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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세미나] 선집읽기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발제문 (2017.7.25)
우주 / 2017-07-25 / 조회 2,4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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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수정 후 다시 올립니다.

 

벤야민,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1916)

 

Ⅰ. 처음: 언어(언어적 본질과 정신적 본질)
- 인간의 정신적 삶을 표출한 것은 모두 일종의 언어로 볼 수 있다. 이러한 견해는 진정한 방법론만 적용한다면 어디서든 새로운 문제들을 제기한다. 언어는 기술, 예술, 법률 또는 종교라는 대상에서 정신적 내용의 전달(의사소통)을 지향하는 원칙을 의미한다. 이때 말로 전달하는 것은 특수한 경우에 불과한데 그것은 인간의 언어의 경우거나 그 언어의 근저에 놓여 있거나 그 언어에 근거를 둔 언어(법정, 시문학)의 경우이다. 언어의 존재는 어떤 의미에서든 모든 것(살아 있는 자연과 살아 있지 않은 자연을 포함)에 미치고 있다. 어떠한 사건이나 사물도 본질적으로는 자체의 정신적 내용을 전달하도록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용법에서 “언어”는 메타포가 전혀 아니다. 우리가 그 자체의 정신적 본질을 표현으로 전달하지 않는 어떠한 것도 표상할 수 없다는 것은 온전한 내용적 인식이기 때문이다. 언어와 전혀 아무런 관련도 맺지 않은 존재가 있다면 하나의 이념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념은 그 전체 영역이 신의 이념을 지칭하는 이념의 영역에서도 생산적으로 작용할 수 없다.
- 이런 가정에서 보자면 표현이 정신적 내용의 전달인 한에서 언어에 귀속시킬 수 있다는 것만은 맞는 말이다. 또한 온전하고 내밀한 본질을 가진 표현은 오직 언어로 이해될 수 있다. 다른 한편 우리는 어떤 언어적 존재를 이해하려면 그것이 어떤 정신적 존재에 대한 직접적 표현인지 물어야 한다. 언어 속에서 전달되는 정신적 존재는 언어 자체가 아니라 뭔가 언어와는 다른 것이라는 점이다. 정신적 본질과 그것이 전달되는 언어적 본질을 구별하는 일은 언어 이론 연구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구별이며, 그 둘의 차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Ⅱ. 중간
1. 언어는 무엇을 전달하는가?
- 언어는 그 언어에 상응하는 정신적 본질을 전달한다. 이 정신적 본질이 언어 속에서 전달되는 것이지 언어를 통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핵심이다.
- 언어는 사물의 언어적 본질을 전달한다. 모든 언어는 자기 자신을 전달한다. 가령 여기 있는 전등의 언어는 전등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로서의 전등, 전달 속의 전등, 표현 속의 전등을 전달한다. 언어란 사물의 언어적 본질이 그것의 언어라는 사정을 갖기 때문이다. 언어이론에 대한 이해는 바로 이 문장을 동어반복의 기미까지 완전히 없앤 명징한 문장으로 만드는데 달려 있다. 그 문장이 동어반복이 아닌 까닭은 그 문장이, 한 정신적 존재에서 전달 가능한 것이 그것의 언어이다를 뜻하기 때문이다.
- 모든 언어는 자기 자신 속에서 전달되며 언어는 가장 순수한 의미에서 전달의 “매체(Medium)"이다. 이 매체적인 것이 모든 정신적 전달의 직접성이며 언어이론의 근본문제이다. 우리가 이 직접성을 마법적이라고 부른다면, 언어의 근원적 문제는 언어의 마법성이다. 언어의 마법은 또 다른 말을 지시하는데, 그것은 언어의 무한성이다. 이 무한성은 직접성에 의해 생겨난다.
- 사물의 언어적 본질은 사물의 언어이다. 이 문장을 인간에게 적용하면, 인간의 언어적 본질은 그 인간의 언어라는 뜻이다. 인간은 자기의 고유한 정신적 본질을 그 자신의 언어 속에서 전달하는데 이는 말로 표명된다. 따라서 인간은 자신의 정신적 본질을 (전달 가능한 한에서), 다른 사물들을 명명함으로써 전달한다. 인간의 언어적 본질은 인간이 사물을 명명한다는 점이다.

 

2. 무엇을 위해 명명하는가? 인간은 누구에게 자신을 전달하는가?
- 답은 인간에게이다. 이는 신인동형설 는 아니다.
- 인간은 자신의 정신적 본질을 그가 사물에 부여하는 이름들 속에서 전달한다. 이 언어관은 전달의 수단도 대상도 수신자도 없다. 이름들 속에서 인간의 정신적 본질은 자신을 신에게 전달한다.

