶어야 할 차이를 대상으로 하는 어떤 능동적 재생의 활동이 있다. 하지만 그 심층에는 어떤 수동적 반복의 정념이 있다. 새로운 차이(형성된 눈이나 바라보는 자아)는 바로 이 수동적 반복에서 유래한다. 리비도 집중들, 묶기나 통합들, 이것들은 수동적 종합들이자 이차적 등급의 응시- 수축들이다. 여기에서의 수동적 종합은 만족감 일반을 설명하는 원리의 자격을 쾌락에 부여하는 하비투스이다. 이드의 조직화, 그것은 바로 습관의 조직화이다.
‘쾌락원칙을 넘어서’는 습관 안의 반복 혹은 묶기의 수동적 종합
경험적 차원에서 우리는 얼마든지 반복을 획득된 쾌락이나 획득해야 할 쾌락에 종속되어 있는 것으로 체험할 수 있다. 그러나 조건들의 질서에서는 반대이다. 묶기의 종합은 어떤 흥분을 제어하려는 의도나 노력을 통해서는 설명될 수 없다. 흥분의 반복에 어떤 목적이 있다면, 그 진정한 목적은 수동적 종합을 쾌락원칙과 그것의 미래 적용이나 과거 적용이 모두 유래하는 어떤 역량으로까지 끌어올리는데 있다. 그러므로 습관 안의 반복 혹은 묶기의 수동적 종합은 쾌락원칙을 ‘넘어서’ 있다.
두 번째 종합 ; 잠재적 대상들과 과거
능동적 종합과 수동적 종합 –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의 예
능동적 종합이 수동적 종합 위에 구축되려면, 수동적 종합은 능동적 종합과 동시적으로 존속해야 하고, 자기 자신을 그와 동시에 전개해가야 하며, 또 능동성에 대해 비대칭적이면서도 보충적인 관계에 있는 새로운 정식을 발견해야 한다. 걸음마를 시작한 어린아이를 예로 들어보자.
아이는 엄마를 노력의 목표로 삼고 능동적으로 합류해야할 종착점으로 삼는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잠재적 대상 혹은 초점을 상정한다. 가령 아이는 여러 손가락을 자신의 입안에 넣고 이 초점을 다른 팔로 감싸고는 잠재적인 엄마의 관점에서 상황 전반을 평가한다. 아이가 손가락을 빠는 것은 단지 수동적 종합을 심화하는 가운데 응시해야 할 어떤 잠재적 대상을 제공하기 위한 행동일 뿐이다.
읽을 줄도 모르면서 책 읽는 시늉을 내기 시작하는 아이는 결코 실수하는 일이 없다. 아이가 타인에게 책을 내밀 때, 능동적 활동의 현실적 종착점인 양 내민다. 그리고 동시에 반대쪽을 잡으면서 마치 자신의 수동성과 심화된 응시의 잠재적 초점인 양 붙든다. 이런 유아적 세계에서의 이중적 초점 중 어느 것도 자아가 아니다.
사실 묶기의 수동적 종합, 묶인 흥분들로부터 출발하여 어린아이는 이중의 계열 위에서 자신을 구축해간다. 즉 하나는 능동적 종합의 상관항인 현실적 대상들의 계열이며, 다른 하나는 심화되는 수동적 종합의 상관항인 잠재적 대상들의 계열이다. (앙리 말디네의 분석에 따르면)유아적 세계는 타원적이고 이중의 중심을 갖는데, 두 중심은 어떤 교차, 어떤 뒤틀림, 어떤 나선, 어떤 8자형이 형성된다. 자아는 8자형의 교차 지점에, 서로를 잘라내는 비대칭적인 두 원환의 접합 지대에, 다시 말해서 현실적 대상들의 원환과 잠재적 대상이나 초점들의 원환이 만드는 접합 지대에 있을 수밖에 없다.
현실적 대상들의 계열과 잠재적 대상들의 계열의 관계
현실적 대상들의 계열과 잠재적 대상들의 계열은 본성상 서로 다르다. 두 계열은 상호 차용하고 양육하는 관계에 있다. 잠재적 대상들은 현실적 대상들의 계열에서 절취되고, 현실적 대상들의 계열 안에 편입되어 있다. 이런 절취는 어떤 고립이나 불안정을 함축한다. 또한 잠재적 대상은 즉자적, 대자적으로 부분 대상으로, 자신의 고유한 동일성을 결여하고 있다.
