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차이와 반복_1. 차이 그 자체 (4~7절) : 발제 +1
오라클
/ 2017-08-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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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 > 1장 차이 그 자체 > 4절 ~ 7절
∎ ‘1장 차이 그 자체’의 문제설정 2가지
첫째, 차이의 개념에 관한 것으로, ‘차이 그 자체’를 사유하는 것이다. 즉 ‘동일성’의 요청없이 어떻게 ‘차이’를 사유할 수 있을 것인가? 동일성으로 환원되는 ‘개념적 차이’가 아니라, 차이 그 자체로서 ‘본래적 차이=실재적 차이’를 사유하는 것이다. 이러한 ‘차이의 개념’은 철학사에서 ‘차이의 철학’을 검토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둘째, 차이의 철학에 관한 것으로, 철학의 역사에서 나타난 ‘차이’ 개념을 비평하는 것이다. 즉 철학의 역사에서 차이는 어떻게 사유되고 있나? 모든 철학자가 차이를 언급하고 있다고 할 때, 문제는 ‘차이’를 말하는 게 아니라 ‘어떤’ 차이를 말하는가 하는 것이다! 들뢰즈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차(상반성), 헤겔의 모순(변증법), 라이프니츠의 부차모순(미분법), 플라톤의 이데아(나눔의 방법), 니체의 영원회귀(긍정)를 통해 ‘차이의 철학’를 분석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라이프니츠를 거쳐 헤겔에 이르는 차이의 철학이 저지른 과오는, 차이(개념)를 개념적 차이(개념에 기입하는 것)와 혼동하는 것이다.” _p82
[1]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 : 종차 ‘가장 큰 차이’
①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의 철학은 ‘종차와 상반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의 철학은 ‘종차(종적 차이)’로 요약되고, 종차는 ‘상반성’을 통해 성립된다.
먼저,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차이는 종과 종 사이의 차이 ‘종차’이다. 종차로서의 차이. 종차는 동일한 유 안에서 성립하는 상반성으로서 종적 차이이다. 유와 종차에 따른 정의(definition by genus and difference) 인간은 ‘발 달린 동물’, 새는 ‘날개 달린 동물’ 같은 차이를 말한다. 아리토텔레스는 종차의 개념을 ‘가장 크면서 완전한 차이’라고 말한다. 또한 “정의란 언제나 종차를 가리킨다”고 했는데,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종차’ 개념은 생물학적 분류에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철학의 사유방식으로 사용되고 있다.
“유의 고유한 본성은 차이들을 통해 나뉜다는데 있다. 가령 ‘발 달린’과 ‘날개 달린’은 상반적인 것들로 조정되는 차이들이며, 이 차이들을 통해 동물이라는 하나의 유가 분할된다. 요컨대 완전하고 최대치에 이른 차이는 유 안에서 성립하는 ‘상반성’이고, 유 안에 성립하는 상반성은 ‘종차’이다. ······ 유적 차이는 너무 크고 상반관계들로 정리되지 않는 어떤 조합 불가능한 것들 가운데 자리한다. 개체적 차이는 너무 작고, 더 이상 상반성을 갖지 않는 분할 불가능한 것들 가운데 자리한다. 반면 종적 차이는 조화로운 개념이나 유기적 재현의 모든 요들에 그야말로 잘 부응하는 것처럼 보인다.” _p91, 92
다음, 아리스토텔레스가 종차 개념을 얻는 방법은 ‘상반성’이다. 이 상반성은 재현의 요소로서 대립의 형식에 기반한다. 재현은 동일성, 대립, 유비, 유사성이라는 4가지 측면을 지니는데, 대립은 개념 내부적 규정들의 관계 안에서 성립한다. 이러한 4중의 뿌리에 종속되는 한에서 차이는 ‘매개’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말한다. 가장 크면서도 가장 완전한 차이가 있다. 차이 일반은 (어떤 공통성도 없고, 어떤 종합도 불가능한) 상이성ㆍ이타성과 구별된다. 가장 큰 차이는 대립인데, 대립의 모든 형식 중에서 가장 완전하고 가장 완결된 형식, 잘 합치하는 형식은 ‘상반성’이다. 상반성의 장점이 완전한 차이로 이어질 수 있는 조건은 형상 안에 있는 상반성이다. 오로지 본질이나 형상 안에 있는 상반성을 통해서만 우리는 어떤 본질적인 차이 그 자체의 개념을 얻을 수 있다.” _p90, 91
② 아리스토텔레스의 차이의 철학은 ‘개념적 차이’로 비판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차로서의 차이’와 ‘상반성의 형식’은 다음과 같이 비판될 수 있다.
먼저, 종차는 ‘가장 큰 차이’가 아니라 상대적으로만 가장 큰 차이이다. 절대적으로 말하면, 모순(*헤겔)이 상반성(*아리스토텔레스)보다 더 크고 유적 차이가 종적 차이보다 더 크다.
