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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 2. 대자적 반복 -발제
아침 / 2017-08-04 / 조회 2,0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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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대자적 반복                                                                                                                                      아침

 

(1절) 반복: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

흄의 테제-‘반복되고 있는 대상 안에서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반복을 응시하고 있는 정신 안에서는 무엇인가 변하고 있다.’(이것이 양태변화의 본질이다) 어째서 반복되고 있는 요소나 경우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일까? 반복을 지배하는 불연속성이나 순간성의 규칙은 어떤 것이 나타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다른 것이 사라져야 한다는 것이다. 즉 반복은 생성하는 가운데 소멸한다. 즉자로서의 반복은 없다. 응시하는 정신 안에서는 어떤 차이 새로운 어떤 것이 발생한다. 대자적 측면은 반복을 필연적으로 구성하고 있어야 하는 어떤 근원적 주관성에 해당한다. (반복의 역설: 응시하는 정신 안에 차이나 변화를 끌어들이는 것은 반복이다. 하시만 반복은 그 차이나 변화에 의존할 수 밖에 없다)

 

수축은 어떤 시간의 종합을 이루어낸다. 시간은 어떤 근원적 종합 안에서만 구성된다. 순간들의 반복을 대상으로 하는 이 종합은 독립적이면서 서로 안으로 수축한다. 이 종합을 통해 살아 있는 현재가 구성된다. (이 종합은 수동적 종합이며 구성적이다. 이 종합은 기억과 반성에 앞서 응시한 정신 안에서 이루어진다. 시간은 주관적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떤 수동적 주체의 주관성이다. 수축은 살아 있는 현재안에서, 지속으로서의 이 수동적 종합안에서 이루어진다.) 그리고 시간은 현재 안에서 펼쳐진다. 선행하는 순간들이 수축을 통해 유지되는 한에서 과거는 현재에 속한다. 기대는 그런 똑같은 수축 안에서 성립하는 예상이므로 미래또한 현재에 속한다. 살아 있는 현재는 과거에서 미래로 가지만, 그 과거와 미래는 현재 자체가 시간 안에서 구성한 과거이자 미래이다. 살아 있는 현재는 특수한 것에서 일반적인 것으로 이행한다.

 

시간의 첫 번째 종합: 살아있는 현재

기억은 자신에게 고유한 ‘시간의 공간’안에 특수한 경우들을 보존하고, 그런 가은데 이 경우들을 구별되는 경우들로 재구성한다. 과거는 재현에 의한 반성적 과거, 반성되고 재생된 특수성이다. 미래는 예견에 의한 반성적 미래, 지성에 의해 반성된 일반성이다. 기억과 지성의 능동적 종합이 상상력의 수동적 종합과 중첩되고 또 능동적 종합이 수동적 종합에 의존한다.

 

반복의 구성에서 세 가지 층의가 함축되어 있다. 먼저 즉자의 층위가 있다. 그러나 사유 불가능하다. 그 다음 수동적 종합에 따르는 대자적 층위가 있다. 마지막으로 이 층위에 기초한 반성적 재현의 층위가 있다.

 

베르그손의 예 A A A A라는 요소의 반복(닫힌 반복)이다. 흄의 예 AB AB AB A...는 경우들의 반복(열린 반복)이다. 그러나 경우들의 반복이 열려 있다면, 그것은 이항 대립을 통해 요소들 사이에 폐쇄적 관계가 성립한 이후이다. 요소들의 반복이 닫혀 있다면, 그것은 그 배후에 경우의 구조들이 자리하고 있을 때이다. 수동적 종합 안에서 이러한 반복의 두 형식은 언제나 서로 의존하는 관계에 있다. 즉 경우들의 반복은 요소들의 반복을 가정하지만, 요소들의 반복은 필연적으로 스스로 자신을 넘어서서 경우들의 반복 안으로 들어간다.