능동적 종합(현실적 대상들의 계열의 상관항)은 수동적 종합(잠재적 대상들의 계열의 상관항)을 넘어서서 전면적 통합과 총체화가 가능한 자기 동일적 대상들의 정립을 향해 나아간다. 반면 수동적 종합은 스스로 심화되는 가운데 자기 자신을 넘어서서 총체화 불가능한 것으로 남아있는 부분 대상들을 응시하기에 이른다. - 멜라니 클라인의 좋으면서 나쁜 대상, 과도기 대상, 페티시즘 대상, 라캉의 대상 a, (엄마의 젖을 대신하는 잠잘 때 빠는 이불의 솔기나 단추 등)
잠재적 대상의 특성
잠재적 대상들은 현실적 대상들 안에 편입, 합체되어 있다. 여기서 합체는 고립에 대립하기는커녕 고립을 보충한다. 잠재적 대상이 합체되어 있는 현실이 무엇이든, 잠재적 대상은 그 현실 안으로 통합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안에 박혀 있거나 꽂혀 있다. - 엄마의 몸 안에 박혀 있는, 고골리의 코나 대우칼리온의 돌들처럼 심겨 있는 잠재적 대상들.
잠재적 대상들은 본질적으로 과거적이다. 베르그손의 [물질과 기억]에 나오는 두 개의 중심을 갖는 세계의 도식을 보자. 여기서 하나의 중심은 현실적이고 다른 하나의 중심은 잠재적이다. 이 두 중심으로부터 한편에서는 ‘지각-이미지들’의 계열이 뻗어 나오고, 다른 한편에서는 ‘회상-이미지들’의 계열이 뻗어 나오며, 이 두 계열은 끝없이 이어지는 어떤 회로 안에서 서로를 조직한다. 잠재적 대상은 현재적인 자기 자신과 동시간적이고, 그 자체로 가지 자신의 고유한 과거이며, 현실적 계열 안에서 지나가는 모든 현재에 선재한다. 그런 의미에서 잠재적 대상은 순수 과거에 속한다.
잠재적 대상은 그 자체로 어떤 것을 결여하고 있다. 자기 자신의 영원한 반쪽인 잠재적 대상은 자신이 있어야 하는 곳에 있지 않고, 오로지 그런 조건에서만 자신이 있은 곳에 있다. 잠재적 대상은 자신을 지니고 있는 자들에게 소유되지 않지만 동시에 자신을 지니지 않는 자들에게 소유된다. 그것은 어떤 반과거 시제의 존재자이다. (반과거 ; ‘과거는 실존하는 것이 아니라 끈덕지게 자신을 주장하면서 내속하고 공속하며, 그런 의미에서 있다.’ 194쪽 참조) - 에드거 포의 도둑맞은 편지를 잠재적 대상과 같은 것으로 보는 라캉
잠재적 대상은 자신의 자리에 있으면서 자리를 바뀌었기 때문에 과거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잠재적 대상은 오로지 자기 자신의 단편으로만 실존할 뿐이다. 즉 그것은 오직 잃어버린 어떤 것으로만 발견될 수 있다. 그것은 오로지 재발견된 어떤 것으로만 실존한다.
에로스와 므네모시네
에로스는 순수과거에서 잠재적 대상들을 탈취하고, 우리는 또 그 에로스에 힘입어 그 대상들을 체험한다. 잠재적이거나 부분적인 모든 대상들 가운데 라캉은 상징적 기관에 해당하는 ‘팔루스’를 발견한다. 팔루스는 페니스를 가진 사람들에 의해 소유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 의해 소유된다. 상징적인 팔루스는 성욕의 아득한 태고 못지않게 순수 과거의 에로스적 양태를 의미한다.
반복, 전치, 위장 : 차이
반복의 사유과정
반복은 한 현재와 다른 한 현재 사이에서 구성되는 것이 아니다. 반복은 이 현재들이 잠재적 대상(대상=x)을 중심으로 형성하는, 공존하는 두 계열 사이에서 구성된다. 이 잠재적 대상은 부단히 순환하고 자기 자신과의 관계에서 언제나 자리를 옮기고 있다. 그렇게 때문에 이 잠재적 대상을 통해 항들의 형태변화들과 상상적 관계들의 양태변화들이 규정된다.
