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 세미나 후기]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 (2017.7.25.) +2
우주
/ 2017-07-25
/ 조회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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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는 쉽지 않은 글입니다. 우리는 본문의 핵심 단어를 길잡이 삼아 함께 읽어 보았습니다.
벤야민은 ‘언어’를 메타포로 보지 않습니다. 언어는 그 자체로 온전하고 내밀한 본질을 가진 표현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는 껍데기(언어) 자체가 알맹이(본질)이라는 벤야민의 기존의 생각을 잘 드러냅니다.
언어는 무엇을 전달하는가? 정신적 본질을 전달합니다. 이 정신적 본질은 언어를 “통해서”가 아니라 언어 “속에서” 전달되는 것이라고 반복적으로 강조합니다. 인간은 “자신의 정신적 본질을 다른 사물들을 명명함으로써 전달”합니다.
인간은 어떻게 다른 사물들을 명명하는가? 벤야민은 신학에서 특히 창세기 1-2장에서 그 의미를 끌어옵니다. 왜 하필 신학인가. ‘신’을 호명하는 것이 불편하다면, 철학이 문학적 텍스트에서 힌트를 얻는 것과 유사하게 바라보아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물론 벤야민은 유대교인으로서의 신학을 호명하고 있습니다.)
벤야민은 창세기 1장을 들어 자연이 명명, 즉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창조된 데 비해, 인간은 신과 닮은 형상으로 창조된 것에 주목합니다. 이로써 신은 인간에게 자신의 창조성을 위임합니다. 인간은 자기 자신을 명명하는 유일한 존재로서 불완전하고 말이 없는 사물들의 언어를 인간의 언어로 번역합니다. 이러한 번역의 객관성은 신 안에 보증되어 있고 사물들 자체의 언어에 신의 말씀이 수용적으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사물의 언어는 수용적인 동시에 자발성을 띱니다.
이 부분과 관련하여 "벤야민은 언어적 본질이 정신적 본질이라고 말하지만 사물로 내려갈수록 그 말이 일치하지 않는 느낌이 든다. 그래서 신, 인간, 사물 사이에 위계를 설정한 것 같다. 그렇다면 왜 위계를 설정했는가"라는 의문이 있었습니다.
이 의문은 우선 '위계를 설정했다고 보기 어렵다'와 '위계를 설정했다고 볼 수 있다'는 의견으로 나뉘었습니다.
위계를 설정했다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은 벤야민은 인간이 사물의 언어를 번역하는 존재이지만(사물을 명명하지만) 사물 역시 신의 말씀을 가진 존재로 보았기에 기존의 기계론에 빠져 있던 인간중심주의에서 벗어난 게 아닌가 하는 의견이었습니다. 다만 타락으로 인해 원래의 의도인 언어적 본질이 정신적 본질이 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을 뿐이고 다시 타락하기 전으로 돌아가야 할 뿐이다라고 했습니다.
위계를 설정했다고 보는 의견은 타락과 무관하게 신, 인간, 사물은 분명 차이가 있으며 인간의 언어는 음성을 가지고 있지만 사물의 언어는 음성이 없고 불완전하다고 보았기에 위계가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위계는 단지 ‘단순한 생명’이 아닌 ‘인간’적인 것을 이야기하기 위해서 설정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견을 냈습니다. 이는 다시 ‘폭력 비판을 위하여’ 같은 텍스트와 이어지지 않나 하는 의견이었습니다.
인간은 (신에 의해) 이름을 부여하는 존재이며 사물들을 명명할 수 있습니다. 신의 창조는 사물들이 자신의 이름을 인간에게 부여받고 이름 속에서 언어가 발현되면서 완성되었습니다. 이것은 계시로서 언명되었습니다.
그러나 신이 (그 자체로) 보시기에 좋았다는 인식을 인간은 인식의 나무에 열린 사과(선악과)를 따먹음으로써 훼손합니다. 이 원죄로 이름은 자기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오며 이름은 이름언어의 마법에서 뛰쳐나오게 됩니다. 이제 아담적 언어정신은 타락하고 인간의 언어는 판정(판단)하는 말이 됩니다. 인간은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없는 수다의 심연으로 추락하고 언어는 여러 개로 갈라져 분규가 일어납니다.