 

습관, 수동적 종합, 수축, 응시

반복의 두 형식 사이의 구별보다 어떤 수준들의 구별이 중요하다. 한 형식과 다른 형식이 서로 영향을 미치고 서로 조합되는 수준들이 있다. 지각된 대상 그 자체는 두 가지 사태를 함축한다. 먼저 경우들의 수축이 있고, 이 수축을 통해 한 성질은 다른 성질 안에서 독해된다. 다른 한편 어떤 구조가 있는데, 이 구조 안에서 대상의 형식은 그 성질과 짝을 맺는다. 그러나 구성적 수동성의 질서 안에서 지각적 종합들의 배후에는 어떤 유기체적 종합들이 자리 한다. 이는 마치 감관들의 감성이 우리의 존재에 해당하는 어떤 원초적 감성에 의존하는 것과 같다. 모든 유기체는 수축(현재), 파지(과거), 기대(미래)들이 어우러진 어떤 종합이다. 체험된 현재가 이미 시간 안에서 어떤 과거와 미래를 구성하고 있다. 이 미래는 욕구 안에서 나타나며, 이 욕구는 기대의 유기체적 형식에 해당한다. 반면 파지의 과거는 세포의 유전에서 나타난다. 유기체적 종합들은 지각적 종합들과 조합되며, 기억과 지성의 능동적 종합 안에서 다시 자신을 펼친다.( 즉 각각의 수축, 각각의 수동적 종합은 하나의 기호를 구성하고, 이 기호는 능동적인 조합들 안에서 해석되거나 펼쳐진다) 감각이나 지각이 반복에 참여하는 방식, 욕구와 유전, 학습과 본능, 지성과 기억이 반복의 방식은 네 가지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반복의 형식들의 조합, 이 조합들이 정교화되는 수준들, 이 수준들의 연관성, 능동적 종합과 수동적 종합들의 상호 간섭등이다.

 

습관은 반복에서 새로운 어떤 것, 곧 차이를 훔쳐낸다. 습관의 본질은 수축에 있다. 수축은 응시하는 영혼 안에서 계속 이어지는 틱-탁(반복)의 융합을 가리킨다. 이것이 수동적 종합이다. 이 수동적 종합은 우리의 삶의 습관을 구성한다. 즉 그것이 구성하는 것은 ‘이것’이 계속되리라는 우리의 기대이며, 두 요소 중의 하나가 다른 요소 이후에 뒤따라올 것이라는 우리의 기대이다. 그러므로 습관이 수축이라는 것은 응시하는 정신 안에서 일어나는 이런 반복의 융합이다. 우리가 습관들로 이루어져 있다면 이는 우리가 수축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수축하게 되는 것은 응시를 통해서이다. 이 둘은 동시적 사태이다. 우리는 오로지 응시하기 때문에 실존한다. 우리는 수축하기 때문에 비로소 존재한다.

 

쾌락의 요소들은 자극체들이 이완과 수축들을 이어나갈 때 발견될 것이다. 쾌락은 모든 경우 안에서 우리의 심리적인 삶을 지배하는 어떤 최고의 원리인가? 쾌락이 원리라면, 이는 그것이 어떤 충만한 응시의 흥분이기 때문이다. 응시는 이완과 수축으로 이루어진 경우들을 자기 자신, 안에서 수축할 때 충만해진다. 응시를 통해 우리는 쾌락을 맛본다. 그리고 우리 자신과는 다른 사물을 응시함에도 불구하고, 그 응시가 가져다 준 쾌락을 통해 모두 나르키소스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응시하는 것을 통해 언제나 악타이온이 된다. 응시한다는 것, 그것은 훔쳐낸다는 것이다. 모든 유기체는 반복의 요소와 경우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래서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모든 습관들을 서로 얽고 조여 매고 있다.

