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진실의 용기》 0720 후기 +2
유택
/ 2017-07-21
/ 조회 1,242
관련링크
본문
<진실의 용기> 0720 후기
5,6강 세미나를 1주년 파티와 함께 즐겁게 마쳤습니다. 2시간반에 걸친 세미나원들의 열띤 이야기들을 보태어서 지금 정리를 해둬야 ‘자기 배려’ 될 것 같아서 시키지도 않은 후기 남깁니다. 이번 세미나 내용에서 파악된 주된 핵심은 첫째, 소크라테스의 마지막 유언에 관한 분분한 해석에 대한 이야기. 둘째, 소크라테스가 지향했던 윤리적 파레지아의 등장 입니다
소크라테스는 생명까지 담보로 걸어야 하는 (그리스) 정치-참여적 파레지아 혹은 정치적 진실-말하기를 원치 않았습니다. 그것은 목숨의 위협을 무릎 쓰고 진실을 사람들 앞에서 주장한 후 자기를 떠나는 것이라고 책에서 표현됩니다. 대신 소크라테스가 추구하는 철학적 진실-말하기 즉 윤리적 파레지아는 죽을때까지 자신의 삶 속에서 지속적으로 실천되어야 하는 그 무엇입니다. 에토스, 에토포이에시스 즉 실존의 방식, 그 자잘한 ‘군인’ 같은 실천들 하나 하나가 다름 아닌 자기 그리고 자기의 삶을 구성하고, 그의 삶-철학이고, 그의 진실이고, 그의 주체를 이루는 것이자 프쉬케(영혼), 심지어 그의 살(flesh 육체성)가 되는 것 같습니다. (전 자꾸 소크라테스의 ‘육(신)체’에 관심이 가서…)
소크라테스가 죽기 전, 많은 제자들이 죽어서는 안 된다고 만류했습니다. 그러나 기필코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시고 죽습니다. 그러면서 남긴 말, ‘…빚을 졌으니 수탉을 아우클레피우스에게 바쳐라..’ 이 유언에 대해 (좀 얄미운 니체의 해석도 포함하여) 전통적인 해석은 ‘소크라테스는 잘 살다가 마지막에 혀가 꼬이면서 삑사리가 났다 그는 자신의 지난 살아온 삶을, 죽음의 순간에 한마디로 스스로 부정한 것이다. 즉 삶은 질병이다라고 폭로해 버린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삶은 질병이 아니다 오히려 영혼의 질병에서 치유 되었기에 치유에 대한 감사로써 의학의 신(아우클레피우스)에게 수탉이 바쳐져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라는 해석이 있습니다. 제자들의 만류는, 소크라테스가 보기에 곧 그들의 영혼이 잘못된 의견들에 휘둘러져서 타락한 것이고, 죽기직전에 대화를 통해 제자들에게 자신의 다가올 죽음을 받아들이게 하고 수긍/이해 시켰다는 점에서 소크라테스는 그들(자신을 포함하여 제자들)의 영혼이 치유 되었다 그래서 감사제의를 바쳐라(빚을 갚아라)고 한 것이다’라는 해석입니다.