“‘가장 큰 차이’라는 표현으로 돌아가 보자. 이제 종차가 상대적으로만 가장 큰 차이임이 분명해졌다. 절대적 관점에서 말하자면, 모순은 상반성보다 더 크다. 그리고 유적 차이는 종적 차이보다 더 크다. ······ 종차는 유들 자체에서 성립하는 더 큰 차이에 비하면 작은 차이이다. 생물학적 분류에서도 종차는 큰 유들에 비하면 아주 작아진다. 종차가 가장 크고 가장 완전한 차이지만, 단지 어떤 규정되지 않은 개념(유)의 동일성을 조건으로 할 때만 그렇다. 거꾸로 종차는 규정 가능한 궁극적인 개념들인 유들(범주들) 간의 차이와 비교할 때는 사소한 것이다.” _p93, 94, 95
다음, 종차는 개념적 차이이며, 유類라는 동일성을 전제로 하는 차이이다. 이는 상위개념으로 하위개념을 규정하는 것으로, 종種이 미리 알려진 큰 개념인 보편적인 유類에 끼워넣어지는 것이다. 호랑이-고양이의 ‘종차’에 대해 말하지만, 그 차이는 고양이과라는 동일한 ‘유’ 개념 안에서의 차이에 불과하다. 오로지 하나의 개념을 지녔다고 가정된 동일성에 의존해서만 종차가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고, 유적 개념 안에 있는 동일성의 형식에 의존해서만 차이는 대립에까지 이르고 상반성으로까지 끌려갈 수 있다. 이렇게 종차는 실재적 차이가 아니라 개념적 차이이다. 종차 개념이 제공하는 차이의 크기를 보면, 고양이와 호랑이는 작지만, 고양이와 개는 크다. 하지만 실재로는, 고양이와 개의 차이보다, 고양이와 호랑이의 차이가 더 크다. 이처럼 종차는 이는 실재적 차이에 의한 것이 아니라, 개념적 차이에 의한 차이화differenciation(구별ㆍ분화)이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차이를 상이성ㆍ이타성과 구별하는 방식은 다음과 같은 길을 가리키고 있다. 오로지 하나의 개념이 지녔다고 가정된 동일성에 의존해서만 종차가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게다가 바로 유적 개념 안에 있는 동일성의 형식에 의존해서만 차이는 대립에까지 이르고 상반성으로까지 끌려갈 수 있다. 따라서 종차는 결코 차이의 모든 독특성과 전환점들에 대한 어떤 보편적 개념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차이가 오직 개념 일반과 화해하는 어떤 특수한 국면을 지시할 뿐이다. 따라서 아리스토텔레스에게서 차이의 차이는 거짓된 운반에 지나지 않는다. 종차는 단지 전적으로 상대적인 의미의 최대치를 지칭할 뿐이다.” _p93, 94
결국,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차는 차이의 개념과 개념적 차이를 혼동하고 있다. “모든 차이를 파멸로 몰고 간 혼동의 원리는 바로 여기에 있다. 즉 차이의 고유한 개념을 설정한다는 것이, 차이를 개념 일반에 기입하는 것으로 뒤바뀐다. 차이의 개념을 규정한다는 것이, 차이를 규정되지 않은 개념의 동일성 안에 기입하는 것으로 뒤바뀐다. 차이는 이제 개념의 내포 안에 있는 하나의 술어에 지나지 않는다.” _p94
[2] 헤겔의 차이 : 모순 ‘무한히 큰 차이’
① 헤겔의 차이의 철학은 ‘모순 / 변증법 / 절대정신’으로 요약될 수 있다.
헤겔의 차이의 철학은 ‘모순’으로 요약되고, 모순은 ‘변증법’을 통해 ‘절대정신’으로 나아간다.
먼저, 헤겔에게 차이는 대립물과 대립물 사이의 차이 ‘모순’이다. 모순으로서의 차이. 헤겔에 따르면, 모든 것은 대립물의 통일로서 ‘모순’을 포함한다. 즉 “사물은 자신이 아닌 것을 부정한다.” _p131. 주인-노예, 자본-노동처럼 하나의 개념이나 대상에 대립물이 통일되어있는 것을 ‘모순’이라고 정의한다. 가령 주인과 노예는 서로 대립되는 존재인데, 주인이란 개념 안에는 노예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고 노예라는 개념에도 주인이라는 개념이 포함되어 있다. 주인이나 노예는 상대방에 의해 대립물에 의해 자기규정을 얻게 된다. 이처럼 모든 것은 자신이 정의 안에 그것과 대립되는 것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것을 통해 비로소 존재하게 된다. 헤겔은 대립물과 대립물 사이의 차이(모순)를 ‘무한히 큰 차이’라고 말한다.
