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진실의 용기> 5강 6강 발제
아침
/ 2017-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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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용기> 5강, 6강 아침
푸코는 윤리적 파레지아의 토대를 연구하기 위해 두 개의 텍스트를 제시한다. 첫 번째는 텍스트는 ‘변론’ 이고 두 번째 텍스트는 ‘파이돈’이다. 먼저 ‘변론’을 살펴 보자. ‘변론’은 사법적인 유형의 담론이기 때문에 자기 방어를 목적으로 한다. “내 반대자들은 노련한 연설가이지만, 나는 똑바로 어떤 기술이나 꾸밈없이 직설적으로 말합니다” “그들로 인해, 나는 내 자신이 누구인지 거의 기억 하지 못 할 뻔 했습니다” 이글에서 두 가지를 보여준다. 그들의 숙련되고 노련한 연설은 듣는 이의 자기 자신을 잊도록 한다면 파레지아의 말하기는 어떤 기술이 필요하지 않는 직설적이며 이것은 듣는 이의 자기 자신의 진실로 이끄는 것이다.
푸코는 솔론의 예를 들면서, 소크라테스는 솔론 같은 역할, 즉 대중 앞에 나서서 공적으로 진실을 말하는 역할을 자기 것으로 여기지 않았는가?에 대하여 설명한다.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경험과 삶으로부터 누군가 민주주의적 게임(혹은 전제주의든 과두정치든)안에서 진실을 말하고자 할 때, 죽음을 무릅쓸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에 때문에 진실말하기를 하지 않았을까? 파레지아가 위험하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소크라테스가 파레지아의 위험에 직면해서 용기를 가졌다.(예, 시신들을 회수해 오는 데 실패한 아테네 장군들에 대한 재판의 소크라테스. 30인 과두정치 하에서 피로 얼룩졌던 시기의 소크라테스) 푸코는 소크라테스가 정치에서 물러선 것은 죽음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 이런 위험들 때문에 그가 정치에 참여해서 죽었다면 그 자신과 아테네 사람들에게 유익함을 줄수 없을 것이다고 설명한다. 즉 소크라테스가 정치적 형태로 진실-말하기를 실천하지 않은 이유는 자기 자신과 아테네 사람들과의 관계 때문이다. 그러한 유익한 관계가 정치시스템 안에서의 진실에 따르는 위험 때문에 그가 정치적 형식으로 진실을 말하지 않게 만든 것이다.
푸코는 소크라테스가 죽지 않고 돌봄으로써 기능해진 이 다른 종류의 진실-말하기를 설명한다. 첫 번째는 신들과의 관계, 예언과의 관계에 기반한다. 소크라테스는 신이 말한 것을 예언자들처럼 믿고 해독한 것이 아니라, 탐색을 했다. 소크라테스가 착수한 탐색은 신탁이 진실을 말했는지 확인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즉 신탁이 말한 것을 테스트하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예언적 진실-말하기를 진실의 영역으로 이동시킨 것이다. 두 번째는 소크라테스는 진실검증을 수행하는 형식은 도시 전체를 돌아다니며 개인과 시민들을 만나며 진행한다. 이 조사하는 방법은 영혼을 테스트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영혼 탐색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영혼의 진실이다. 결과적으로 진실-말하기는 지혜의 진실-말하기(현자)와 다르다는 것을 보여준다. 세 번째,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진실-말하기와 기술적인 지식을 가진 자(교사)의 진실-말하기의 차이를 밝힌다. 소크라테스는 위험도 없이 편안하게 자기가 아는 것을 전달하는 교사와 다르다고 한다. 그가 행한 것은 사람들에게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 알지 못하다는 것을, 그래서 그들은 자기 자신을 돌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용기있게 알리는 일이다.(소크라테스의 진실-말하기는 제테시스-탐색하기, 이그제타시스-영혼의 시험, 에피멜레아아-자기 돌봄 이다)
소크라테스의 사명의 목표는 끊임없이 타인들을 살피는 것, 그들이 자기 자신을 돌보도록 하기 위해서 그들의 아버지나 형처럼 그들을 돌보는 것이다. 그들의 이성, 진실, 영혼을 돌보도록 독려하는 것이다. 각 개인이 그들 영혼의 존재에 근거한 진실과 관계 맺는 이성적 존재로서 그들 자신을 돌보게끔 살피는 것이다. 그 속에서 윤리학의 축 위에 있는 파레지아를 볼 수 있다. 새로운 형태의 파레지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개인의 품행이 자기 영혼의 존재와 일치하여 합리적 품행으로 정의될 수 있게 하는 원칙으로서 에토스를 확립하는 것이다. 소크라테스의 진리에 대한 용기는 영혼의 검증을 통해 이뤄질 비정치적 파레지아의 형태로 실행되어야 한다. 그것은 윤리적 파레지아 이다. 철학은 용기있는 진실-말하기로써, 비정치적 파레지아로써, 그러나 나라의 유용성과 본질적 관계를 간직한 것으로써, 돌봄과 관심의 거대한 연쇄라 부를 수 있는 것을 통해 전개 될 것이다. 진실-말하기는 그들이 그들 자신에게, 그들의 프로네시스(이성) 그들의 알레테이아(진실) 그들의 프시케(영혼)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으로 이끈다.