이 마지막 유언을 둘러싼 두 가지 해석을 통해 푸코가 말하고자 했던 것은, 삶은 질병이기도 하고 삶은 질병이 아니기도 하다는 한 세미나원의 지적이 나왔습니다. ‘이럴수도 저럴수도’ 보여주기식 푸코적 나열. 그것은 무책임한 ‘늘어놓음’이 아니라 항상 어떤 사안에 대해 여러 가지로 해석 되어질 수 있는 격자(퍼스펙티브)들을 제시 하는게 푸코의 철학적 방식이지 않았냐 라는 말이었습니다. 여하튼 푸코는 결국 이 유언의 분분한 해석을 제시하면서도 ‘삶은 질병이 아니다’에 더 무게를 두고 싶어하는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그래야 윤리적 파레지아로의 전환, 자기배려/자기돌봄의 시작, 더 나아가 삶 자체 즉 에토스 자체가 철학인 견유학파까지 이어지는 푸코의 사유가 이 책을 관통하며 순차적으로 흘러갈 수 있기 때문이겠지요
이 유언에 대한 두 가지 해석이 중요한 이유는 제가 이해한 바로는 이렇습니다. 소크라테스는 프쉬케가 영원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프쉬케가 지금 시대의 번역을 통해 ‘영혼’으로 둔갑하는데 그렇게 되었을 때 뭔가 기독교적 의미 혹은 우리가 통념적으로 가지고 있는 어떤 실체로서의 영혼으로 우리들은 인식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프쉬케(영혼)을 감각해서는 안 되는 것 같습니다. 프쉬케! 그것을 구성해서 산출시키는 것은 자신의 ‘에토스’입니다. 삶의 방식 실존의 방식이 곧 프쉬케 입니다. 그래서 이천년이 흐른 지금에서도 소크라테스가 여전히 회자 되는 것은 그의 프쉬케 그의 실존의 방식이 여전히 불멸성을 지니고 후대의 우리에게 큰 울림을 주기 때문이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예전의 푸코 용어를 빌리자면, 자신의 실존을 온전히 살아가겠다라는 실존/실천의 절차들의 총체! 그 총체의 매 단계 단계들이 ‘나’이고 나의 ‘프쉬케’고 나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육신을 하찮게 여기고 정신/영혼을 중시 여겼기 때문에 쉽게 독배를 마신 거 아니냐는 저의 반문은 틀린 것이었다는 것이 이번 세미나의 제 결론입니다.. 육체와 정신의 이분법이 아닙니다. 에토스를 통해 구성되는 이 모든 것이 ‘나’이고, 진실을 용기 있게 대면하는 자는 차후에 죽을 건지 살 건지에 의문을 두어서는 안되며, 생의 사건이 벌어진 그 순간 그리고 생의 매 순간에 점철되는 자신의 ‘에토스-실천’이 소크라테스에게 중요했던 것임을, 푸코가 이번에 말하고자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강의 마지막에 이런 말로 끝납니다.
“예언도 아니고, 지혜도 아니고, 테크네도 아닌 ‘진실-말하기의 형식으로서 철학’ 말입니다. 그 진실-말하기의 용기는 정치적 무대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이뤄지는 영혼의 시험으로 실천되어야 하는 것입니다.”(p 138)
정리 하려고 덤볐는데 살짝 또 아리송해지며 어지럽지만 다음 펼쳐질 강의를 학수고대하며… 후기 이상입니다.
댓글목록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유택식으로 정리해줘서 고마워요^^
소크라테스의 유언을 두고, 삶을 긍정했느냐/질병으로 여겼느냐를 '해석'하는 장인데요,
저는 여기서 소크라테스는 자신에게 내려졌다는 '신탁'조차 맞다/틀리다를 '해석'하는 게 아니라,
탐색하고 조사하고 비교하면서 그 '신탁'이 어떻게 되는지 삶을 통해서 실천하고 지켜봤다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의미에서 소크라테스가 철학자의 진실-말하기, 철학자의 에토스를 가졌다고 봅니다.
자신이 마주한 '죽음'조차 삶의 연장선으로 탐색하고/비교하고/실천하는 어떤 태도를 가진.
그리고 니체의 해석을 포험하여 다른 모든 해석들을 보여주는 푸코의 태도가
또 그런 소크라테스적 에토스를 보여주고 있는 것 같아요.
시대에 따라 정의와 진실이 달라지듯이, 그 '유언'에 대한 해석도 매번 달라질 수 있겠지요.
푸코가 이 이야기를 통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어떤 진실-말하기의 에토스인지만 알고 가도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이 책도 점점 재밌어집니다.^^
1주년 소소한 파티도 재밌었어요!!
삼월님의 댓글
삼월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는 유택의 정겨운 후기, 잘 읽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이 부분을, 삶은 질병이 아니지만 죽음에 대한 공포는 질병이 될 수 있다고 읽었어요.
죽음에 대한 두려움은 용기를 사라지게 하고, 진실을 무력화시킬 수 있지요.
그렇다면 파레지아는 죽음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진실의 힘을 말하는 게 아닐까요?
후기에 이어 소크라테스의 에토스에 대한 아라차님의 댓글도 잘 읽었습니다.
철학자의 에토스, 철학자의 실존과 프쉬케, 이천 년이 지났는데도 우리가 거기에 골머리 싸매고 있는 이유가 대체 뭘까요?
그게 파레지아의 힘인가요? ㅎㅎ
무엇보다 1주년 파티 함께 못해서 슬픔. 엉엉. 이것이 한 줌의 거짓도 없는 저의 진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