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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그라마톨로지] 제 2부 자연, 문화, 에크리튀르(PP.115∼150)
namu / 2017-07-24 / 조회 1,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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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 [그라마톨로지] 제 2부 자연, 문화, 에크리튀르​​​​
제 1장 문자의 폭력; 레비스트로스에서 루소로
문자, 그리고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PP.115∼150)​​​​

 

브리콜뢰르(bricoleur)는 결코 자신의 계획을 완수하지 못하지만, 언제나 자기 자신의 무언가를 그 속에 집어넣는다._<<야생적 사고>>
문자 체계는 그릇된 것이다. 그라나 문자는 그 체계를 발전시키면서 자기 자신을 진실된 것으로 화장했다._<<대화록>>

 

<문자의 가르침>이란 장의 중요성. ⓵다른 글들(가량 <<대담>>)에서 우리는 <<슬픈 열대>>에서 처음으로 나타나는 문자언어에 대한 체계적인 모든 이론의 모든 주제들을 다른 형태로 다소간 산만하게 만날 수 있음. ⓶이론적 내용 자체는 다른 어느 곳에서보다 이 책에서 자세하게, 하나의‘비상한 우발적 사건’에 대한 주석 형태로 설명되고 있음
  남비콰라족에 대한 학위 논문에서 이 사건은 보고되지만, <<슬픈 열대>>에서처럼 글쓰기의 역사적 의미, 기원, 그리고 기능에 대한 긴 성찰을 야기하지 않는다. 그 반대로, 우리는 <<슬픈 열대>>의 난외에 기록해두면 값질 정보들을 이 논문에서 끌어낼 것이다.
  문자,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 우리는 이 말을 레비스트로스에게 강제하는 것이 아니다. <<클로드 레비스토로스와의 대담>>의 다음과 같은 대목을 조심스럽게 환기해 보자; “내가 보기에 문자 언어 자체는 그 기원부터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에 토대를 둔 사회와 끊임없이 관계 맺고 있는 것 같다.”
  한편으로, 언어와 문자 사이의 통상적인 차이와 전자에 대한 후자의 외재성이 인정되고 있다. (---)레비스트로스에게 특히 음성언어에서 문자언어로의 이동을 도약으로, 어떤 불연속적인 순간적 돌파로 간주하게 한다. 이 이동은 어떠한 문자도 없는 _다시 말해 순수하고, 순진무구한_충만하게 음성적인 언어로부터, 억압의 기술을 개시하는 새로운 유형의 부수적 기표로서의 표기적‘대리 표상’을 확보하는 언어로의 이동이다. 문자 표기와 더불어 갑자기 도래하는 착취와 악이라는 테마가 순진무구한 언어의 순수성 밖으로부터 나쁜 영향을 미치는 사건과 놀라움의 테마로 분명히 되도록 만들려고, 그는 이러한 ‘후성주의적後成主義的’ 개념이 필요했다. 이 사건은 우연에 의한 것처럼 순진무구한 언어의 순수성에 나쁜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언어는 다만 단숨에 탄생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셀 모스 작품 서문>>)
  다른 한편, _이는 동일한 태도의 이면이다 _문자가 있는 민족들과 문자가 없는 민족들의 분할은, 레비스트로스가 그 적합성을 끊임없이 인정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역사에 대한 그리고 문화들 각각의 가치에 대한 고찰에서 민족 중심주의가 어떤 역할을 하도록 기대되는 순간부터 곧바로 그에 의해 지워진다.

