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뢰즈] 1. 차이 그 자체①_발제문
삼월
/ 2017-0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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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절
차이와 어두운 바탕
차이-없음의 사태를 의미하는 무차별성은 두 측면을 지닌다. 한쪽은 분화되지 않은 심연, 검은 무無, 규정되지 않은 동물이며, 모든 것이 용해되어 있다. 다른 쪽은 흰 무無, 고요해진 표면, 분할된 신체들처럼 서로 연결되지 않는 규정들이 떠다니고 있다. 미규정자는 분화되지 않았으므로 차이가 없다. 연결되지 않고 떠다니는 규정들도 무관심하므로 서로 차이가 없다. 들뢰즈는 여기서 차이가 무엇인가에 대해 묻는다. 차이는 이 두 극단의 중간자인가? 차이는 유일한 극단, 현전과 정확성의 유일한 계기인가? 그 후에 스스로 답한다. 차이는 본래적 규정에 대해 말할 수 있는 바로 그런 상태이다.
두 사물 ‘사이’의 차이는 단지 경험적 차이에 불과하고, 그에 상응하는 보통의 규정들은 외생적 규정들에 불과하다. 즉 차이는 일방향적인 구별에 해당하는 규정의 상태이다. 차이, 혹은 본래적 규정은 잔혹성이다. 또 구별 자체가 하나의 형상이다. 형상에 대한 조형적 상징을 포기할 때 추상적 선은 최상의 힘을 얻고 난폭하게 바탕에 참여한다. 바탕에 대한 구별 짓기를 통해 추상적 선은 난폭해진다. 사유의 깨어있음, 불면증은 괴물을 낳는다. 사유는 규정이 단일한 하나가 되는 국면을 말한다. 규정은 미규정자에 대한 일방향적이고 정확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단일한 규정이 된다. 사유는 차이를 만들지만, 차이는 괴물이다. 그러나 놀라지는 말자. 차이에 죄가 있다면, 바탕을 올라오도록 하고 형상을 와해시킨 죄밖에 없다. 잔혹성은 단지 본래적 규정이며, 규정되는 것이 미규정자와 본질적 관계를 유지하는 정확한 지점을 가리키고 있다.
재현의 네 측면 (4중의 뿌리, 행복한 국면, 큰 차이와 작은 차이)
차이는 조화로운 유기체가 될 수 없는가? 이유에 해당하는 재현의 요소는 네 가지 주요한 측면들을 지닌다. 규정되지 않은 개념의 형식 안에서 등장하는 동일성, 규정 가능한 궁극적 개념들 간의 관계 안에서 성립하는 유비, 개념 내부적 규정들의 관계 안에서 성립하는 대립, 개념 자체의 규정된 대상 안에서 나타나는 유사성. 이 형태들은 매개가 지닌 네 개의 머리 혹은 네 개의 끈과 같다. 동일성, 대립, 유비, 유사성이라는 사중의 뿌리에 종속되는 한에서 차이는 ‘매개’된다.
차이를 ‘구원’하려고 노력하는 입장에서는, 차이를 재현함으로써 그런 구원이 가능하고 차이를 개념 일반의 요구들에 종속시킬 때 그런 재현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제 차이는 그리스적 행복의 국면에서 벗어날 때만 괴물로 남아야 하며, 차이를 만든다는 말은 개념 안에 기입하기 위해 행하는 선별적 시험을 가리키게 된다. 여기서 들뢰즈는 차이가 정말로 악 그 자체였는지, 차이를 체험하고 사유하기 위해 ‘매개’가 필요했는지를 묻는다.