반복은 오로지 위장들과 더불어, 그리고 그 위장들 안에서만 구성된다. 반복이 의존하는 잠재적 대상은 전치를 고유한 속성으로 한다. 또한 억압은 현재들의 표상과 관련되는 어떤 하나의 귀결로서 산출된 것이다. ‘억압하기 때문에 반복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복하기 때문에 억압하는 것이다.’
“좀 줘, 제발 부탁이야, 나에게 줘. ......그런데 무엇을? 다른 가면 말이야.”
가면은 우선 위장을 의미하고, 이 위장은 권리상 공존하는 두 현실적 계열의 항과 관계들에 상상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하지만 그보다 심층적인 차원에서 가면은 전치를 의미하고, 이 자리바꿈은 상징적인 잠재적 대상에 본질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이 때 이 잠재적 대상은 자신의 계열뿐 아니라 현실적 계열들 안에서 끊임없이 순환한다.
무의식의 본성에 대한 귀결들 : 무의식은 계열적이고 미분적이며 물음을 던진다
문제와 물음들은 무의식에 속하며 무의식은 문제와 물음을 제기한다.
프로이드는 대립적 무의식의 편에 서 있다. 그러나 무의식은 제한과도 무관하고 대립과도 무관하다. 무의식은 문제틀의 (비)-존재와 관계한다. 즉 “무의식은 ‘아니오’를 모른다.” 무의식은 미분적이고 어떤 미세 지각들로 이루어져 있다. 무의식이 관계하는 문제나 물음들은 커다란 대립이나 그로부터 의식이 도출하는 총체적 효과들로 환원될 수 없다.
쾌락 원칙을 넘어서는, 무의식 자체 안에서 성립하는 두 번째 시간의 종합
첫 번째 수동적 종합, 하비투스의 종합은 살아 있는 현재의 재개된 양식에 의존하여 반복을 끈으로 제시했다. 이 첫 번째 종합은 상호 보충적인 두 방향에서 쾌락원칙의 정초를 보장했다. 반면 두 번째 종합은 에로스-므네모시네의 종합이다. 이 종합은 반복을 위장과 전치로 설정하고, 쾌락원칙의 근거로서 기능한다.
에로스가 자닌 반복의 힘
에로스가 지닌 반복의 힘은 새로운 차이들을 도입하고 새로운 차이들을 생산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지닌 어떤 역량에서 직접적으로 파생된다. 에로스가 므네모시네에게서 차용하는 차이의 역량은 어떤 순수 과거의 파편들에 해당하는 잠재적 대상들에 변용을 가져온다. 자네가 예감했던 것처럼, 에로스적인 반복의 역할을 설명해주고 이 반복과 차이의 조합을 설명해주는 것은 기억상실이 아니라 오히려 과다 기억이다. 언제나 자리를 바꾸고 위장되는 대상의 특성인 ‘결코 본 적 없음’은 그 대상이 추출되는 순수 과거 일반의 특성인 ‘이미 본 상태’안으로 빠져 들어간다. 그리고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오로지 친근한 낯섦, 스스로 반복하는 차이만이 있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에로스와 므네모시네의 종합은 여전히 모호한 채로 남아있다.
댓글목록
선우님의 댓글
선우
고생하셨어요 토라진 님!! 휴가 후라 쉽지 않았을텐데 이렇게 착~ 올려주시다니. . . .
토라진 님 생각하며 제가 아욱국 맛있게 끓여놓을께요.
셈나 해장하시라고. . .^^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선우님이 마련해주신 맛있는 밥을. 못어 넘 아쉽네요.
발제 밤샘에는 아욱국인데.....ㅋ
한 주 쉬고 원기충전해서 만나요.
그동안 애쓰셨어요~^^
namu님의 댓글
namu참, 우리 세미나의 모든 발제가 히말리아의 여러 답파 코스를 밟듯 수난(?)입니다. 어느 양반은 두 시간 밖에 못 자고(삼월님?), 이 토라진 양반은 30분밖에 못자고 발제를 준비했다고 하네요. 암튼 최선을 다하는 님들의 열정에 제가 베토벤이라면 10번 교황곡 하나를 ‘실험자들, 그들에게 포기란 단어는 없다’하는 찬가를 하나 지어드리고 싶은데, 그런 분수는 안되고, 요령있는 발제를 위해 거푸 읽으며 고심했을 토라진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아욱국에 이어 베토벤까지......
'내 마음에 저장!' (프로듀서 101 ver.) 하겠습니다. ~~ㅋㅋ
함께 하는 수고로움과 열정을 느낄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