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세번째 세미나 후기(0721) +9
개구리
/ 2017-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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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라는 책 제목의 순서를 도치시킨 '반복과 차이'라는 서문은 반복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고 "차이의 개념은 개념적 차이로, 반복의 적극적 본질은 개념없는 차이로 환원되지 않는다"라는 명제로 마무리한다. 이번 주에는 <1장 차이 그 자체> 을 읽고 개념적 차이와 본래적 차이, 존재의 일의성을 이야기 해보았다.
"번개는 검은 하늘로부터 떨어져 나오려고 하지만, 결국 그 하늘을 같이 끌고 간다"
하늘로부터 떨어져 나오려는 번개의 이미지, 들뢰즈가 말하려는 차이가 이런 것이 아닐까 상상해본다.(이해는 버겁고요^^) 번개는 하늘로부터 떨어져 나와 번개이고자 하나, 하늘과 떨어져서는 번개일 수 없다. 벗어나려고 하지만 벗어날 수 없는 싸움, 바탕과 표면이 합쳐지는 이미지를 잔혹성, 또는 괴물이라 했다. 형상적인 조화를 포기한 듯한 추상적이고 기괴하게 보이는 고야의 판화 작품으로 그 이미지를 제시한다.
<고야: 잠든 이성은 괴물을 낳는다>
존재하는 것들의 시원, 근원을 바탕으로부터 존재자들이 출현하는 과정이 본래적 차이이다. 바탕과 거기서 떨어져 나오려는 존재, 이런 존재론적 차이를 사유하는 것이 철학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본래적 차이는 인식되어야 하는 차이가 아니라 이런 바탕에서 만들어지는 차이이지 않을까?.
들뢰즈는 완벽한 분류로 세계를 그렸던 아리스토텔레스를 끌어와 개념적 차이를 조근조근 비판한다. 합리주의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종(種)적 차이, 유(類)적 차이를 말한다. 종차(種差)는 동일성을 기반으로 성립되는 유적 개념에 의존하여 대립을 통한 상반성에서 도출된다. 네 개의 발이 있고 발굽이 있는 것은 말이라는 유적 차이 안에서 흰말이냐 검은말 이라는 종차가 성립된다. 그래서 종차는 차이의 독특성과 보편적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단지 상대적 의미의 차이이지 본성이 바뀌는 차이가 될 수 없다. 차이의 개념을 규정한다는 것이 차이를 규정되지 않은 개념의 동일성 안에 기입하는 것으로 뒤바뀐 것뿐이라고 들뢰즈가 꼬집어 말한다.
동일성에 기반한 유에 대한 종의 관계를 보면 분류 가능하다 것 자체가 차원이 다른 존재를 인정하는, 존재의 다의성을 말한다. 생물학의 분류를 보면 종속과목강문계라는 순서를 따라 종으로 갈수록 서로 세세한 유사성을 인지되어야 같은 종에 속한다. 그리고 분류레벨이 ‘문’이라는 높은 유로 되는 과정은 유비판단에 의한 추상적 선택을 하게 된다. 동일한 것을 상정하고 상반성과 대립으로 차이를 인식하는 반성적 개념의 차이일 뿐이다. 개념적 차이는 스스로 현현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동일성, 판단의 유비, 술어들의 대립, 지각된 것의 유사성이라는 것들로 ‘매개’될 뿐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차이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동일성, 유비, 대립, 유사성이라는 재현의 4개의 기둥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개념일 뿐이지, 어떤 존재의 본질이 되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개념적 차이에 기반한 존재는, 표준/정상/비정상등의 범주로 위계화 되어 일반성, 동일성을 지향하게 된다.
들뢰즈는 "존재는 일의적(一義的,univocity)이다"라는 명제만을 인정한다. 존재는 여러 모습(양태)으로 나타날 수 있지만 그 것은 존재론적 구별이 아니라 형상적, 질적, 기호학적 구별일 뿐이다. 하나의 별을 보고 새벽 별/저녁 별이라고 부를 수 있다. 한 존재에 대한 여러 지칭일 뿐이다. 단 하나의 목소리가 존재의 아우성을 이룬다라는 말처럼.