2절
개념적 차이: 가장 크고 가장 완전한 차이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장 크면서도 완전한 차이가 있다고 말했다. 차이 일반은 상이성 혹은 이타성(어떠한 공통성도 없고 어떠한 종합도 불가능한 상태)과 구별된다. 차이는 자신보다 어떤 사태에 의해 다르게 나타난다. 두 항은 다른 사태 안에서 합치할 때 다를 수 있고, 이때 둘 사이에 차이가 있다고 말할 수 있다. 가장 큰 차이는 대립이다. 대립의 모든 형식들 중에서 가장 완전하고 완결된, 가장 잘 ‘합치하는’ 형식은 상반성이다. 상반성만이 대립적인 것들을 수용할 수 있는 주어의 역량을 대변한다. 본질이나 형상 안에 있는 상반성을 통해서만 우리는 본질적인 차이 그 자체의 개념을 얻을 수 있다. 유의 고유한 본성은 차이들을 통해 나뉜다. 완전하고 최대치에 이른 차이는 유 안에서 성립하는 상반성이고, 이는 종차이다. 종차의 양 극단에서 차이는 단순한 이타성과 다시 만나는 경향이 있고 개념의 동일성에서 거의 벗어난다. 유적 차이는 어떤 조합 불가능한 것들 가운데 자리하고, 개체적 차이는 어떤 분할 불가능한 것들 가운데 자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른 차이의 논리학: 차이의 개념과 개념적 차이의 혼동
종차는 형상적이므로 순수하다. 본질 안에서 기능하므로 내생적이다. 질적이다. 종합적이다. 종차는 매개되지만, 그 자신이 매개이자 매개항이다. 산출적이다. 언제나 원인, 형상인이다. 종차는 매우 특수한 유형의 술어이다. 종차는 술어로서 종에 귀속되면서도 동시에 종에 유를 귀속시키며, 스스로 술어로서 귀속되는 종이 된다. 종차는 자신이 귀속시키는 것을 자신과 더불어 실어 나른다. 차이는 유와 모든 중간의 차이들을 자신과 함께 운반한다. 차이의 운반, 차이의 차이인 종별화는 연쇄적 나눔의 수준들을 가로질러 차이와 차이를 연결한다. 이 과정은 거쳐 이르게 되는 최종적 차이는 그 자체로 분할불가능한 단일한 것이 된다.
종차는 상대적으로만 가장 큰 차이이며, 절대적 관점에서는 모순이 상반성보다 크다. 특히 유적 차이는 종적 차이보다 크다. 하나의 개념에 가정된 동일성에 의존할 때만 종차가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다. 유적 개념 안에 있는 동일성의 형식에 의존해서만 차이는 상반성으로까지 끌려갈 수 있다. 종차는 차이에 대한 모든 독특성과 전환점들에 대한 보편적 개념(이념)이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차이는 거짓된 운반에 지나지 않으며, 차이가 본성을 바꾸지도 않는다. 종차는 단지 상대적 의미의 최대치를 지칭할 뿐이다. 차이의 개념을 설정한다는 것이 차이를 개념 일반에 기입하는 것으로 뒤바뀌었다. 이것이 차이의 철학을 파멸로 몰고 간 혼동의 원리였다.
종적 차이와 유적 차이
종차는 유들 자체에서 성립하는 더 큰 차이에 비하면 작은 차이다. 종차는 유의 동일성을 조건으로 하지만, 유는 상위의 동일한 개념이나 공통의 유라는 조건을 따르지 않기 때문이다. 종들의 로고스는 유로 간주되는 개념 일반의 동일성이나 일의성을 조건으로 한다. 그러나 유들의 로고스는 우리들을 통해 사유되고 말해지며, 존재의 다의성 안에서, 일반적 개념들의 상이성 안에서 움직인다.
재현의 네 측면: 개념의 동일성, 판단의 유비, 술어들의 대립, 지각된 것의 유사성
유적 차이나 범주적 차이는 여전히 아리스토텔레스적 의미의 차이로 남아있다. 단순히 상이성이나 이타성으로 전락하지 않으며, 어떤 동일한 개념 혹은 공통의 개념이 여전히 존속한다. 바로 존재의 개념이다. 존재라는 개념은 집합적이지 않으며, 분배적이고 위계 설정적이다. 그 자체 안에 내용을 갖지 않으며, 형상적으로 구별되는 항들에 비례하는 내용만을 가질 뿐이다. 항들은 존재에 대해 서로 동등한 관계를 가질 필요도 없다.