“헤겔은 그의 선배들을 차이의 절대적 최대치(모순의 무한=무한하게 큰 것으로서의 무한)에 이르지 못한 채 상대적인 최대치에 머물렀다고 비난한다. “차이 일반은 이미 모순 그 자체이다. 오로지 모순의 정점까지 이끌려갈 때만 비로소 이형이나 다형은 잠에서 깨어나고 활력을 얻는다. 또 그럴 때만 변화의 부분을 이루는 사물들이 부정성을 취하게 된다. 이 부정성은 자율적이고 자발적이며 살아있는 운동의 내재적 충동이다.” _p120, 121
다음, 헤겔의 모순은 변증법적 운동을 통해 전개되고 절대정신으로 실현된다. 모순의 운동은 정립-반정립(자기 부정)-종합(부정의 부정)의 변증법적 과정으로 전개된다. 이러한 모순은 모든 변화의 근본적인 원동력인데, 모순을 통해 현실의 변화를 포착하는 방법을 ‘변증법’이라고 한다. 그리고 변증법적 운동은 ‘절대정신’으로 실현된다. 즉 자기 내부의 모순이 대립을 낳고 그것을 지양함으로써 더 높은 차원으로 나아가는 변증법적 운동은 절대정신의 전개과정이다. 절대정신은 세계와 역사를 품 안에 담고 있는 이성이다. 절대정신이 스스로 외화하여 세계를 만들고, 세계의 역사는 절대정신이 실현되고 완성되어 가는 과정이 된다.
② 헤겔의 차이의 철학은 ‘차이를 먹어치우는 동일성’으로 비판될 수 있다.
헤겔의 ‘모순으로서의 차이’와 ‘변증법적 운동’은 다음과 같이 비판될 수 있다.
먼저, 헤겔의 모순은 차이를 해소한다. 대립물의 통일로서 모순은 정-반-합의 변증법적 전개를 통해 스스로 해소되고, 이렇게 스스로 해소되는 모순은 차이를 해소한다. 헤겔의 모순은 대립물(차이)의 화해ㆍ통일로서 종합(동일성=절대정신)이 예정된 것이다. 즉 헤겔의 차이(대립물)는 동일성을 ‘지향’하며, 동일성(종합)은 차이를 ‘지양’한다.
“헤겔에 따르면 ‘모순’은 거의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듯하다. 모순은 스스로 해소되고, 스스로 해소되는 모순은 차이를 근거와 관계짓는 가운데 해소해버린다. 차이가 유일한 문제이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헤겔은 극단적이거나 상반적인 것들의 대립을 통해 차이를 규정한다. ······ 모순 안에서 차이는 부정성으로 규정된다. ······ 헤겔에게 무한은 대립이나 유한한 규정을 통해 언명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은 여전히 신학이 말하는 ‘무한하게 큰 것, 자신보다 더 큰 것이 없는 실재’라고 할 때의 무한하게 큰 것이다.” p120, 121
다음, 헤겔의 변증법은 어떤 개념(절대정신)을 재현하는 거짓운동이다. 변증법의 과정은 절대정신이라는 추상적 개념의 운동이며, 이 운동 안에 절대정신이라는 매개를 도입하기 위해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인 것을 배반했다. 그런 의미에서 변증법은 ‘차이를 먹어치우는 동일성’의 전개과정이다.
“니체와 키에르케고르가 문제삼고 있는 것은 ‘운동’이다. 이들이 헤겔을 비난하는 것은 그가 거짓 운동, 추상적인 논리적 운동, 다시 말해 ‘매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_p41 ······ 헤겔은 피지스와 프시케의 운동 대신 추상적 개념의 운동을 끌어들이는 작자라고 욕먹고 있다. 헤겔은 이념 안에서 독특한 것과 보편적인 것이 맺는 진정한 관계를 일반적인 개념과 특수한 것 사이에서 성립하는 추상적 관계로 대체한다. 그러므로 헤겔은 ‘재현’의 반성적 지반에, 단순한 일반성에 머물러 있다. 헤겔은 이념들을 드라마로 극화하는 대신 어떤 개념들을 재현한다. 어떤 거짓 연극, 거짓 드라마, 거짓 운동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이다. 헤겔이 변증법적 토대를 이런 몰이해에 두고 운동(자신의 고유한 사유의 운동일 뿐이며, 이 사유의 일반성들의 운동일 뿐인 운동) 안에 매개를 도입하기 위해, 얼마만큼이나 직접적이고 무매개적인 것을 배반하고 훼손했는지 직시할 필요가 있다. _p44 ······ 헤겔은 운동을 만들며, 무한자의 운동까지도 만들었다. 그러나 말과 재현들을 통해 만들었기 때문에 그 운동은 거짓 운동이며, 그것으로부터는 아무것도 따라나오지 않는다. p135 ······ 무한한 재현을 가능하게 하는 법칙은 동일성의 형식인 개념의 형식에 있다. 재현이라는 때로는 접두사 재(再, RE-)는 차이를 잡아먹는 이 동일자의 개념적 형식을 뜻한다. _p144”
[3] 라이프니츠의 차이 : 부차모순 ‘무한히 작은 차이’
① 라이프니츠의 차이의 철학은 ‘부차모순 / 미분법 / 모나드’으로 요약될 수 있다.