 

습관의 문제

행위는 특수한 것을 변수로 취하고, 일반성을 요소로 삼는다. 일반성은 반복에 의존한다. 반복은 일반성이 구성되는 숨겨진 기저이다. 행위가 일반성의 질서 안에서, 이 질서에 상응하는 변수들의 영역 안에서 구성된다면, 그것은 오로지 반복 요소들의 수축을 통해서만 그러하다. 행위하는 자아 아래에는 응시하는 작은 자아들이 있다. 행위와 능동적 추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이 작은 자아들이다. 우리가 ‘자아’를 말할 수 있다면, 이는 우리 안에서 응시하는 이 수많은 목격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반복은 본질상 상상적이다. 왜냐하면 상상만이 구성의 관점에서 반복적인 힘의 ‘계기’를 형성하기 때문이다. 참된 반복은 상상에서 나온다. 즉자의 상태에서 와해되는 반복과 재현의 공간 안에서 우리에 대해 펼쳐지고 보존되는 반복사이, 그 사이에는 차이가 있다. 그 차이는 반복의 대자적 측면이고, 이 측면은 상상적인 것이다. 차이는 반복에 거주한다. 수평적 구도에서 볼 때 차이는 반복 안의 한 질서로부터 다른 질서로 옮겨가게 해준다. 이때 즉자적으로 와해되는 순간적인 반복에서 출발하여 수동적인 종합을 경유하고, 이를 통해 능동적으로 재현된 반복으로 이행한다. 수직적 구도에서 볼 때 차이는 어떤 반복의 질서로부터 다른 반복의 질서로 옮겨가게 해준다. 이때 수동적인 종합들 그 자체 안에서 하나의 일반성으로부터 다른 일반성으로 이행한다. 같음의 반복은 외피이다. 그것은 중핵에 해당하는 차이와 좀더 복잡한 내적 반복들을 감싸고 있다. 차이는 두 반복 사이에 있다 이는 역으로 반복이 또한 두 차이 사이에 있으며, 차이의 한 질서로부터 다른 한 질서로 이동하게 만든다.(가브리엘 티라트의 예-변중법적 전개는 반복이다. 이 반복은 어떤 일반적 차이들의 상태로부터 독특한 차이로 옮겨가는 이행이며, 외부적 차이들로부터 내부적 차이로 향하는 이행이다. 반복은 차이의 분화소이다.)

 

시간의 종합은 시간 안에서 현재를 구성한다. 오로지 현재만이 실존한다. 종합은 시간을 살아 있는 현재로 구성하며, 과거와 미래를 이 현재의 차원들로 구성한다. 그렇치만 이 종합은 시간 내적이다. 이는 이 현재가 지나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응시 안의 수축은 요소나 경우들을 따르는 반복의 질서에 언제나 질적 변용을 가져온다. 수축은 필연적으로 특정한 지속을 띤 현재를 형성한다. 욕구의 반복과 이것에 의존하는 모든 것의 반복은 시간의 종합에 고유한 시간을 표현하며, 이 종합의 시간 내적 특성을 표현한다. 반복은 본질적으로 욕구 안에 기입되어 있다. 왜냐하면 욕구는 본질적으로 반복과 관계하는 심급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 심급은 반복(특정한 지속)의 대자적 측면을 형성하고 있다.(수동적 종합의 관점에서는 과거와 미래가 현재 자체의 서로 다른 차원들이다. 예-흉터는 부상에 대한 응시이다. 상처는 자아를 부상과 분리시키는 모든 순간들을 하나의 생생한 현재 안에 수축한다)

 

진정한 의미를 얻는 것은 자연적인 기호와 인공적인 기호의 구분이다. 자연적인 기호들(현재의 기호들)은 자신이 의미하는 대상 안에서 현재를 드러내는 기호들, 수동적 종합에 기초하는 기호들이다. 인공적인 기호들(과거나 미래의 기호들)은 능동적 종합들을 함축한다. 함축된 것은 자발적 상상력에서 반성된 재현, 기억, 지성 등의 능동적 인식능력들로 향하는 이행이다.

