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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화부><유형지에서>0726 발제
희음 / 2017-07-26 / 조회 1,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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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단편 발제 20170726 희음

 

 

<화부>

 

 

16세 카알 로스만이 미국으로 쫓겨 가는 배 안에서 일어난 일. 거기서 그는 가방을 잃어버리고 화부를 알게 되고 화부의 항의에 동참하게 되고 또 그렇게 찾아간 사무실에서 그곳에 있던 야코프라는 상원의원이 자신의 외삼촌임을 알게 되고 그와 함께 다정하게 보트에 오르게 된다.

 

 

- 카알에게 일어난 사건들은 모두가 우연으로 이루어져 있다. 우산을 잃고 길을 잃고 화부를 만나게 된 일. 화부의 일에 휘말리게 된 일. 외삼촌을 만나게 된 일.

 

- 카알이 살아나가는 방식은 누군가를 만나 그에게 힘을 주거나 혹은 의지하는 일과 관련되어 있다. 미성숙한 16세의 소년을 넘어 이것을 인간 보편의 문제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 이곳에서 일어나는 왜곡들과 사건의 구부러짐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하녀와의 섹스(사실과 편지 내용과의 불일치), 뜻하지 않았던 화부와의 언쟁, 외삼촌과의 뜻밖의 맞닥뜨림 등. 이것들은 묘하게도 이 배 안의 의뭉스러운 길들과 닮아 있다.

 

- 카알이 하나의 사건을 만나게 되는 통로는 모두 미로로 이루어져 있다. 그 길 잃음과 길 자체의 복잡함은 무엇을 뜻하는가.

 

 

 

<유형지에서>

 

 

이 작품은 1914년, 단 14일만에 초고가 쓰여졌는데 이것을 완성하는 데는 5년이 걸렸다고 한다. 카프카가 유일하게 낭독을 감행했던 작품이기도 하고. 작품을 읽으며 그가 그만큼 애착할 만한 것이라 느꼈다. 한정된 장소, 어떤 하나의 장치에 대한 묘사, 등장하는 인물의 캐릭터 묘사에 대부분 할애되는 문장들이, 그의 장편에서 느꼈던 연극적 분위기를 다시금 느끼게 했다. 단편이지만, 중편 이상의 에너지와 밀도가 담긴 작품이 아닌가 한다.

이야기는 어느 탐험가가 섬의 신임 사령관으로부터 곧 집행될 한 사형 장소에 입회에 달라는 말을 듣고 그가 그곳을 찾아가는 것으로 시작된다. 거기에서 만난 장교는 처형 기구 전문가로서, 처형 기구를 만든 전임 사령관의 열렬한 예찬자이자 현 사형제도의 옹호론자이다. 또한 처형이 있는 날이면 섬 전체의 주민들이 사형 장소로 몰려들어 축제를 벌인 듯 했던 시절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있는 자이다. 장교는 새로 부임한 신임 사령관이 사형제도의 부당함을 들어 탐험가를 보내 처형 기구를 없애 버리려 한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오히려 탐험가를 통해 처형 기구의 절대적 필요성을 사령관에게 피력하기 위해 탐험가를 설득하고 이용하려고 한다.

     

 

- 써레를 이용해 죄수의 몸에 글씨를 새기는 장치. 12시간에 걸쳐 죄수의 알몸을 돌려가며 서서히 피의 글자를 새기는. 죄수는 그동안 아주 서서히 죽어가면서 자신의 몸 위에 새겨진 글씨를 읽으며 자신의 죄목을 확인하게 된다. 이따금 흰 죽으로 갈증과 허기를 채워가며 조용하게 고통 속에서 확인하게 되는 죄목은 죄수에게 어떤 의미인가. 그것은 죄수에게 정말로 죄목으로 읽힐 것인가. 자신의 몸 위에 새겨진 붉은 글자로 그가 확인하게 되는 것은 바깥으로 까발려진 자신의 죄의식인가, 아니면 신의 위악적이고 뒤틀린 본성인가. 아니면 무지막지하게 부조리한 생, 그 끝에는 고통이나 환멸밖에 없다는 생에 대한 깨달음인가.