존재의 개념이 가지는 역할은 유가 일의적 의미를 띤 종들에 대해 갖는 역할과 다르지만, 존재의 다의성은 매우 각별하다. 문제는 유비이며, 존재의 개념을 분배하는 심급은 판단에 있다. 판단의 두 가지 본질적 기능은 분배와 위계화이다. 공통감과 양식(일차적 감각)이라 불리는 능력이 각각 이 기능을 수행하며, 판단의 가치인 ‘올바름’의 근간을 이룬다. 판단의 유비인 공통감과 일차 감각에 기반을 두고 개념의 동일성이 존속하게 된다. 종적 차이가 차이를 규정되지 않은 개념 일반의 동일성 안에 기입하는 데 그친다면, 유적 차이는 차이를 규정 가능한 가장 일반적 개념들의 유사-동일성 안에 기입하는 데 만족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는 차이의 철학은 이런 이중 기입을 핵심으로 한다.
차이와 유기적 재현
유적 차이와 종적 차이들은 재현 안에서 공모 관계를 갖는다. 유는 종차를 통해 바깥으로부터 규정될 뿐이며, 유적 차이들은 어떤 공통의 유에 관계하는 것처럼 존재에 관계할 수 없다. 공통의 유 안에 있는 종들의 일의성 배후에는 상이한 유들 안에서 성립하는 존재의 다의성이 자리한다. 큰 단위의 유들은 유비적 관계들에 따라 규정되며, 작은 단위의 유들은 유사성들에 대한 직접적 지각 안에서 규정된다. 이 두 측면은 함께 유기적 재현의 한계들을 구성하며, 분류에 필수적인 요건들을 이룬다.
그러나 어느 관점에서든 본래적 차이는 오로지 반성적 개념으로만 드러난다. 사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인접한 유사한 종들로부터 유적 동일성으로 이행할 수 있고, 감각 가능한 연속적 계열의 흐름 속에서 유적 동일성들을 선취·절단해낼 수 있다. 이런 반성적 개념에 머무르는 한 차이는 재현의 모든 요구들에 순응하고 있음을 증언한다. 재현은 차이를 통해 유기적 재현이 된다. 반성적 개념 안에서 매개하고 매개되는 차이는 개념의 동일성, 술어들의 대립, 판단의 유비, 지각의 유사성에 복종한다. 차이는 파국을 통해서만 반성적이기를 그칠 수 있다. 물론 차이의 파국성과 반성적 성격은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사태이다.
3절
일의성과 차이
둔스 스코투스는 존재의 일의성을 주장했고, 이는 파르메니데스와 하이데거에 이르기까지 되풀이되었다. 존재는 공통의 지칭대상이 될 수 있지만, 존재가 어떤 유인 것은 아니다. 공통의 지칭대상인 존재는 수적으로 구별되는 모든 지칭자나 표현자들을 통해 언명되지만, 존재는 항상 같은 의미에서 표현한다. 일의성의 본질은 존재가 단 하나의 같은 의미에서, 그러나 자신의 모든 개체화하는 차이나 내생적 양상들을 통해 언명된다는 점에 있다. 존재는 이 모든 양상들에 대해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양상들은 서로 같거나 동등하지 않으며, 존재는 모든 양상들에 대해 ‘동등’하다. 일의적 존재의 본질은 개체화하는 차이들에 관계하는 데 있다. 존재는 자신을 언명하는 모든 것들을 통해 단 하나의 같은 의미에서 언명된다. 그러나 존재를 언명하는 각각의 것들은 차이에 의해 지배받는다. 즉 존재는 차이 자체를 통해 언명된다.