존재의 일의성은 둔스 스코투스에 의해 사유되었고, 스피노자에 의해서는 긍정되었고 니체에 의해 실현되었다고 말한다. 둔스 스코투스는 존재를 중립적이고 중성적인 것으로 보편적인 것과 독특한 것이 교차하는 이편에서 식별해 냈다. 추상적인 개념 안에서 존재를 중성화시켰기 때문에 일의적 존재를 단지 사유하기만 했을 뿐이다. 스피노자는 일의적 존재를 중립적이거나 무차별한 것으로 사유하는 대신 순수한 긍정의 대상으로 만든다. 실체와 양태들이 똑같은 본질을 갖지 않음에도 속성들은 실체와 양태들에 대해 절대적으로 공통적이다. 여기서 모든 위계, 탁월성은 부정된다. 일의적 존재는 중립성을 띠는 것이 아니라 역량의 정도에 따라 표현성을 띨 뿐이다.
니체의 영원회귀를 통해 일의성에 대한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을 이룬다. 동일성이 일차적인 것이 아니고, 차이라는 생성을 거쳐 만들어지는 이차적인 것이다. 차이가 존재를 계속 꿈틀꿈틀 바꾸어나가는 것이지, 동일성 속에서 차이가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다. 이 차이는 자신을 스스로 변형할 수 있는 고귀한 에너지, 히브리스(hybris)이다. “자신의 한계 안에서 자신의 역량의 끝까지 나아가는 가운데 스스로 변형하고 서로의 안으로 이행하는 극단적 형상들이 되돌아 오는 것”이라는 구절이 꽂히기는 하나 아직 영원회귀는 나에게는 뭔가 뜬구름이다.
존재의 일의성은 또한 존재의 동등성을, 평등을 의미한다. 일의적 존재는 유목적 분배이자 왕관을 쓴 무정부 상태이다(106쪽)
차이 그 자체가 존재의 본질이라는 존재의 일의성, 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존재의 평등함에 세미나원들은 위로를 받았다고 한다. 그 평등함 속에서 각자의 역량을 발휘하여 “왕관을 쓴 무정부주의자”가 되는 것에 매진해야 함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하면서. 처음이 제일 어렵고 갈수록 설명이 더 나와서 쉬어질 것이라는 나무님의 말을 믿고 가보고 있으나 아직은 여전히 많이 어렵네요. 제 공부가 요만큼인데 그저 밥 떠주기만 바라고 입 벌리고 있는 모습도 욕심이려니 합니다. 더운 여름 쿨한 들뢰즈가 좀 도움이 될는지 일단 가봅니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기다리던 후기가 올라왔군요. 깔끔하고 일목요연한 정리, 감사합니다.
도움이 많이 되었습니다.
이번 주 세미나도 평등한 존재들의 역량을 펼쳐내는 판타스틱한 시간이 되기를 기대하며!
선우님의 댓글
선우
"왕관을 쓴 무정부주의자들" 이란 표현을 부각시켜준 삼월 님 고마와요^^
그 왕관은 미래에 쓰기 위해 노력할 것이 아니라 '이미' 쓰고 있는 존재라는 것! 이겠지요.
사실 저는 '존재론적 평등성'을 이해하기가 어렵지는 않았어요.(왜 그런지 알죠?)
지난 주 알뜰신잡에서도 나왔잖아요. 조선시대 가톨릭이 들어왔을 때, 하나님 외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말이 당시 양반이 아니었던 모든 계급에게 복음이었다고요. 서자 서녀 출신들이 신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고요.
배교의 기회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순교했다고...
아, 물론 들뢰즈는 '인간'만의 평등을 이야기하는 것에는 노! 라고 하지만 말입니다.
암튼, 내일 삼월이 없어서 좀 허전할 듯...
선우님의 댓글
선우
"종차(種差)는 동일성을 기반으로 성립되는 유적 개념에 의존하여 대립을 통한 상반성에서 도출된다."
"개념적 차이는 스스로 현현하는 것이 아니라 개념의 동일성, 판단의 유비, 술어들의 대립,
지각된 것의 유사성이라는 것들로 ‘매개’될 뿐이다." 명쾌합니다.^^
저는 처음에 나오는 '차이와 괴물성' 부분 읽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우리가 보통은 차이나는 것을 '괴물적'으로 인식한다고요.