 

응시한다는 것, 그것은 묻는다는 것이다. 대답을 ‘훔쳐낸다’는 것. 응시들은 어떤 물음들이다. 응시들 안에서 이루어 지고 응시들을 채우는 수축들은 모두 어떤 유한한 긍정들이다. 이 긍정들이 발생할 때 현재들은 시간의 수동적 종합 안에서 영속하는 현재로부터 태어난다.(부정적인 것을 생각하게 되는 것은 욕구를 능도억 종합들과의 관계 안에서 이해하려는 우리의 성급한 태도 때문이다)

 

살아 있는 현재는, 모든 유기체적이고 심리적인 삶은 습관에 의존한다. 우리를 이루고 있는 수많은 습관들(수축, 응시, 지망, 자만, 만족, 피곤들, 가변적 현재들)은 수동적 종합들의 기저 영역을 형성한다. 본연의 수동적 자아는 감각 작용들을 구성하기 전에 이미 유기체 자체를 구성하는 수축하는 응시에 의해 정의된다. 수동적 종합들의 세계는 규정되어야 할 어떤 존건들 안에서 자아의 체계를 구성한다. 하지만 그것은 분열된 자아의 체계이다. 자아는 그 자신이 어떤 양태변화이고, 훔쳐낸 차이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존재가 형성되거나 수동적 자아가 있는 것은 바로 어떤 소유를 통해서이다. 모든 수축은 자신이 수축하는 것에 대한 기대나 권리를 표명하고 자신의 대상이 자신을 벗어나자마자 와해된다. 분열된 자아는 자신을 구성하는 모든 피곤들 안에서, 모든 자기만족들 안에서, 모든 자만들 안에서, 자신의 비참과 가난 속에서 존재한다.(하지만 자신이 응시하고 수축하며 소유하는 것의 영광을 노래한다.)

 

(2절) 시간의 두 번째 종합: 순수 과거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은 시간을 현재로 구성하지만, 그렇게 구성된 현재는 지나가버리는 현재이다. 현재의 역설은 현재는 시간을 구성하지만, 이 구성 된 시간에서 지나가버린다는 것이다. 그 안에서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이 일어나는 어떤 또 다른 시간이 있어야 한다. 즉 시간의 첫 번째 종합은 필연적으로 어떤 두 번째 종합을 전제한다. 첫 번째의 종합은 습관의 종합이고, 이 종합은 시간의 정초이다. (정초와 근거를 구분해야한다) 즉 습관은 시간의 정초 지점이고 지나가는 현재에 의해 점유된 움직이는 땅이다. 하지만 현재를 지나가도록 만들고 현재와 습관을 전유하는 것은 시간의 근거로 규정되어야 한다. 시간의 근거는 본연의 기억에 있다. 기억의 능동적 종합은 습관에 정초를 두는 동시에, 기억의  수동적 종합에 의해 근거지어야 한다. 습관은 시간의 시원적 종합이며, 이 종합은 지나가는 현재의 삶을 구성한다. 기억은 시간을 근거짓는 종합이며, 이는 과거의 존재을 구성한다.(주8 정초는 시간의 첫 번째 종합에서 발생, 근거는 시간의 두 번째 종합에서 주어짐, 시간의 세 번째 종합에서 성립하는 토대는 바탕이라 불리고 이 바탕은 무-바탕과 근거와해로 이어짐.)

 

기억, 순수 과거, 현재들의 재현

과거는 사라진 현재 자체가 아니라 그 안에서 이 사라진 현재가 겨냥되는 요소이다. 또한 특수성도 겨냥된 것 안에 있다. 반면 과거 자체는 본성상 일반적이다.(파지와 재생을 구분해야 한다. 주11. 재생은 파지와 달리 능동적이고 재현적인 의식의 차원에서 성립하는 재기억의 기능을 말한다) 습관의 파지는 특정한 지속의 어떤 현행적 현재 안에서 수축되어 있는 계속적 순간들의 상태이다. 그 순간들은 특수성을, 다시 말해서 본성산 현행적 현재에 속하는 무매개적이고 직접적인 과거를 형성하고 있다. 현재 자체에 대해 말하자면 그것은 기대를 통해 미래로 열려있고 일반적인 것을 구성하고 있고, 기억의 재생 쪽에서 보면 일반성은 오히려 과거(현재들의 매개로서 과거)이고, 특수성을 띠게 된 것은 현재(사라진 현재와 현행적 현재)이다. 