분배의 두 유형
일의적 존재에도 위계와 분배는 존재한다. 그러나 분배는 위계조차도 서로 화해시킬 수 없는 전혀 다른 두 가지 뜻을 지닌다. 우선 ‘소유지’나 영토들과 유사한 규정들에 의해 진행되는 분배인 배당된 몫을 함축하는 분배가 있다. 다른 분배는 소유지도 울타리도 척도도 없는 유목적 분배이다. 정착적 노모스는 어떤 공간을 배당하지만, 유목적 노모스는 그 공간에 자신을 배당하고 공간을 채운다. 유목적 노모스는 방황의 분배, ‘착란’의 분배이며, 사물들은 여기서 일의적이고 배당되지 않은 존재의 모든 범위에 걸쳐 자신을 펼쳐간다. 이 악마적 분배를 통해 역량의 관점에서 사물과 존재자들을 바라보는 위계를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문제는 역량의 정도가 아니라 도약을 위한 한계, 경계이다. 한계와 경계는 끝이나 분리가 아니라 사물이 자신의 모든 역량을 펼쳐가기 시작하는 출발점이다. 존재의 일의성은 존재의 동등성, 평등을 의미한다. 일의적 존재는 유목적 분배이자 왕관을 쓴 무정부 상태이다.
일의성과 유비의 화해 불가능성
존재는 일의적이면서도, 유비적일 수 있다. 그러나 일의성 안에서 존재하거나 존재해야만 하는 것은 개체화하는 차이들이 아니라, 존재이다. 존재는 차이를 통해 언명된다는 의미에서 차이 그 자체이며, 일의적이다. 그 일의적 존재 안에서 우리의 개체성이 다의적인 것으로 머물러 있는 것이다.
일의성의 역사적 단계들: 둔스 스코투스, 스피노자, 니체
철학의 역사에서 존재의 일의성이 정교화되는 세 단계의 과정이 있다. 둔스 스코투스와 스피노자, 그리고 니체. 먼저 둔스 스코투스가 말하는 일의적 존재는 무한자와 유한자, 단독자와 보편자, 피조물과 창조자에 대하여 무차별하며 중립적이고 중성적이다. 그는 일의적 존재를 사유하기만 했을 뿐이며, 범신론이라는 적을 피하려고 했다. 둔스 스코투스에 의해 존재의 일의성은 ‘속성들’의 일의성으로 확장되며, 속성들은 변이의 능력을 지닌다. 일의적 존재는 질적 형상이나 구별성을 띠는 속성들을 함축하여 강도적 요인들이나 개체화하는 등급들에 관계시킨다. 등급들은 존재의 양태를 변화시키지만 본질은 변화시키지 않으며, 구별 일반은 존재를 차이와 관계 짓는다. 형상적 구별과 양태적 구별은 일의적 존재가 스스로 차이와 관계하는 두 유형이다.
두 번째 단계는 스피노자. 스피노자는 일의적 존재를 중립적이거나 무차별한 것으로 사유하는 대신 순수한 긍정의 대상으로 만든다. 일의적 존재는 신 또는 자연이라는 단일하고 보편적이며 무한한 실체와 하나를 이룬다. 스피노자에게 실재적 구별은 수적 구별이 아니라 형상적 구별, 즉 질적이거나 본질적인 구별이다. 양태들과 관계할 때 실체는 존재론적으로 단일한 의미를 지닌다. 양태의 유일한 의무는 자신의 모든 역량이나 존재를 자신의 한계 안에서 펼치는 데 있다. 따라서 실체와 양태들이 같은 본질을 갖지 않더라도, 속성들은 실체와 양태들에 대해 절대적으로 공통적이다. 모든 위계, 모든 탁월성은 부정된다. 스피노자에 이르러 일의적 존재는 더 이상 중립성을 띠지 않으며, 표현적이고 긍정적인 진정한 명제가 된다.