“인식의 나무는 그 나무가 줄 수 있었을 선악에 대한 해명 때문에 신의 정원에 서 있었던 것이 아니라 묻는 자에 대한 징표로 서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왜 하필 신은 인식의 나무를 세우고 먹지 말라고 명령했을까요? 그런 명령이 아니면 인간은 타락하지 않았을 텐데. 다소 엉뚱한 생각일진 몰라도, 우리가 성경과 신을 신뢰할 수 없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벤야민이 인식한 선과 악의 개념은 니체의 <도덕의 계보>에 영향을 받은 것 같습니다.)
타락으로 인해 자연의 무언성은 깊은 비애를 갖게 됩니다. 사물들은 신 밖에서는 자기 이름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이 부여한 이름은 사라지고(찾을 수 없고) 인간의 언어에서는 사물들이 과다 명명(중복 명명)되기 때문입니다.
벤야민은 (약간의 곁다리처럼) 마지막에 예술 언어에 대한 이야기도 넣어둡니다. 조형 예술의 언어, 회화의 언어, 시문학의 언어는 이름 없는 언어, 음성으로 발성되지 않은 언어, 물질로 이루어진 언어인데 이때 전달의 측면에서 사물들의 물질적 공동체라는 것을 상정할 수 있습니다. 이를 인식하기 위해 그 형식을 언어로 파악하고 자연언어들의 연관을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예술의 언어는 기호론과의 깊은 관계 속에서 이해될 수 있기에 여기서는 분명하게 시사하지 않은 상징적 기능도 가질 가능성이 크다는 말을 덧붙입니다.
벤야민의 언어관은 신을 호명하고 (신의) 창조와 (인간의) 타락을 바탕에 두고 언어(인간의 언어와 사물의 언어)를 해석한다는 점에서 특이합니다. 이 특이한 여정을 따라다니며 지치고 어려웠지만 명명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의미 있는 시간이었습니다.
댓글목록
희음님의 댓글
희음
<언어 일반과 인간의 언어에 대하여>는 벤야민이 드물게 각 잡고 쓴 무척이나 난해하고도 본격적인 논문이라고 들었어요.
어쩌다 보니 우주 님이 이번에 당번을 맡게 되어 적잖이 고생을 하셨을 것 같은데, 발제도 꼼꼼하게 해 와 주시고, 너무 어렵다고 되뇌면서도 나름대로 소화하신 부분을 성심껏 나눠 주신 덕분에 꽉 찬 세미나가 되었던 듯합니다. 후기 역시도 발제만큼이나 핵심적인 부분에 대해 잘 정리해 주셨네요. 정말 고맙습니다.
언어를 통해서, 언어를 도구화하고 수단으로 이용하여 우리의 정신을 전한다는 기존의 언어관, 혹은 안과 밖, 형식과 내용이라는 이분법적 사유의 환상을 벗고, 겉과 속을 하나의 신체의 양면으로 보는 벤야민만의 전환적 사유에 탄복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의 에세이에서 그 생각의 씨앗을 발견하곤 이미 놀란 채였지만 말입니다. 인간의 언어가 자신을 전달(자기 자신을 나누어 주는 일)하는 동시에 사물 쪽에서도 그만의 언어를 전달함으로써 마주침의 순간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언어 속에서 정신이 서로에게 전달되는 순간이라는 주장 또한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다음 세미나의 <번역자의 과제>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지 벌써부터 두근거리네요.^^
우주님의 댓글
우주
감사해요. 제가 좀 징징대기를 잘 하는 편이라... ㅎㅎㅎ 세미나 하면서도 세미나 끝나고도 한동안 징징거린 거 같은데 잘 받아주시고 계속 고생했다고 말씀해주셔서 괜히 뿌듯했습니다.
벤야민은 <기술 복제 시대의 예술작품>을 읽었을 때부터 매력적인 사람이라 생각했었는데 이번에 세미나를 하면서 더 깊이 그의 매력을 들여다볼 수 있어서 좋네요. 물론 텍스트를 이렇게 어렵게 쓰다니...! 벤야민은 '매력적인 분노유발자'라고 생각은 합니다. ㅎㅎㅎ 세미나 때도 말씀드렸다시피 공부는 역시 같이 해야 더 넓고 깊게 배우는 것 같습니다. '우리실험자들'에서 같이 공부하게 되어 반갑고 좋네요.
휴가 잘 보내시고 다다음주에 뵙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