 

3. 이름(명명)
- 이름은 언어의 가장 내밀한 본질 자체이다. 이름은 그것을 통해 아무것도 전달되지 않고, 그것 속에서 언어 자체가 스스로를 절대적으로 전달하는 무엇이다. 이름에서 전달되는 정신적 본질이 언어이다. 정신적 본질이 전달 속에서 절대적 전체성을 갖는 언어 자체인 곳에서만 이름이 존재하고, 그곳에서 언어만이 존재한다. 인간의 언어의 유산으로서 이름은 언어 일반이 인간의 정신적 본질임을 보증한다. 그러므로 모든 정신적 존재들 가운데 인간의 정신적 본질만이 남김없이 전달 가능하다. 이 점이 인간의 언어와 사물의 언어가 구별되는 근거이다.
- 인간은 이름을 부여하는 존재이고, 여기서 우리는 인간에게서 순수언어가 발현됨을 알 수 있다. 모든 자연은 언어 속에서 전달되고, 궁극적으로 인간 속에서 전달된다. 그래서 인간은 자연 만물의 영장이고 사물들을 명명할 수 있다. 신의 창조는 사물들이 자신의 이름을 인간에게 부여받고, 이름 속에서 언어가 발현되면서 완성된다. 인간을 발화자로 지칭함으로써 모든 언어는 이러한 형이상학적 인식을 내포한다.(발화자로서의 인간은 성서에 따르면 이름을 부여하는 자로 나타난다. “인간이 온갖 살아 있는 짐승을 이름 붙인 대로 그 짐승들은 불릴 것이다.”)
- 이름은 마지막 외침(알림)인 동시에 언어의 본래적인 부름(이름 붙이기)이기도 하다. 이름에서 언어의 본질적 법칙이 나타난다. 이 법칙에 의하면, 자신을 알리는 행위와 다른 모든 것을 부르는 행위가 하나이다. 이름에서 절대적으로 전달 가능한 정신적 본질로서의 언어의 내포적 총체성과 보편적으로 전달하는(명명하는) 본질로서의 언어의 외연적 총체성이 정점에 이른다. 오로지 인간만이 보편성과 집약성에서 완벽한 언어를 지닌다.
- 정신적 본질, 인간의 본질만이 아니라 사물들의 본질까지도 언어적 본질로 지칭할 수 있느냐. 정신적 본질이 언어적 본질과 동일하다면 사물은 그것의 정신적 본질에 따라 전달의 매체이다. 매체 속에서 전달되는 것은 매체적 관계에 따라 볼 때 바로 이 (언어라는) 본질은 매개 자체이다. 그렇다면 언어는 사물들의 정신적 본질이다. 언어의 내용은 없다. 전달로서 언어는 어떤 정신적 본질 즉, 전달 가능성 일반을 전달한다. 언어들 사이의 차이는 말하자면 밀도에 따라, 정도에서 구별될 뿐인 매체들의 차이이다.

 

4. 계시
- 언어적으로 가장 현존적인 표현, 즉 가장 단단하게 규정된 표현, 한마디로 가장 명백하게 언명된 것인 동시에 순수하게 정신적인 것이 된다. 이것이 계시의 개념이다. 물론 이것은 계시 개념이 말씀의 불가침성을 그 말씀 속에서 언명되는 정신적 본질의 신성함에 대한 유일하고 충분한 조건이자 표지로 여길 경우이다. 그러나 여기서 예고되는 사실은 종교에서 나타나는 것 같은 지고의 정신적 본질만이 인간과 인간 속의 언어에 순수하게 바탕을 둔다는 점이다. 이에 비해 시문학을 비롯한 예술은 사물적 언어정신에 바탕을 둔다.
- 언어 자체는 사물들 자체 속에서는 완전하게 표명되어 있지 않다. 사물들의 언어는 불완전하고 말이 없다. 사물들은 오로지 소재적인 공동체를 통해 서로 의사소통할 수 있다. 이 공동체는 언어 전달의 공동체처럼 직접적이고 무한하다. 그 공동체는 마법적이다. 인간의 언어는 사물들과 맺는 마법적 공동체가 비물질적이고 순수하게 정신적이라는 점에서 탁월하다. 음성이 바로 그 상징이다. 성서는 이 상징적 사실을 신이 인간에게 숨결을 불어넣었다고 말하면서 증언해준다. 이 숨결은 생명이자 정신이고 또 언어다.