 

사라진 현재가 과거 일반안에 보존되고 있다면, 사라진 현재는 현행적 현재 안에 ‘재현전화’되어 있다. 이런 재현이나 재생의 한계들은 실제로 유사성과 인접성의 가변적 관계들에 위해 규정되고, 이 관계들은 연상이라는 이름 아래 파악되고 있다. 사라진 현재가 재현되기 위해서는 현행적 현재와 유사해야 하고, 또 매우 다른 지속을 띠고 있지만 부분적으로는 동시적인 현재들로 분리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이 사라진 현재들은 서로 인접해 있고 극단의 경우에는 현재와 인접해 있다.

 

재현은 그 자신의 고유한 재현성을 재현한다. 현해적 현재는 필연적으로 또 하나의 차원을 포함하고 있고. 그 차원을 통해 현행적 현재는 사라진 현재를 재-현하고 또 그 차원 안에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재현한다. 현행적 현재는 사라진 현재의 회상을 형성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스스로 반조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따라서 능동적 종합은 대칭적이지는 않지만 서로 상관적인 두 측면을 지닌다(재생과 반조, 재기억과 재인, 기억과 지성)

 

기억의 능동적 종합은 재현의 원리라 불릴 수 있다. 기억의 능동적 종합은 습관의 수동적 종합 위에 정초하고 있다. 왜냐하면 습관의 수동적 종합은 가능한 모든 현재 일반을 구성하기 때문이다. 습관의 수동적 종합은 현재라는 조건 아래 순간들의 수축을 통해 시간을 구성했다. 기억의 능동적 종합은 현재들 자체를 서로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시간을 구성한다. 사라진 현재가 재생될 수 있는 것은, 현행적 현재가 자신을 반조하는 것은 과거의 순수 요소에 의해서이다. 기억의 능동적 종합이 습관이 (경험저거인 수동적 종합 위에 정초하고 있다 해도 기억 자체의 고유한(초월론적인) 수동적 종합에 의해서만 근거지어질 수 있다. 습관의 수동적 종합은 시간 안에서 살아 있는 현재를 구성하고 과거와 미래를 그 현재의 비대칭적인 두 요소로 만든다. 반면 기억의 수동적 종합은 시간 안에서 순수 과거를 구성하고 사라진 현재와 현행적 현재를 본래적 과거의 비대칭적인 두 요소로 만든다.

 

과거의 네 가지 역설

들뢰즈는 베르그손의 시간론(순수 과거에 대한 이론)을 네 가지 역설을 중심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첫 번째 역설은 동시간성의 역설(과거는 먼저 한때 현재였던 ‘동시에’ 과거로서 미리 구성되어 있지 않다면 결코 구성될 수 없을 것. 과거와 그것이 한때 구가했던 현재의 동시간성이라는 역설)로 순수 과거와 사라진 현재 사이에서 성립한다. 두 번째 역설은 공존의 역설(각각의 과거가 자신이 한때 구가했던 현재와 동시간적이라면, 사실 모든 과거는 그것이 과거이기 위해 지금 거리를 둔 새로운 현재와 공존함)로 순수 과거와 현행적 현재 사이에서 성립한다. 세 번째 역설은 선재의 역설(각각의 과거는 자신이 한때 구가했던 현재와 동시간적이고, 과거 전체는 그것이 과거이기 위해 거리를 둔 현재와 공존하지만, 과거 일반의 순수 요소는 지나가는 현재에 선재함)로 순수 과거와 지나가는 현재 사이에서 성립한다. 마지막으로는 순수 과거의 자기 자신과의 공존이라는 역설이다.

 

초월론적인 수동적 종합은 동시간성과 공존, 그리고 선재라는 세 가지 관점에서 이 순수 과거와 관계한다. 능동적 종합은 현재의 재현이며, 이 재현은 사라진 현재의 재생과 새로운 현재의 반조라는 이중적 측면에서 이루어진다. 능동적 종합은 초월론적인 수동적 종합에 근거지어진다.