푸코는 텍스트 ‘파이돈’의 마지막 구절의 해석을 설명한다. “크리톤, 나는 아스클레피우스에게 닭 한 마리를 빚졌네. 내 빛을 갚아 주게. 잊지 말게” 아스클레피우스에게 감사할 것은 무엇인가? 치유된 그 질병은 무엇일까?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탈출을 돕겠다고 제안하며 몇가지 근거를 소크라테스에게 말한다. 이때 소크라테스는 “우리는 모든 사람의 판단을 고려해야 할까?” 푸코는 온갖 사람들의 의견을 전부‘신경 써서는’ 안 되며,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이 무엇인지 결정할 수 있는 것에 신경써야 한다고 말한다. 소크라테스는 이것을 진실이라고 불렀다. 정당한 것과 부당한 것을 결정하는 것이 진실이다. 푸코는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신경 쓰길 원하고, 돌보고, 파괴되거나 변질되는 것을 피하고 싶다면, 진실을 따라야 한다고 말한다. 즉 진실을 따름으로써, 군중의 의견에 휩쓸려 생기는 영혼의 훼손, 파손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러므로 푸코는 아스클레피우스에게 수탉으로 감사를 드려야 할 그 치유된 질병을, 크리톤이 소크라테스와 대화하면서 치유된 질병이라고 추측한다. ‘파이돈’에서는 실제로 치유가 이루어졌으며, 소크라테스는 그릇된 의견으로 이루어진 질병을 치료했다. 로고스에 위한 치유라는 관념, 그릇된 의견은 영혼의 질병이라는 관념을 볼 수 있다. 소크라테스가 생의 마지막에 도달하지 않는 한, 그릇된 견해로부터 영향을 받고, 영혼이 타락하는 것을 지켜볼 위험은 존재한다. 이것이 바로 크리톤이 병에서 치료가 되었을 때 그에 대한 감사의 희생제의가 소크라테스의 이름으로도 치러져야 하는 이유이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관련된 전체 사이클, ‘변론’에서 시작해서 ‘크리톤’을 거쳐, ‘파이돈’에서 끝나는 이 사이클에 에피멜레이아의 주제가 관통하고 있다. 소크라테스는 그의 자녀들, 그의 제자들, 그의 친구들에게 전할 마지막 소망은 무엇일까? “너 자신을 돌보아라” 이것이 소크라테스의 유언, 그의 마지막 소원이다. 다른 사람들에게 소크라테스 자신이 자기를 돌보듯이 그들 스스로를 돌보라고 인도한 그의 노력, 이 모든 것들이 앙상블을 이루고 있으며 그 실타래는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관한 연쇄 ‘변론’ ‘크리톤’ ‘파에돈’를 가로 질러 서로 엮이고 있다. 진실-말하기의 형식은 철학담론에 공유한 것으로, 그 진실-말하기의 용기는 죽을 때까지 이뤄지는 영혼의 시험으로 실천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