라이프니츠의 차이의 철학은 ‘부차모순’으로 요약되고, 부차모순은 ‘미분법’을 통해 ‘모나드’로 형상화된다.
먼저, 라이프니츠에게 차이는 dx와 x(미분적 관계)의 사이의 차이 ‘부차모순’이다. 부차모순으로서의 차이. 부차모순은 x와 이것에 수렴하는 dx 사이에 존재하는 ‘무한히 작은 차이’이다. 따라서 이 차이는 부차적이며 비본질적이다. 부차모순은 본질적인 것을 부수적인 속성 안에 포함하고, 본질들의 구별을 유지하는 무한소의 절차를 말한다.
“라이프니츠는 현상들에 관한한 비본질적인 것(운동, 동등하지 않는 것, 차이나는 것)에서 출발한다. 이제 비본질적인 것이 무한하게 작은 것에 힘입어 종으로, 유로 정립되고, 이런 자격에서 ‘대립해 있는 유사 종’이 되기에 이른다. 이는 본질적인 것이 타자를 본질 안에 포함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부수적인 속성 안에, 개별적인 경우 안에 포함하고 있을 뿐임을 의미한다. ······ ‘경우’에 의한 포섭이나 부수적인 속성들의 언어는 자신만의 고유한 독창성을 갖는다. 본질들의 구별을 유지하는 (하나가 다른 하나에 대해 비본질적인 것의 역할을 떠맡고 있는 한에서 그 구별을 유지하는) 이런 무한소의 절차는 모순과는 완전히 다르다. 그것은 ‘부차모순’이라는 특수한 이름으로 불러야 마땅하다. (*부차모순은 라이프니츠의 차이의 특성을 표현하기 위한 들뢰즈의 신조어로, 헤겔의 모순에 대립하는 뜻을 담고 있다.) 부차모순은 오로지 부수적 속성들에만 관계한다.” _p123, 124
다음, 라이프니츠의 부차모순은 미분법을 통해 얻어지고 모나드로 형상화된다. 부차모순의 운동은 무한히 작은 차이로 수렴하는 미분적 과정-무한소의 절차로 전개된다. 이러한 미분적 운동이 미분법인데, ‘모나드’로 형상화된다. [모나드]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세계는 모나드라는 가장 단순한 실체로 구성되어 있다. 라이프니츠의 실체란, 모든 개체, 어떤 조그만 차이에 의해서 구별되는 모든 개체이다. 즉 “사물은 자신이 아닌 모든 것과 구별된다.” _p131. 따라서 세상에는 무한히 많은 실체들로 가득 차 있다. 세상에 똑같은 두 장의 나뭇잎이 없다면 모든 개체가 다 실체이다. 모나드는 분할 불가능한 가장 단순한 실체이며, 무한소의 크기를 갖는 미분적인 실체이다. ‘무한히 작은 차이’ 자체가 모나드의 실체이다. [식별불가능성-개체화의 원리] 두 장의 나뭇잎-두 개의 먼지-두 개의 돌멩이도 다른 실체인데, 다른 술어를 가질 수 있는 한에서 그렇다. 다른 술어로 구별할 수 없다면 동일한 것인데, 이것을 ‘식별 불가능한 것의 동일성’이라고 한다. [예정조화설] 무한소의 크기를 갖는 모나드를 무한히 많은 수로 덩어리를 만들면 실제적인 크기를 갖는 물질적 질료가 생긴다. 이렇게 원초적인 모나드가 모여 하나의 신체를 이룰 수 있는 것은, 신이 창조의 순간에 조화를 이루며 작동할 수 있도록 해 두었기 때문인데, 이를 ‘예정조화설’이라고 한다.
“미분법은 변증법 못지 않게 ‘역량’의 문제이다. 유한한 재현을 제한하는 경계선을 큼과 작음이라는 수학적이고 추상적인 두 규정으로 취급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때 라이프니츠는 (헤겔과 마찬가지로) 규정되는 것이(미분량이) 큰 것인지 작은 것인지, 가장 큰 것인지 가장 작은 것인지의 여부에 전적으로 무관심하다. 무한을 고려하게 되면, 규정되는 것은 그런 물음과는 상관이 없는 것이 되어버린다. _p117 ······ 모나드들 각각은 세계의 총체성을 표현한다. 하지만 특정한 미분적 관계를 통해, 그 관계에 대응하는 특정한 특이점 주위에서 표현한다. _p126 ······ 식별 불가능자의 원리에 따르면 개념마다 오직 하나의 사물만이 상응한다. 이 원리는 차이를 개념적 차이로 풀이하거나 재현이 전개되는 과정을 매개과정으로 풀이한다. _p48”
② 라이프니츠의 차이의 철학은 ‘부정으로서의 차이’로 비판될 수 있다.