 

계속 이어지는 현재들은 일관성을 결여하거나 서로 대립할 수 있지만 우리는 그 비일관성이나 대립이 아무리 크더라도 각각의 현재가 어떤 다른 수준에서 ‘똑같은 삶’을 펼친다는 인상을 받는다. 그것이 운명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운명이 계속 이어지는 현재들 사이에서 함축하는 것은 어떤 정위 불가능한 연관들, 원격 작용들, 재취함과 공명과 반향의 체계들, 객관적 우연들, 신호와 기호들, 공간적 상황과 시간적 계속성들을 초월하는 어떤 역할들이다. 운명을 표현하는 현재들은 수준의 차이를 제외하면 언제나 똑같은 사태와 똑같은 이야기를 펼쳐놓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운명은 결정론과는 그토록 부합하지 못하는 반면 자유와는 그토록 잘 부합한다.

 

우리는 우리를 형성하는 현재들 사이의 계속적 관계와 동시적 관계들을 경험적 특성이라 부른다. 이 현재들이 인과성, 인접성, 유사성 그리고 심지어 대립에 따라 연합하는 것도 경험적 특성이라 불릴 수 있다. 반면 어떤 순수 과거의 수준들 사이에 성립하는 잠재적 공존의 관계들을 본체적인 특성이라 부른다. 능동적 종합의 관점에서 서로 다른 현재들의 계속을 경험한다면, 그 계속의 사태는 또한 수동적 종합 안에서 일어나는 과거의 수준들의 공존이기도 하며, 그 공존은 언제나 증대해간다. 

 

현재의 기호는 극한으로의 이행이며, 어떤 수준이든 하나의 수준을 선택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는 최대한의 수축이다. 하지만 그렇게 선택된 수준은 그 자체로 수축되어 있거나 팽창되어 있으며, 무한히 많은 다른 가능한 수준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의 삶에 대해 말할 수 있는 것은 복수의 삶에 대해서도 타당하다. 각각의 삶이 어떤 지나가는 현재라면, 하나의 삶은 다른 삶을 다른 수준에서 다시 취할 수 있다.(윤회: 서로 다른 수준에서 똑같은 과거를 연출하는 것)

 

물질적 반복과 정신적 반복

물질적 반복은 서로 독립적이면서 계속 이어지는 요소나 순간들의 반복이다. 정신적 반복은 공존하는 상이한 수준들에서 일어나는 전체의 반복이다.(*물질적 반복-헐벗은 반복, 부분들의 반복, 이어지는 반복, 현행적, 수평적 반복. *정신적 반복-옷 입은 반복, 전체의 반복, 공존하는 반복, 잠재적, 수직적 반복) 현재는 언제나 수축된 차이다. 물질적 반복의 경우 현재는 서로 무관심한 순간들을 수축한다. 반면 정신적 반복의 경우 현재는 극한에 이르고 그런 가운데 하나의 수준을 수축한다. 현재들 자체의 차이는 두 반복 사이에 놓인다. 하나의 반복은 요소적 순간들의 반복이며, 이때 차이는 이 순간들에서 훔쳐내는 그 무엇이다. 다른 하나의 반복은 전체가 지닌 수준들의 반복이며, 이때 차이는 이 수준들 안에 포함되어 있다.

 

이 두 가지 반복 중 어느 것도 재현 가능하지 않다. 왜냐하면 물질적 반복은 성립하는 동시에 와해되기 때문이다. 물질적 반복은 오로지 능동적 종합에 의해서만 재현된다. 하지만 동시에 이 반복은 재현의 대상이 되자마자 요소들의 동일성이나 경우들의 유사성에 종속된다. 정신적 반복이 과거의 즉자 존재 안에서 성립한다면 재현을 통해 모든 반복은 반조 안의 현행적 현재의 동일성에, 그리고 재생 안의 사라진 현재의 유사성에 종속된다.

 

상기는 자발적 기억의 모든 능동적 종합과는 본성상 다른 어떤 수동적 종합이나 비-자발적 기억을 지칭한다. 과거의 즉자 존재가 출현하는 것은 바로 본연의 망각 안에서 이다. 과거에 즉자 존재가 있다면, 상기는 그것의 본체이거나 그 본체에 사로잡힌 사유이다. 순수 과거는 지나가는 현재들에 힘입고 또 그 현재들을 이용하는 가운데 재현 아래에서 나타난다. 그 안에서 현재들이 지나가고 서로 충돌하는 요소를 제공한다.

