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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 속으로] 기욤 아폴리네르 +1
요고마고 / 2017-07-25 / 조회 1,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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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詩)공백세미나] 기욤 아폴리네르 편

 

 

 

「변두리」에 대하여

 

왜 변두리인가.

이민자들이 살고 있는 지역, 안정적이지 않은 분위기의 장소, 정제되지 않은 카오스적 장소.

아폴리네르 자신이 무국적자로서의 삶을 산 것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소속 없이 안정된 거처 없이 경계에서 서성이는 삶.

그것은 “고통스러운 여행”이자 동시에 “즐거운 여행”으로 묘사되고 있다.

변두리는 도시의 중심가에서 밀려난 사람들이 산다. 그곳엔 온갖 사연들이 모여 살고 있다.

“너는 마르세유에서 수박에 둘러싸여 있다, 너는 코블렌츠의 거인 호텔에 있다, 너는 로마에서 비파나무 아래 앉아 있다”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닌 엉뚱한 장소에 있는 사물들에 대한 묘사는 이민자들의 삶 자체에 대한 묘사로 읽힌다. 어색하고 불편하다. 그들의 발이 딛고 서 있는 삶의 불안정성이 느껴지기도 한다. ‘배제된 자’임에도 불구하고 시의 화자는 에너지가 넘치는 목소리를 내고 있다. 그의 목소리는 진솔하고 담담하다. 표면적인 비극에 짓눌리지 않는 위엄이 있다.

변두리는 고대 그리스, 로마 혹은 그리스도로 대변되는 주류 세계와 대비되는 공간으로서

단지 비참한 곳이 아닌 가능성의 세계이기도 하다. 온갖 것들이 뒤섞이면서 만들어내는 새로운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불편함과 어려움을 감수해야 하지만 ‘새로운 것’은 기존의 문화를 고수하는데서 나오기 어렵다. 그것은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아닌 지키는 힘에 주력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면에서 변두리는 예술가, 즉 창작자들의 세계로 읽히기도 한다.

이민자의 삶은 안정과 거리가 먼 삶이다. 지금 여기서 살고 있는 이곳은 내 자리가 아니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자리를 살아내야 하는 삶이다.

시에서 화자의 시선이 여러 곳으로 분주히 이동하고 있는데, 이는 한곳에 머물 수 없는 상황적 조건이 만들어내는 것으로 읽힌다. 그래서 오래 머물지 못하는 조건은 제약이 아니라 새로운 형식을 낳는 계기로 읽히기도 한다.

시간도 뒤엉키고 공간도 뒤엉키고 사람도 뒤엉킨 이 시의 초현실적인 세계는, 공간적으로 보자면 몽타주를 떠올리게 하고, 짧게 끊어가며 찍는 영화 장면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나그네」에 대하여

 

기욤 시의 특징 중 하나는 너와 나의 불분명함이며, 구분이나 경계의 모호함이다. 이 시에서 ‘너’라는 존재는 망각의 늪(레떼)을 건너간 사람으로 읽힌다. 죽은 사람이 산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보이기도 한다. 죽은 자 뿐만 아니라 산 자 또한 나그네라는 카테고리 안에 묶을 수 있다. 존재와 존재 사이의 경계가 무너진 것으로 보인다. 남겨진 자가, 잊어선 안 된다는 어떤 책임이나 의무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읽히기도 한다. 에우리포스 해협을 변명처럼 읽을 수도 있다. 일렁이는 해협은 삶 그 자체이다.

 

 

 

 

「저녁 어스름」에 대하여

 

이 시는 서커스 무대를 앞둔 곡예단 사람들을 묘사하고 있다. 무대 앞이 아닌 무대 뒤, 혹은 무대 이면(裏面)을 그려낸 시이다. 역설적이게도 무대 뒤에서야 곡예단 사람들은 진짜 주인공처럼 보이며 구경꾼들은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다. 무대의 화려함과 대비되는 무대 이면에 대한 묘사는 시의 제목처럼 저녁 어스름의 정서를 담고 있다. “죽은 자들의 망령이 간지러워 하루 햇살 기진하는 풀밭 위에서”로 시작되는 저녁 어스름에 대한 묘사는 하루 중에서 음(陰)과 양(陽)이 교차하는 시간을 아름답게 그려내고 있다. 죽은 자들의 망령은 차가운 온도이며, 하루 햇살은 따뜻한 온도이다. 그것은 광대의 존재 자체가 “저녁 어스름”이기도 하다. 사람들 앞에서 드러내는 부분은 밝고 화려하게 치장하지만 그 내면 혹은 현실에는 고단한 삶이 있기 때문이다. “세 곱절 키 커지는 광대”에서 이 시의 시공간이 환상적으로 그려지고 있다.

 

「저녁 어스름」

 

죽은자들의 망령이 간지러워

하루 햇살 기진하는 풀밭 위에서

광대 여자는 벌거벗고

연못에 제 알몸 비춰 본다

황혼 녘의 바람잡이 하나

이제 벌어질 곡예판 뽐내 떠벌리고

빛깔 없는 하늘에 젖빛

희미한 별들 박혀 있다

가설무대에는 창백한 광대

구경꾼들에게 우선 인사를 한다

그들은 보헤미아에서 온 요술사들

선녀 서넛에 마법사들

별 하나를 따서 그는

팔을 뻗어 놀려 대니

목매달린 놈이 두 발로

박자 맞춰 징을 친다

 

예쁜 아기 하나 소경이 잠재우고

새끼들 올망졸망 암사슴이 지나간다

난쟁이는 처량한 얼굴

세 곱절 키 커지는 광대를 바라본다




 

댓글목록

희음님의 댓글

희음

늘 느끼는 거지만 지난 번 세미나 시간에도 이야기가 오고 가는 동안 놀라움의 농도가 짙어져 간다는 생각을 했더랬어요.
초현실적 묘사와 장면 전환을 통해 그로테스크함과 비애와 아름다움을 동시에 자아냈던 <변두리>도 그랬고, 삶과 죽음을 경계지음, 혹은 경계 지움을 통해 남겨지는 일과 기억하는 일을 변증법적으로 드러낸 <나그네>도 그랬지만, <저녁 어스름>에서 우리의 이야기 나눔에 의한 생각의 폭발은 참으로 압권이었습니다. 요고마고 님이 정리해 주신 대로 '죽은 자들의 망령은 차가운 온도이며, 하루 햇살은 따뜻한 온도'라는 것, 그것은 '밝고 화려하게 치장'된 외양 이면에는 '고단한 삶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리고 '“세 곱절 키 커지는 광대”에서 이 시의 시공간이 환상적으로 그려지고 있'다고 이야기되었던 부분... 아폴리네르를 함께 읽고 나눌 수 있는 시간이 또 한 번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다음에는 '저녁 어스름'에 모이면 어떨까 하고도 생각했고요.^^
피곤한 와중에도 우리의 소중했던 시간을 이리도 정돈된 언어로 잘 남겨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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