라이프니츠의 부차모순으로서의 차이와 미분적 운동은 다음과 같이 비판될 수 있다.
부차모순은 가장 단순한 실체인 모나드를 개체화하는 속성이다. 이러한 부차모순은 식별 불가능자의 동일성 원리에 기초해 있다. “식별 불가능한 것은 차이가 없고, 차이가 있는 것이라면 식별 가능하다.” 두 대상이 식별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 두 대상이 지니고 있는 모든 속성이 정확히 같다는 것이다. 두 사물이 서로 다른 개체라면 그것들을 서로 다른 개체로 만드는 것은, ‘다른 것에 속하지 않는 어떤 고유성property’이다. 이 고유성이 어떤 것을 개체화하는 요인이다. 즉 개체화를 정의하는 차이가 부정(다른 것에 속하지 않는, ~이 아닌)으로 규정되고 있다. 또한 이 차이는 식별 불가능한 어떤 개체의 동일성을 정의하는데 복부하는 동일성에 복속된 부정적 개념으로서의 차이이다.
“ ‘무한히 작은 차이’라는 표현은 직관에 대해 차이가 소멸해버림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직관은 미분비 앞에서 소멸한다. _p124 ······ 차이는 부정적인 어떤 것 안에서 자신의 개념을 발견한다. _p125 ······ 연속성의 법칙과 식별 불가능자들의 원리는 모두 차이(무한하게 작은 동시에 유한한 차이)를 근거로 충족이유에 관계 짓는다. 이 두 가지 방식을 통해 망아적 재현은 규정을 매개하고, 그 규정을 차이의 개념으로 만든다. _p128 ······ 라이프니츠가 범한 유일한 잘못은 오직 차이를 부정적 제한에 묶어놓았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닐까? 왜냐하면 낡은 원리의 지배를 유지시켰고, 계열들을 어떤 수렴의 조건에 묶어두었기 때문이다. _p134”
∎ 유기적-망아적 재현 / 유한한-무한한 재현
먼저, 재현의 내용형식에 있어 - 유기적 재현 vs 망아적 재현 : 유기적 재현은 형상을 재현하고 유기적 질서를 재현하는 것이라면, 망아적 재현은 탈유기적이고 유기적 질서를 넘어서는 것이다. (*망아적은 자신을 잃어버림, 유기체의 부분으로서 자신을 망각함을 뜻한다. 망아적 재현은 디오니소스 축제의 통음난무(무아-몰아) 상태를 가리키는 들뢰즈의 신조어. 유기적 재현과 망아적 재현은 각각 들뢰즈의 유기체의 기관과 기관없는 신체에 조응한다.)
다음, 재현의 표현형식에 있어 - 유한한 재현 vs 무한한 재현 : 유한한 재현이 큼과 작음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라면, 무한한 재현은 큼과 작음의 극단적인 형상인 무한소와 무한대를 근거로 한다. 유한한 재현이 동일성을 유類로 파악한다면, 무한한 재현은 동일성을 무한하고 순수한 원리로 파악한다. 유한한 재현이 개념 일반의 권리범위를 한정한다면, 무한한 재현은 개념 일반의 권리범위를 전체로 확대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차가 유기적 재현에 속한다면, 헤겔의 모순과 라이프니츠의 부차모순은 망아적 재현에 속한다. 또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차가 유한한 재현에 속한다면, 헤겔의 모순과 라이프니츠의 부차모순은 무한한 재현에 속한다.