 

(3절)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칸트적 코기토: 규정되지 않은 것, 규정, 규정 가능한 것

시간 이론의 관점에서 데카르트적 코기토와 칸트적 코기토의 차이를 보면, 데카르트적 코기토는 규정과 규정되지 않은 실존이라는 두 가치에 기능한다. 규정은 규정되지 않은 실존을 함축한다. 그리고 그 규정되지 않은 실존을 사유하는 존재자의 실존으로 규정한다. 칸트는 규정을 규정되지 않은 것에 직접적으로 관계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따라서 규정 가능한 것을 덧붙인다. 이것은 미규정자가 규정될 수 있는 형식이다.(규정에, 그리고 규정되지 않은 것에 규정 가능성의 형식을, 다시 말해서 시간을 덧붙인다.)그것은 본연의 차이 자체의 발견을 구성한다. 여기서 발견되는 차이는 본래적 규정 자체와 그것이 규정하는 것 사이의 초월론적 차이다.

 

(칸트-규정되지 않은 실존이 ‘나는 생각한다’에 의해 규정될 수 있는 형식은 시간의 형식) 규정되지 않은 나의 실존은 오로지 시간 안에서만 규정될 수 있다. 이때 나의 실존은 어떤 현상의 실존으로, 곧 시간 안에서 출현하는 수동적이거나 수용적인 현상적 주체의 실존으로 규정된다. 그것은 단지 수동적 자아의 변용으로만 이해해야 한다. (수동적 자아-‘나는 어떤 타자이다’ 혹은 내감의 역설로 집약된다. 사유의 능동성은 어떤 수용적 존재자에 적용되고, 따라서 이 수동적 주체는 능동성을 행사한다기보다는 표상한다. 그 능동성의 효과를 느끼며, 능동성을 자신 안의 어떤 타자로 체험한다.) 나는 시간의 텅 빈 형식에 의해 균열되어 있다. 이런 형식을 통해 볼 때, 나는 시간 안에서 나타나는 수동적 자아의 상관항이다. 수동적 자아와 균열된 나의 이 상관관계를 통해 초월론적인 것의 발견이나 코페르니쿠스적 혁명의 요소가 구성되고 있다.

 

균열된 나, 수동적 자아, 시간의 텅 빈 형식

데카르트는 시간을 연속적인 창조 작업중인 신에게 내맡겨놓는다. 나에 대해 가정된 동일성은 신 자신의 단일성 외에는 다른 보증이 없다. 하나가 보존하는 동일성은 정확히 다른 하나에 의존하는 동일성이기 때문이다. 신의 죽음은 나의 동일성을 존속하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신의 죽음을 통해 어떤 본질적 비유사성. ‘표시 삭제’가 생겨나고 내면화 된다. [순수이성비판]에서 칸트는 바로 이점을 꿰뚫어 보았다. 신의 사변적 죽음은 나의 균열로 이어진다. 초월론 철학의 위대한 창의성은 시간의 형식을 본연의 사유 안으로 끌어들이는 데 있다. 순수하고 텅 빈 이 형식은 이제 죽은 신, 균열된 나, 그리고 수동적 자아를 의미하게 된다. 칸트는 이런 창의성을 끝까지 추구하지 않았지만 우리는 수동적 자아는 보다 깊은 차원에서 그 자체가 수동적인 어떤 종합(응시-수축)에 의해 구성된다는 것을 보았다. 횔덜린은 순수한 시간의 공허를 발견한다. 이 공허 안에서 신성한 것의 연속적 전회, 나의 심화된 균열, 그리고 본연의 자아를 구성하는 수동적 정념을 동시에 발견한다. 