 

5. 성서(창세기 1-2장)에서 도출할 수 있는 언어의 본성
- 여기서 진행되는 논의들이 원칙적으로 언어가 그 전개 과정에서 고찰될 수 있는 마지막 현실, 설명할 수 없고 신비스러운 현실로 전제된다는 점에서 성서를 따른다. 성서는 자기 스스로를 계시로 바라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언어적 기본 사실들을 전개하지 않을 수 없다. 창세기 2장은 (신이 인간에게) 숨결을 불어넣는 일을 전하는 동시에 인간이 흙으로 빚어졌다는 점을 밝힌다.
- 자연의 창조(<창세기> 1장)가 이루어졌던 리듬은 “있으라-하시다(만드시다)-칭하시다”이다. 창조행위는 언어의 창조적 전능을 가지고 시작하며 종국에는 언어가 창조된 것을 동화하여 그것을 명명한다. 언어는 창조하는 무엇이고 완성하는 무엇이며, 언어는 말씀이고 이름이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은 하나님이 그것을 이름으로 인식했다는 뜻이다. 신은 사물들을 이름으로 인식할 수 있게 만든다. 하지만 인간은 인식에 따라 그 사물들을 명명한다.
- 인간을 창조할 때 창조행위 3박자는 유지되지만, 더 강력하게 드러나는 것이 바로 “그는 창조하시다”이다. 신은 인간에게 자신의 창조성을 위임하고 쉬었다. 이 창조성이 신적인 현실성을 탈각하고서 인식이 된다. 인간은 창조주였던 언어를 인식하는 자가 된다. 인간의 정신적 본질은 창조를 담당한 언어이다. 이 신성한 말씀의 깊은 모사가 인간의 언어가 단순한 말씀의 신적인 무한성에 내밀하게 참여하는 지점, 인간의 언어가 유한한 말씀이 될 수 없고 인식이 될 수 없는 지점이 인간의 이름이다. 자기이름(고유명)의 이론은 유한한 언어가 무한한 언어에 대해 갖는 경계에 관한 이론이다. 신이 명명하지 않은 유일한 존재가 인간이었듯이 모든 존재 가운데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명명하는 유일한 존재이다. 아담은 배필을 얻자마자 배필의 이름을 지어주었다.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이름을 부여함으로써 아이들을 신에게 바친다. 자기 이름을 통해 인간은 모두 신에 의해 창조되었음을 보증받으며, 이 의미에서 그 이름 자체가 창조적이다. 자기 이름은 인간이 신의 창조적 말씀과 함께 이루는 공동체이다. (이것은 유일한 공동체가 아니며 인간에게는 신의 말씀과 맺는 또 다른 공동체가 있다.) 말씀을 통해 인간은 사물의 언어와 결합된다. 인간의 언어는 사물의 이름이다.
- 이로써 말이 사태와 맺는 관계가 우연적이라는 언어관(언어의 자의성), 말은 모종의 인습에 의해 정해진 사물(또는 사물의 인식)을 표시하는 기호(언어의 기호성)라는 통속적인 언어관에 상응하는 생각은 더 이상 등장할 수 없다. 그러나 신비주의 언어이론을 가지고 이러한 언어관을 배격하는 것도 잘못되었다. 신비주의에 따르면 말 일반은 사태의 본질이라고 한다. 그러나 말은 사태 자체가 아니고 신의 말씀에서 만들어졌고, 인간의 말을 통해서 그 이름 속에서 인식되기 때문에 신비주의는 옳지 않다. 
- 인간이 사물에 부여하는 이름은 그에게 그 사물이 어떻게 전달되어 오느냐(사물이 자신을 전달하느냐)에 근거를 둔다. 신의 말씀은 사물 자체의 언어에 소리 없이, 자연의 말 없는 마법 속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6. 번역(사물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
- 번역의 개념을 언어이론의 심층에서 근거짓는 일은 필수적이다. 번역은 (신의 말씀을 제외하고) 모든 상위의 언어가 다른 모든 언어의 번역이라는 사실을 통찰할 때 그 의미를 온전하게 획득할 수 있다. 번역이란 한 언어를 변형의 연속체를 통해 다른 언어로 변환한다는 것을 뜻한다.
- 사물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하는 일은 무언의 것을 음성으로 번역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이름 없는 것을 이름으로 번역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러한 번역의 객관성은 신 안에 보증되어 있다. 신은 사물들을 창조했고, 그 사물들 속의 창조적 말씀은 신이 각각의 사물을 창조한 뒤 마지막에 그것들에 이름을 부여했듯 인식하는 이름의 싹이기 때문이다.
- 인간은 스스로 사물의 이름 없는 무언의 언어를 수용하여 그것들을 음성 속의 이름으로 옮기는 가운데 그 과제를 해결한다. 그 과제는 인간의 이름언어와 사물의 이름 없는 언어가 동일한 창조적 말씀에서 근친적 관계로 방출되지 않았다면, 신의 창조적 말씀이 사물에서는 마법적 공동체 속에 있는 물질의 전달이 되고 인간에게서는 축복받은 정신 속에서 인식하기와 이름언어가 되지 않았다면 해결될 수 없었을 것이다.
- 신은 짐승들에게 차례로 징표(기호)를 주었는데, 이 징표에 따라 짐승들은 명명되기 위해 인간 앞에 등장한다. (거의) 숭고한 방식으로 말 없는 피조물과 신 사이에 맺어진 언어 공동체가 징표의 이미지 속에 주어져 있는 것이다.