“자기 자신 안에서 무한을 발견할 때, 재현은 더 이상 유기적 재현이 아니라, 망아적 재현의 모습을 취한다. 즉 재현은 자신 안에서 표면성의 고요함이나 유기적 질서의 한계들 아래 숨쉬고 있는 소란, 불안, 정념 등을 발견한다. 재현은 다시 괴물과 마주친다. ······ 이제 개념은 전체이다. 전체로서 개념은 규정을 따라다니면서 규정과 더불어 짝을 이룬다. 그 규정을 근거의 자리에 놓는 가운데, 순수한 차이로 재현한다. 이 근거가 중심이 될 때, 상대적 최소나 최대는 중요하지 않다. 왜냐하면 양쪽 모두 근거 안에서 일치하기 때문이다.” _p116
“유한한 재현은 질료를 포괄하고 있는 어떤 형상의 재현이다. 유한한 재현은 차이를 재현하되 매개하고, 유라는 동일성을 종속시킨다. 그리고 유들 자체의 유비 안에서, 규정들의 논리적 대립 안에서, 질료적인 내용들의 유사성 안에서 이런 종속을 공고히 한다. 하지만 무한한 재현의 경우 전체를 포괄하는데, 일차적인 질료인 바탕, 그리고 주어, 자아, 절대적 형상(*절대정신, 모나드)인 본질을 모두 포함한다. 무한한 재현은 본질, 바탕 그리고 그 둘 간의 차이를 동시에 근거나 충족이유에 관계짓는다. 여기서 매가 자체가 근거가 되었다.” _p129
구 분 | 개 념 | 예 시 |
유기적 재현 | 유기적 질서를 재현하는, 형상의 재현 (cf. 유기체의 기관) | -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차 |
망아적 재현 | 유기적 질서를 넘어서는. 탈-유기적 (cf. 기관없는 신체) | - 헤겔의 모순 (무한대) - 라이프니츠의 부차모순 (무한소) |
유한한 재현
| 1. 큼과 작음을 기준으로 함. 2. 동일성을 유로 파악함. 3. 개념 일반의 권리범위를 한정함. 4. 차이를 재현하되 매개하고, 차이를 유라는 동일성에 종속시킨다. | - 아리스토텔레스의 종차 |
무한한 재현 (망아적 재현)
| 1. 무한대와 무한소를 근거로 함. 2. 동일성은 무한하고 순수한 원리로 파악함. 3. 개념 일반의 권리범위를 전체로 확대함 4. 전체를 포괄. (바탕-주어-자아-본질을 포함) 매개 자체가 근거가 됨 | - 헤겔의 모순 (무한대) 본질에 대한 담론 - 라이프니츠의 부차모순 (무한소) 부수적 속성에 대한 담론 |
[4] 플라톤의 동일성 : 이데아 ‘완전성’
① 플라톤의 차이의 철학은 ‘이데아 / 나눔’로 요약될 수 있다.
플라톤의 차이의 철학은 ‘나눔의 방법’로 요약되고, ‘나눔’을 통해 이데아로 상승한다.
먼저, 플라톤의 철학은 완전한 세계인 ‘이데아’가 있고 실제 세계는 이데아의 그림자이며, 인간의 인식은 그림자인 감각세계에서 이데아세계로 상승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데아는 세계를 재현의 요구들에 종속시키는 개념이 아니라, 생생한 현전이다. 이 현전은 사물들 안의 ‘재현 불가능한’ 것에 의존해서만 이 세상 안으로 환기될 수 있다.” _p150
다음, 이데아의 완전성을 근거로 사물을 구별하는 방법이 ‘나눔’이다. 가짜 연인과 진짜 연인을 선별하고, 참된 지망자와 참된 참여자를 규정하는 방법이다. 그런데 이 나눔의 방법은 플라톤주의와 플라톤주의의 전복 가능성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 한편 나눔의 방법이 갖는 플라톤주의적 성격은 ‘이데아(동일자)’를 근거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한편 나눔의 방법이 갖는 플라톤주의의 전복 가능성은 ‘선별’을 통해 차이를 만든다는 것이다.
“이데아는 차이의 순수한 개념을 찾는 것을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 차이의 변증술은 차이에 고유한 방법(나눔)을 지니고 있다. 이 방법은 매개 없이 진행되는 무매개적 절차이고, 이데아의 영감들에 의존한다. 개념 안에 가정된 동일성에 비교하면, 나눔은 변덕스럽고 일관되지 못한 절차이다. 하나의 독특성에서 다른 하나의 독특성으로 도약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데아의 관점에서 볼 때, 나눔의 방법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닐까? 나눔의 방법은 진정한 차이의 철학에 유리하게 작용하는 모든 변증술적 역량을 집약하는 기법, 그래서 플라톤주의와 플라톤주의의 전복 가능성을 동시에 가늠하는 기법이 아닐까?” _p150, 151
② 플라톤의 차이의 철학은 ‘동일성에 대한 차이의 종속’으로 비판될 수 있다.
먼저, 플라톤의 ‘나눔’은 신화를 매개로 하여 근거(이데아)를 등장시킨다. 나눔의 방법은 종별화의 한계를 넘어서지만 신화를 매개로 끌어들임으로써, 동일성에 봉사하게 된다.