 

기억의 불충분성: 시간의 세 번째 종합

플라톤의 상기는 이미 시간을 본연의 사유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으로 보인다. 상기는 어떤 형식을 통해 시간을 도입하는가? 시간은 이데아의 순수 과거 안에서 자신의 근거를 찾아야 할 것이다. 이 이데아를 통해 현재들의 질서는 이상적인 것에 대한 유사성의 증감에 따라 원환적으로 조직된다. 이데아 자체를 정의하는 순수 과거는 필연적으로 현재의 관점에서 표현되고, 사라진 신화적 현재로서 표현된다. 이미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이 지닌 애매성, 기억의 모호성은 이 점과 이어져 있었다. 그것(기억)은 근거, 즉자 존재, 현상 배후의 본체, 이데아이다. 하지만 그것(기억)은 자신이 근거짓는 재현에 묶여 있다. 므네모시네(기억)는 현재로 환원될 수 없고 재현보다 우월하지만 현재들의 재현을 순환적이거나 무한하게 만들뿐이다. 근거(기억)의 불충분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근거(기억)는 자신이 근거짓는 것에 상대적이고, 자신이 근거짓는 것에서 특성들을 빌려오며, 그 빌려온 특성들을 통해 자기 자신을 입증한다. 즉 근거(기억)는 사유 안으로 시간을 끌어들인다기보다 영혼 안으로 운동을 끌어들인다. 시간의 두 번째 종합은 또한 재현의 상관항으로 머물러 있는 즉자 존재의 가상을 폭로하는 세 번째 종합을 향해 자신을 넘어선다. 과거의 즉자 존재와 상기 안의 반복은 일종의 ‘기억 자체의 어떤 광학적 효과’(에로스적 효과)일 것이다. 

 

시간의 형식, 순서, 집합, 계열 

시간의 텅 빈 형식 혹은 시간의 세 번째 종합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빗장(시간의 방위 기준점)이 풀린 시간은 미친 시간을 의미한다. 즉 자신이 텅 빈 순수한 형식임을 발견하는 시간이다. 이때 결코 어떤 것도 시간 안에서 펼쳐지지 않는다. 그 대신 시간 자체가 스스로 자신을 펼쳐간다. 이것이 시간의 순수한 순서다. 그 순서는 시작과 끝을 어긋나게 하는 ‘각운의 중단’이다. 나의 균열을 구성하는 것은 바로 이 각운의 중단, 그리고 그 중단이 결정적인 어떤 한 순간 순서를 부여하는 이전과 이후다.(그 중단은 정확히 균열의 탄생 점이다) 자신의 고유한 근거를 전복한 시간. 이 시간은 형식적이고 텅 빈 순서에 의해 정의되며, 또한 어떤 시간의 집합과 계열에 의해 정의된다. 각운의 중단, 이전과 이후를 모두 회집하는 한에서 이런 상징적 이미지는 시간의 집합을 구성한다. 하지만 그것들을 동등하지 않게 분배하는 한에서 이 상징적 이미지는 어떤 시간의 계열을 가능하게 한다. 각운의 중단 자체를 전제하는 두 번째 시간은 변신의 현재, 행위에 필적하게 되는 동등하게-되기, 자아의 이분화이다. 그것은 행위의 이미지 안에 어떤 이상적 자아를 투사하는 시간이다. [시간의 집합은 다음을 의미한다. 즉 각운의 중단은 언제나 어떤 행위의 이미지 안에서 규정되어야 하며, 시간 전체에 부합하는 단일하고 어떤 사건의 이미지 안에서 규정되어야 한다. 이 이미지 자체는 어떤 분열된 형식을 통해 동등하지 않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현존한다. 하지만 이 이미지를 통해 일체의 시간 전체가 회집된다. 이 이미지는 동등하지 않은 부분들을 포섭하고 회집하되 동등하지 않은 것들로서 회집한다. 이 이미지는 하나의 상징이라 불려야 한다]

 

미래를 발견하는 세 번째 시간의 경우-이 시간은 사건, 행위가 자아의 일관성을 배제하는 어떤 비밀스러운 일관성을 지니고 있다. 이 일관성은 자아에 등을 돌리고 자아를 수천 조각으로 쪼개어 투사한다.(새로운 세계를 잉태한 자는 자신이 낳고 있는 파열하는 다양체에 의해 압도되고 탕진된다) 자아가 필적하게 된 것, 그것은 즉자적 비동등이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 균열된 나와 시간의 계열에 따라 분할된 자아는 바로 이런 방식을 통해 서로 상응하고 어떤 공통의 출구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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