 

7. 원죄, 인류의 타락, 낙원의 상태에서 쫓겨남, 훼손된 이름, 판정(판단)하는 말의 마법
- 인간의 낙원적 언어는 완전하게 인식하는 언어였음이 틀림없다. 반면 나중에 다시 한 번 모든 인식은 다양한 언어 속에서 무한히 분화되어, 이름 속의 창조보다 낮은 단계에서 갈라져야 했다.
- 인식의 나무에 열린 사과들은 무엇이 선하고 악한지에 대한 인식을 주기로 되어 있었다. 신은 일곱 번째 날 창조의 말씀을 통해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하나님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고 인식했다. 뱀이 유혹하던 인식, 선악에 대한 지식은 이름 없는 것이다. 그 지식은 심오한 의미에서 헛된 지식이며, 그 자체가 낙원의 상태가 아는 유일한 악이다. 선악에 대한 인식은 이름을 떠나 외부에서의 인식이고, 창조적 말씀에 대한 비생산적 모방이다. 이름은 이 인식에서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온다.
- 원죄는 인간의 말이 태어나는 순간으로서, 이 말 속에서 이름은 더 이상 훼손되지 않은 채 살아 있지 못한다. 그 인간의 말은 명백하게, 말하자면 외부로부터 마법적이 되기 위해 이름언어, 인식하는 언어, 어떤 의미에서 내재적인 자체의 마법에서 뛰쳐나온 것이다. 말은 (자기 자신 이외의) 무엇인가를 전달해야 했다. 이는 언어정신의 타락이다. 외적으로 전달하는 말로서의 말, 마치 명백하게 간접적인 말이 명백하게 직접적인 말, 창조적인 신의 말씀에 따라 행하는 패러디, 그리고 그 둘 사이에 있는 복된, 아담적 언어정신의 타락이다.
- 선악의 인식은 키르케고르가 파악한 심오한 의미에서 (신의 말씀을 듣고 싶어하면서도 소음을 만들어 듣지 못하는) “수다”이고 정화와 상승만 알 뿐이다. 즉 법정이다. 판정하는 말의 마법은 이름의 마법과 다르지만 마법인 점에서 똑같다. 판정하는 말은 최초의 인간들을 낙원에서 밀어냈다. 판정하는 말은 자기 자신을 깨우는 행위를 유일한 죄, 가장 깊은 죄로서 처벌하며 또 기다린다.
- 언어의 본질적 맥락에서 원죄는 (여타의 다른 의미를 여기서 언급하지 않는다면) 3중의 의미를 갖는다. 인간은 순수한 이름의 언어에서 스스로 떨어져 나오면서 언어를 수단으로 (즉 그 자신에게 부적절한 인식의 수단으로) 만들고, 그로 인해 일부는 단순한 기호로 만든다. 이것은 나중에 언어가 여러 언어로 분화되는 결과를 낳는다. 두 번째 의미는 원죄로부터 이제 그 속에서 손상된 이름의 직접성을 복구하는 새로운 마법, 즉 판단의 마법, 더 이상 자신 속에 복되게 거하지 않는 마법이 등장한다. (추측해볼만한) 세 번째 의미는 추상화의 기원도 언어정신의 능력으로서 원죄상황에서 찾을 수 있으리라는 점이다. 추상적 언어요소들은 판정하는 말, 판단에 뿌리를 두고 있다.
- 인식의 나무는 선악에 대한 해명 때문에 신의 정원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묻는 자에 대한 법정의 증표로 서 있었던 것이다.
- 언어를 간접적인 것(수단)으로 만듦으로써 언어가 여러 개로 갈라지는 원인이 된 낙원추방 이후 언어 분규에 이르는 데는 단 한 걸음이 남았을 뿐이다. 사람들이 이름의 순수함을 훼손한 이상, 이제 이미 타격을 받은 언어정신의 공동 토대를 사람들에게서 빼앗기 위해서는 인간이 사물의 언어를 이해하는 관조행위를 이반(=배반)하는 일만 일어나면 되었다. 수다 속에서 언어를 노예화하는 일에 이어 그것의 불가피한 결과로서 어리석음 속에 사물들이 노예화하는 일이 등장한다. 노예화를 뜻하는 사물로부터의 이러한 배반 속에서 바벨탑 건축의 계획과 그와 더불어 언어 분규가 생긴다.