“플라톤의 나눔은 종별화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자신의 진정한 목적(*차이를 만드는 선별)을 발견하게 되지만, 그 순간 목적을 포기하고 단순한 신화적 ‘유희’로 뒤바뀐다. ······ 나눔은 매개를 결여하고 있으므로 설득력이 없고, 그래서 자신의 임무(*차이를 만드는 선별)를 신화에 넘겨주어야 했다. 신화는 상상적 형태로 나눔의 방법에 매개의 등가물을 제공한다. ······ 신화 안에서는 차이를 만드는 데 적합한 근거, 역할이나 지망자들을 측정하는 데 적합한 근거가 등장한다." _p155, 156
다음, 플라톤의 철학은 동일성에 대한 차이의 종속을 대변한다. 이데아가 완전성(올바름)을 1차적으로 소유하는 근거에 자리를 차지하면, 나눔을 통해 선별된 자들은 근거를 분유하는 2차적, 3차적, 4차적, 허상의 자리에 자리하게 된다. 나눔으로 선별된 차이는 곧 동일성을 근거로 하는 위계의 서열이 된다. 이렇게 플라톤은 이데아(근거) ······ 모상(본뜬 상) ······ 허상(헛된 상)의 방식으로 존재의 위계를 설정한다. 《소피스테스》에서 플라톤은 허상(시뮬라크르) ‘인식의 그물에도 걸리지 않고, 위계에 구조에도 빠져나가는 것’에 주목했는데, 그것이야 말로 플라톤주의를 전복하는 플라톤주의이다.
“플라톤주의는 일자, 유비, 유사성, 부정성의 역량에 대한 종속을 대변한다. _p150 ······ 플라톤주의는 ‘사물 자체’와 허상들 사이에 어떤 구별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플라톤주의는 차이를 그 자체로 사유하지 않는다. 그 대신 차이를 이미 어떤 근거에 관련 짓고 같음의 사태에 종속시키며, 또 신화적 형식을 통해 매개를 도입한다. 플라톤주의를 전복한다는 것은 모사에 대한 원본의 우위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에 대한 원형의 우위를 부인하는 것이며, 허상(시뮬라크르와 반영들의 지배를 찬양한다는 것이다. _p162”
“플라톤이 생각했던 변증술의 최고목적은 ‘차이를 만든다’는 데 있다. 그러나 사물과 허상들, 원형과 모상들 사이에는 차이가 없다! 사물은 허상 자체이고, 허상은 우월한 형상이다. 모든 사물에게 어려운 일이 있다면 자신의 고유한 허상에 도달하는 것, 영원회귀의 일관성 안에서 기호의 상태에 도달하는 것이다. 플리톤은 영원회귀를 카오스에 대립시켰다. 마치 카오스가 모순적 상태이고 바깥으로부터 어떤 질서나 법칙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처럼 생각했기 때문이다. _p164 ······ 소피스트는 모순의 존재자(비-존재자)가 아니라, 모든 사물들을 허상의 상태로 끌고가는 자, 허상의 상태 안에서 사물들 전체를 운반하는 자이다. 플라톤은 그런 반어를 그런 지점까지 밀어붙여야 했다! _p165”
[5] 니체의 차이 : 영원회귀 ‘선별로서의 차이’
니체의 차이의 철학은 영원회귀(차이를 만드는 방법)와 긍정(차이를 만드는 힘ㆍ의지)으로 요약된다.
니체의 차이는 진정한 분유자의 선별 ‘선별로서의 차이’이다.
① 먼저, 영원회귀는 ‘차이의 반복’을 의미한다.
영원회귀는 ‘차이의 반복’을 의미하고, 이것은 ‘차이를 만드는 방법’이다. 영원회귀는 ‘영원히 돌아온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영원히 돌아오는가?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에서 니체는 영원회귀를 신들의 주사위 놀이에 비유했는데, 세상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 신들의 탁자’라는 것이다. 신들의 주사위 놀이처럼, 니체는 세계는 필연(법칙, 동일성)이 아니라 우연(차이)에 의해 지배되고, 따라서 영원히 돌아오는 것은 동일성이 아니라 차이라고 보았다. 생성의 반복, 차이의 반복. 영원회귀 안에는 영원한 생성만 있고 그것은 우연에 의해 일어난다. 영원회귀 안에서 동일한 것은 영원히 되돌아온다는 사실밖에는 없다. 영원회귀 안에 하나의 필연성이 있다면 우연이 세상을 움직인다는 것이다. 이런 방식으로 영원회귀는 차이를 만들어낸다.