 

- 장치에 대한 장교의 절대적 믿음과 숭배는 어디에서 왔는가. 죄를 벌한다는 것, 어떤 하나의 잘못된(잘못된 것으로 보이거나, 그렇게 믿는) 행동에 대해서 극적인 응징으로, 절대적 폭력(죽임)으로 단죄하는 것, 인간이 신의 역할을 대신한다는 것에서 그런 믿음은 태어나는가. 죄수의 몸에 글자를 새긴다는 장치의 특이성이 그 집행자로 하여금 묘한 희열을 느끼게 하는 듯도 하다. 죄목이 새겨진 채로, 실은 고통이 글자로써 속속들이 박힌 채로 죽는다는 것, 그것은 죄수로 하여금 그 죄를 영원히 기억하게 한다는 측면이 있다(죄수가 정말로 그러한지와는 별개로). 그것은 그 스스로의 피로 자신의 죄를 씻는 일이기도 하면서 피로 새겨진 죄에 영원토록 매이게 하는 일이다.

 

- 장교의 장엄한 죽음 혹은 개죽음이 드러내는 것은 무엇인가. 장교는 마치 할복하듯 자신이 벌하던 도구에 자신이 스스로 벌해지는 상황을 도모했다. 앞서 말한, 장치로부터의 양가적 측면이 장교로 하여금 그 처형 장치 위에 눕게 한 힘일지도 모른다. 장치에 대한 믿음과 숭배의 극단적인 표현이기도 할 테고(장치의 도래할 죽음은 자신의 죽음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것, 그러므로 장치의 죽음을 마주하기 전에 자신의 죽음을 감행하려 했을 것). 그리고 그것은 자신의 절대적 숭배와 사랑의 대상과의 극적인 접속 혹은 죽음충동을 내포한 교미로도 읽힌다. 그러나 어찌됐건 결국 그는 개죽음을 당할 뿐이다. 사실 이것이 작가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일 것이다. 마지막 순간의 극단적인 어긋남. 의도에 대한 결과의 미끄러짐. 하지만 장교는 어쩌면 오히려 작가를 이긴 듯 보인다. 그 평안한 얼굴로써. 끝까지 놓지 않았던 하나의 믿음으로써.

 

- 처형 장치 앞에서 히히덕거리거나 장난치거나 순진한 눈으로 말똥거리고 흰 죽을 나눠먹는 사병과 죄수의 엉뚱함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하나의 엄중함, 신성함 앞에서, 어떤 절대적인 운명적 흐름 앞에서 웃는 이들, 혹은 모두가 웃는 가운데 눈물 흘리는 자는 누구인가. 이 소설에서 그 둘은 처형 장치나 처형 집행자 앞에서 이중으로 벌거벗은 자이다. 죽어야 하는 자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를 죽음으로 이끌어야 하는 자. 죽으라고 하면, 죽이라고 하면 흰 죽처럼 맥없이 그 명령 앞에 엎드려야 하는 자들이다. 절대적 약자, 커버넌트들이다. 그런데도 바로 그 커버넌트들이 웃고 있다는 사실, 그 장면, 그 천진함과 무구함은 우리에게 무엇을 던져 주는가. 그것은 커버넌트 앞에 선,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커버넌트를 커버넌트로 만들어버리는 절대자의 힘을 어쩌면 넘어서는 힘처럼 느껴지는 듯하다. 그 바보성이, 그 영문 모름이, 의도 없이, 의지 없이 세상에 던져진, 자신의 잘못을 모르며, 어쩌면 죄 또한 없을지도 모르는 채로 법정 앞에 세워진 자들의 히히덕거림이 외려 시지프스의 하산의 힘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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