- 낙원 추방 이후 밭가는 일을 저주한 신의 말씀과 함께 자연의 모습도 심각하게 변화한다. 이제 자연의 또 다른 무언성이 우리가 자연의 깊은 비애라고 말할 때 의미하는 무언성이 시작한다. 모든 자연은 언어가 부여되면 탄식하기 시작하리라는 말은 형이상학적 진실이다. (이때 “언어의 부여”는 물론 “자연이 말할 수 있게 만든다”는 것 이상이다.) 이 문장은 이중적 의미를 갖는다. 우선 자연이 언어 자체에 대해 탄식하리라는 것을 뜻한다. 언어가 없다는 것은 자연에게 커다란 아픔이다. (그것을 구원하기 위해 자연 속에 인간의 삶과 언어가 있는 것이며, 우리가 추측하듯 시인의 그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둘째로 자연이 탄식할 것을 뜻한다. 즉 자연의 슬픔이 자연을 침묵케 한다.
- 사물들은 신 밖에서는 자기 이름도 갖고 있지 않다. 신은 창조적 말씀 속에서 사물들을 고유의 이름으로 불러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의 언어에서는 사물들이 과다 명명(중복 명명)된다. 과다 명명은 모든 슬픔과 (사물의 측면에서 봤을 때) 모든 말없음의 아주 깊은 언어적 근거이다. 슬픈 존재의 언어적 본질로서의 과다 명명은 언어의 또 다른 희한한 관계를 시사하는데 말하는 사람들의 언어 사이의 비극적 관계를 지배하는 과다 규정이 바로 그것이다.
* 조형예술의 언어, 회화의 언어, 시문학의 언어가 있다. 이들의 언어에는 사물의 언어가 훨씬 상위에 있는 언어로, 그러면서도 어쩌면 동일한 영역에 있는 그러한 상위의 언어로 번역되어 있다는 것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이러한 언어들은 이름 없는 언어, 음성으로 발성되지 않는 언어이며, 물질로 이루어진 언어이다. 이때 전달의 측면에서 사물들의 물질적 공동체라는 것을 상정할 수 있다. 예술형식을 인식하려면 그 형식들을 언어로 모두 파악하고 그것들과 자연언어들의 연관을 찾을 필요가 있다. 분명한 것은 예술의 언어는 기호론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언어는 어떤 경우이든 전달 가능한 것의 전달인 동시에 전달 불가능한 것의 상징이기도 하다. 이 언어의 상징적 측면은 그 언어가 기호에 대해 갖는 관계와 연관된다. 이는 어떤 관계에서는 이름과 판단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름과 판단은 전달 기능만 갖는 것이 아니라 여기서는 분명하게 시사하지 않은 상징적 기능도 가질 가능성이 크다.

 

Ⅲ. 끝(총정리)
- 비록 아직 불완전하나마 어떤 정화된 언어 개념이 남는다. 한 존재의 언어는 그 속에서 자신의 정신적 본질을 전달하는 매체이다. 이러한 전달의 흐름은 가장 낮은 단계의 존재에서 인간에 이르기까지, 인간에서 신에 이르기까지의 전자연을 관통해 이어진다. 인간은 그가 자연과 인간에게 (자기 이름 속에서) 부여하는 이름을 통해 자신을 신에게 전달하며, 자연에게는 그가 그 자연에서 받는(수용하는) 전달에 따라 이름을 부여한다. 자연 전체는 이름 없는 무언의 언어, 인간 속에서 인식하는 이름과 인간에 대해 판결하는 판단으로 군림해 온 창조하는 신의 말씀의 잔재인 무언의 언어로 채워져 있다. 자연의 언어는 각각의 위치가 다음 위치에게 자신의 언어로 전달하는 비밀스런 암호에 비견될 수 있다. 하지만 이 암호의 내용은 그 위치의 언어 자체이다. 모든 상위의 언어는 하위의 언어의 번역이다. 이 번역은 언어운동의 통일인 신의 말씀이 마지막으로 명징하게 전개될 때까지 지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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