영원회귀 안의 반복은 존재의 일의성을 정의한다
스피노자에게서 실체는 양태들로부터 독립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실체가 양태들을 통해서만 언명해야 한다는 조건은 일반적이고 단호한 전복을 대가로 충족될 수 있다. 전복 이후 존재는 생성을 통해, 동일성은 차이나는 것을 통해, 일자는 다자를 통해 자신을 언명한다. 동일성은 일차적이지 않다. 동일성은 생성을 마친 이차적 원리이다. 동일성은 차이나는 것의 둘레를 회전한다. 이 전복(혁명)을 통해 차이의 고유한 개념을 찾을 가능성이 열렸다. 니체가 말하는 영원회귀는 동일자의 회귀가 아니다. 모든 선행하는 동일성이 폐기되고 와해되는 세계를 가정한다. 회귀는 존재이며, 오직 생성의 존재이다. ‘같은 것’이 되돌아오게 하는 게 아니라, 생성하는 것에 대해 회귀가 유일한 같음을 구성하는 것이다. 회귀는 생성 자체의 동일하게-되기이며, 유일한 동일성이다. 그러나 이것은 이차적 역량의 동일성, 차이의 동일성일 뿐이다. 이것은 차이나는 것을 통해 언명되고 차이나는 것의 둘레를 도는 동일자이다. 차이에 의해 산출되는 이런 동일성은 ‘반복’으로 규정된다.
영원회귀의 반복은 차이나는 것으로부터 출발하여 같음을 사유하는 데 있다. 이 차이들은 이론적 재현이 아니며, 차이들을 산출 능력에 따라 실천적으로 선별한다. 되돌아오는 것은 극단적 형상들이다. 자신의 한계 안에서 자신을 펼쳐가는 형상, 자신의 역량의 끝까지 나아가는 가운데 자신을 변형하고 서로의 안으로 이행하는 극단적 형상들이 되돌아온다. 영원회귀는 힘의 의지의 변신과 가면들로 연출되는 연극적 세계를 통해 언명된다. 영원회귀가 표현되는 공통의 척도와 존재는 동등하지 않은 모든 것의 동등-함, 자신의 비동등성을 충만하게 실현할 줄 알았던 모든 것의 동등-함이다. 초인(위버멘쉬)은 ‘존재하는’ 모든 것의 우월하고 월등한 형식이다. 영원회귀는 차이에서 출발하여 반복을 산출하는 동시에 반복에서 출발하여 차이를 선별한다.
4절
차이와 망아적 재현: 무한대와 무한소
큼과 작음을 기준으로 하는 시험은 개념 일반이 지닌 동일성의 요구에 따르기 위해 차이의 고유한 개념을 포기하고, 단지 어떤 한계들만을 고정시켜 놓았다. 그 한계들 사이에서 규정은 차이가 된다. ‘차이를 만들기’에 본성을 두고 있는 선별은 일의적 존재의 단순한 현전 안에서 극단적 형상들이 나타나고 자신을 펼쳐갈 수 있도록 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큼과 작음을 극단적 형상들 자체의 특유한 선택지로 다시 발견하게 되지 않을까? 극단은 큼이나 작음 안의 무한에 의해 정의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자신 안에서 그런 무한을 발견할 때, 재현은 유기적이 아니라 망아적 재현의 모습을 취한다. 재현은 유기적 질서의 한계들 아래 있는 소란, 불안, 정념 등을 발견하며, 다시 괴물과 마주친다. 이제 개념은 모든 국면, 모든 계기들을 감당할 수 있는 전체가 되어야 한다.