애기가 태어나면 그런다지요. 눈코입이 제대로 붙어있는지, 손가락 발가락은 10개가 맞는지...
'인간'의 형태에 아기의 신체가 맞는지 아닌지가 우선은 제일 중요한 관심사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때부터 아주 험난한 타인의 시선과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오랫동안 고통받고요...
'비정상성'은 우선은 '신체'의 문제였습니다. 차이나는 것은 비정상이다. 괴물이다.
선우님의 댓글
선우
우리가 정말 다른 사람과 차이나는 것을 바랄까? 그런 생각도 들었습니다.
남들 다 가는 대학도 들어가야하고, 남들 다 있는 애인도 있었으면 좋겠고, 남들 다 하는 결혼도 하고
남들 다 낳는 애도 낳고, 남들 다 사는 집도 사고... 요즘 휴가철이라 또 남들 다 가는 해외여행이라는 것도 좀 해보고...^^
우리의 욕망이 다수성을 획득하는 것에서도 얼마나 큰 쾌감을 느끼는가 하는 그런 생각요... ㅎㅎ
선우님의 댓글
선우
동일성의 영역 안에서의 위계가 아니더라도, 바탕으로부터 생성되는 차이를 사유함에 있어서도 여전히 위계가 있다는 말도
아주 주의깊게 읽었던 부분인데요. 역량의 관점에서 사물과 존재자들을 바라보는 위계.
그 역량이라는 것은 한 존재자가 궁극적으로 도약하고 있는지, 자신이 할 수 있는 끝에까지 이르고 그 한계를 넘어서는지의 문제입니다.
그리고 그 '끝'은 한계안에서의 끝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역량을 펼쳐내는 '출발점'이라고 합니다. 두고두고 생각해볼 문제입니다.(저도 잘 몰라서요...ㅎㅎ)
고귀한 자가 누구인지에 대한 정의는 아주 명쾌했습니다.
자신을 스스로 변형시킬 수 있는 에너지를 가진 자! (다시 역량의 문제네요)
선우님의 댓글
선우
잠든 이성이 괴물을 낳는다고? 아니, 사유가 괴물을 낳는다.
들뢰즈는 동일성의 원리 안에 있는 사유가 아니라, 동일성의 철학을 그대로 따라하는 철학이 아니라,
수영강사의 팔동작을 그대로 흉내내는 배움이 아니라, 뭔가 다른 사유를 하려고 하나봅니다. 세계를 안전하게 하는
그대로 보존시키는 사유가 아니라, 뒤흔드는 사유, 그래서 '침략' 이 되는 사유. 정상, 비정상을 흔들어버리는 사유.
거기에서 어떤 차이, 어떤 괴물이 나오는지 지켜봐야겠어요. '괴물성'을 어떻게 뒤집는지도....
아, 어쩜 좋아요 들뢰즈.... 어려워도 어려워도 빠져들지 않을 수 없단 말이지요...^^
선우님의 댓글
선우
이러다가 본문보다 길어지는 댓글 달 거 같아요.ㅋㅋㅋ
경아 님 덕분에 아침 댓바람부터 수다떨었습니다.
이제 내일의 수다를 위해 책을 읽어야겠어요.~~
lizom님의 댓글
lizom이 정도 정련된 후기를 쓰려면 얼만큼의 욕지기와 땀이 필요했을까요. 감탄이 절로 나오는 후기 잘 읽었습니다.
namu님의 댓글
namu말끔하네요. 제 정신도 저렇게 크리스탈처럼 투명해진 적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맨날 막걸리만 퍼 먹어서 그런가. 들뢰즈는 개념을 극화하려 했다고 하네요, 이번 장의 서두 부분의 연극적인 연출도 그런 측면이 있지 않나 싶어요. 아무래도 예술에 대한 컴플렉스가 있지 않나 싶어요. 아무튼 이런 생각이 났어요. 차이는 becoming이라고 했잖아요. 생성, 되기. 그래서 말인데, 바탕(심연)에서 표면으로 괴물을 낳는 결과로서의 차이가 아니라 바탕과 표면 사이가 차이가 아닐까 합니다. 그게 그거 아닌가라고요. 아무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