“그런 게 생이었던가? 좋아, 그렇다면 다시 한번! ······ 이제 그대들 스스로 그 노래를 부르도록 하라. ‘다시 한번’이라는 제목의 노래. ‘모든 영원 속으로’라는 내용의 노래를. 차라투스트라의 윤가를 부르도록 하라” 《차라투스트라~》 환영과 수수께끼에 대하여, 몽중 보행자의 노래
“참된 선별의 운영은 영원회귀의 소관이다. 왜냐하면 영원회귀는 평균적 형상들을 배제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의 우월한 형상’을 끄집어내기 때문이다. 극단성은 상반적인 것들의 동일성이 아니라, 오히려 차이남의 일의성일 뿐이다. 우월한 형상은 무한한 형상이 아니라, 오히려 영원회귀의 비형상, 변신과 변형들을 거쳐가는 영원한 비형상일 뿐이다. 영원회귀는 차이를 ‘만든다’. 왜냐하면 우월하고 월등한 형식을 창조하기 때문이다.” _p141
“영원회귀는 2차적으로 출현하거나 이후에 오는 것이 아니라, 모든 변신들 안에 현전하고 있으며 자신이 되돌아오게 만드는 것과 동시적이다. 영원회귀가 관계하는 세계에서 차이들은 서로를 함축하고 있다. 서로의 안으로 주럼을 접어넣고 있는 것이다. 온-주름운동에 놓여있는 이 복잡한 세계는 동일성이 없고 말 그대로 카오스이다. 니체는 카오스와 영원회가가 서로 구별되는 사태가 아님을, 하나의 똑같은 긍정임을 말했다. 세계는 재현 안에서처럼 유한한 것도 아니고 무한한 것도 아니다. 세계는 완성되어 있고 무제약적이다. 영원회귀는 완성된 세계 자체의 무제약성이다. 그것은 차이를 통해 언명되는 일의적 존재이다. 영원회귀 아에서 카오스-유랑은 재현의 일관성에 대립한다. 또한 영원회귀의 원환, (동일자와 모순적인 것의 원환을 무너뜨리는) 차이와 반복의 원환은 일그러진 원환이다. 차이나는 것을 통해서만 같음을 언명한다.” _P147
“영원회귀는 각각의 사물이 오로지 되돌아오는 가운데 실존할 수 있다는 것을 뜻한다. 영원회귀는 사물이 무한히 많은 모사들의 모사이고, 때문에 원본도, 심지어 기원조차 계속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이유에서 영원회귀는 ‘패러디’의 성격을 띠고 있다. 영원회귀는 자신이 존재하게(되돌아오게) 만드는 것에 허상이라는 자격을 부여한다. 영원회귀가 존재(비형상적인 것)의 역량일 때, 허상은 존재하는 것(존재자)의 참된 특성(형상)이다. 사물들의 동일성이 와해될 때, 존재는 거기서 빠져나와 일의성에 도달하며, 차이나는 것 주위를 맴돌기 시작한다.” _p163
② 다음, 긍정은 ‘차이의 긍정’을 의미한다.
긍정은 ‘차이에 대한 긍정’을 의미하고, 이것은 ‘차이를 만드는 힘’이다. 헤겔에게 긍정과 부정은 대립된 개념이지만, 니체에게 긍정은 부정과 대립된 개념이 아니다. 오히려 긍정은 ‘부정조차 긍정’하는 긍정이다. 즉 새로운 사원을 건설하려는 자는 낡은 사원을 부술 수밖에 없다. 새로운 삶을 조각하고자 하는 자는 낡은 삶을 지워낼 수밖에 없다. 이처럼 긍정은 자기 안에 부정을 갖는다. 긍정 안에는 ‘네와 아니오’가 모두 들어있다. 긍정 안에 있는 부정과 긍정 밖에 있는 부정은 전혀 다른데, 긍정 안에 있는 부정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다. 들뢰즈는 니체가 말하는 긍정과 부정 사이에 독특한 위계가 있다고 말한다. 긍정은 부정조차 긍정하지만, 부정은 긍정을 부정한다. 따라서 긍정은 부정을 포함하지만, 부정은 긍정을 포함하지 못한다. 차이의 테제는 자신의 직접성 안에, 그 자체로 참된 운동을 만들어내는 자신의 차이 속에 존속한다. 이런 방식으로 긍정의 힘은 차이를 만들어낸다.
“어린아이는 순진무구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제 힘으로 돌아가는 바퀴이며 최초의 운동이자 거룩한 긍정이다. 창조의 놀이를 위해서는 거룩한 긍정이 필요하다. 정신은 이제 자기 자신의 의지를 의욕하며, 세계를 상실한 자는 자신의 세계를 획득한다.” 《차라투스트라~》 서문
“차이는 대립을 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대립이 차이를 가정한다. 즉자적 차이 그 자체는 ‘이미’ 모순이 아닐 뿐만 아니라 모순으로 환원되거나 소급되지 않는다.” _p134
“차이의 철학이 거부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모든 규정은 부정’이라는 명제이다. 여기서는 무한한 재현의 일반적 양자택일이 거부된다. 이 양자택일의 한쪽에는 규정되지 않은 것, 무차별하거나 무관심한 것, 분화되지 않은 것이 있다. 다른 한쪽에는 어떤 차이가 있는데 그것은 이미 부정으로 규정된 차이, 부정적인 것을 함축하고 봉인하고 있는 차이이다. 이를 통하여 특수한 양자택일 역시 거부된다. 여기서 선택지는 제한의 부정성(*라이프니츠)과 대립의 부정성(*헤겔)이다. 차이는 본질적으로 긍정의 대상, 긍정 자체이다. 긍정은 본질적으로 그 자체가 차이다.” _p1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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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컴퓨터에 문제가 좀 생겨서... 발제문 업로드가 늦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