이유로서의 근거
헤겔은 차이가 소멸되는 동시에 생산되는 계기에 주목하는데, 여기서 한계의 의미는 완전히 바뀌어버린다. 한계는 더 이상 유한한 재현의 마지막 경계선이 아니라, 규정이 망아적 재현 안으로 부단히 봉인되고 펼쳐지는 모태를 가리킨다. 한계는 형상의 제한이 아닌 근거를 향한 수렴이다. 역량의 정지가 아닌 역량이 발휘되고 근거지어지는 요소이다. 망아적 재현의 원리는 근거에, 재현의 요소는 무한에 있다. 반면 유기적 재현의 원리는 형상에, 재현의 요소는 유한에 있다. 규정을 사유 가능하고 선별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은 무한이므로, 차이는 규정에 대한 유기적 재현이 아니라 망아적 재현이다.
그러나 왜 망아적 재현에는 큼과 작음, 최대와 최소 등의 사이에서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선택지가 남아있는 것일까? 두 사태는 무한 안에서 상관없는 것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무한은 유한한 규정이 사라져버린 장소가 아니다. 유한한 규정이 존속할 때만 망아적 재현은 자신 안에서 무한을 발견할 수 있다. 재현의 조건상 무한과 유한은 하나가 다른 하나 안에서 재현될 수 있으며, 이때 무한은 무한하게 작은 것이나 무한하게 큰 것으로 언명된다. 두 ‘차이’는 대칭적이지 않다. 큼과 작음은 무한 안에서 동일해진다. 라이프니츠와 헤겔은 큼과 작음의 양자택일에서 벗어나지만 다시 무한하게 큰 것과 무한하게 작은 것의 양자택일에 부딪힌다. 따라서 망아적 재현은 이원성을 향해 열려 있다.
헤겔에 따른 차이의 논리학과 존재론: 모순
헤겔은 모순이 차이를 근거와 관계 짓는 가운데 스스로 해소해버린다고 보았다. 아리스토텔레스와 마찬가지로 헤겔은 극단적이거나 상반적인 것들의 대립을 통해 차이를 규정한다. 무한이 도입되면서 타자의 상반성이 자기의 상반성으로 바뀌게 되지만, 여전히 어떤 무차별이나 무관심의 상태가 존속한다. 각각의 규정은 타자를 포함하되, 타자와는 독립적이다. 헤겔에게서 부정적인 것은 긍정적인 것의 생성이면서 동시에 긍정적인 것의 회귀이다. 모순 안에서 차이는 부정성으로 규정된다. 여기서 차이는 내생적, 본질적, 질적, 종합적, 생산적이며 순수한 차이가 되며, 무차별성이나 무관심은 더 이상 존속할 수 없게 된다. 모순을 견뎌내고 지양한다는 것은 차이를 ‘만드는’ 선별적 시험이다. 헤겔에게 무한은 대립이나 유한한 규정을 통해 언명된다.
라이프니츠는 피조물의 겸양을 위해 유한 속에 무한을 끌어들인다. 헤겔이 무한하게 큰 도취와 불안을 발견했다면, 라이프니츠는 무한하게 작은 것의 불안, 도취, 현기증, 소실, 죽음으로 이어지는 불안을 발견했다. 헤겔의 출발은 본질적인 것인 유類이며, 무한은 유 안에 분열을 낳고 종 안에서 분열을 제거한다. 유는 자기 자신이면서 종이고, 전체는 자기 자신이면서 부분이다. 본질적인 것은 본질 안에 타자를 포함하고 있다.
반면 라이프니츠는 현상들에 관한 비본질적인 것에서 출발하여, 비본질적인 것이 무한하게 작은 것에 힘입어 종으로, 유로, 대립해 있는 유사 종이 되기에 이른다. 따라서 비본질적인 것은 타자를 부수적 속성 안에, 개별적인 경우 안에 포함하고 있을 뿐이다. ‘경우’에 의한 포섭이나 부수적 속성들의 언어는 자신만의 고유한 독창성을 갖는다. 이런 무한소의 절차는 모순과는 다르며, “부차모순”이라는 특수한 이름으로 불러야 한다. 본질적인 것은 비본질적인 것을 본질 안에 담고 있는 반면, 비본질적인 것은 본질적인 것을 자신의 경우 안에 포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