‘문자의 가르침’은 무엇인가?  
leçon은 학습과 교훈이라는 이중의 의미가 있다. 이를 문자라는 말과 함께 묶어 놓으면 멋진 제목이 된다. 학습하는 문자란 의미에서 문자 교훈인 것이다. 남비콰라족 추장은 문자를 배운다. 그는 문자가 지닌 언어 기능을 이해한다기보다는 글쓰는 것을 모방한다. 아니 그보다 그는 문자의 기능인 의사소통, 의미작용, 기의의 전승을 배우기 전에 그 심층적 기능인 예속화 기능을 먼저 배운다.
  불면의 밤을 지새우며 우리의 민족학자는 긴 성찰을 하는 가운데 마침내 두 계기를 통해 문자의 교훈을 이끌어낸다.
  A)지각에 대한 경험적인 진술, 즉‘비상한 사건’장면.
  B)불면 상태에서 올빼미 우는 소리가 들리는 시간에, 글쓰기의 장면, 사건의 심층적 의미, 문자의 패쇄된 역사에 대한 역사-철학적 성찰.

A)비상한 사건. 민족학적 폭력과 관계된 두 부분의 관련성. 이 점은‘극도의 친절’‘깊은 무심’‘천진하고 매력적인 동물적 만족감’‘인간적 애정의 가장 감동적이고 가장 진실한 표현’에 대한 고찰에 진정한 의미를 복원시켜준다.

---사람들은 남비콰라족이 문자를 쓸 줄 모른다고 짐작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호리병박 위에 몇몇 점선들이나 지그재그들을 제외하고는 그 이상 그림도 그리지 않는다. 나는 종이와 연필을 나누어주었다. ---어느 날 난 그들 모두가 종이 위에 물결치는 수평선 선들을 그리는데 여념이 없는 것을 보았다.---그들은 글을 쓰고 있었다. 아니 보다 정확히 말해 나와 똑같이 연필을 사용하려고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노력은 거기서 그쳤다. 그러나 추장은 더 멀리 내다보았다. 아마 그는 문자의 기능을 이해했던 모양이다.

  이 발췌문은 남비콰라족에 대한 학위 논문의 한 대목과 이중인화처럼 중첩되어 온다. 우리는 그 속에서 특히 <<슬픈 열대>>에서 생략된 세 가지를 추려볼 수 있다.
 
 1)남비콰라족이라는 소집단은 문자로 쓰는 행위를 지칭하는 하나의 낱말, 어쨌든 그런 행위를 위해 기능할 수 있는 그런 낱말을 가지고 있다.(“그들은 글쓰는 행위를 이에카리우케듀투iekariukedjutu, 즉‘선을 긋는 것’이라 불렀다.”) 문자를 지닌 민족들의 언어에서 ‘글을 쓰다’를 의미하는 날말들을 문자 그대로 번역(가령‘긁다’‘새기다‘할퀴다’‘껍질을 벗기다’‘선을 긋다’‘자국을 내다’등)하게 되면, 이 낱말이 대단히 빈약한 동작적 의미로 축소될 것이라는 점에서, 이는 마치 어떤 언어는 문자를 지칭하는 낱말은 없고, 따라서 이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글을 쓸 줄 모른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이는 ‘음성언어(parole)’와 등가치인 말을‘소리지르다’‘노래하다’‘입을 열다’ 나아가‘중얼거리다’로 번역함으로써 그들에게 ‘음성언어’가 없다고 말하는 것과 같은 일이 아닐까? (예, J. 제르네: 문文이란 낱말이 좁은 의미의 문자 이외의 다른 많은 것들을 지칭한다)“가장 오래된 언어들에서 타민족들을 지칭하는 데 사용되는 낱말들은 두 개의 원천으로부터 나온다. 하나는‘더듬거리다’‘우물거리다’를 의미하는 동사들이고 다른 하나는‘말없는’을 의미하는 낱말들이다.”_르낭  

2)‘선을 긋는’데 있는 활동.“게다가 그들은 글쓰는 행위를 이에카리우케듀투iekariukedjutu, 즉‘선을 긋는 것’이라 불렀다. 이것은 그들에게 미학적 관심을 나타냈다.” 레비 스트로스는 미학적 가치가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일 뿐 아니라, 남비콰라족이 이르지 못한다고 보여지는 ‘엄밀한 의미’의 문자에서 미학적 특성은 외재적이라고 상정한다.

3)“남비콰라족이 문자를 쓸 줄 모른다고---호리병박 위에 몇몇 점선들이나 지그재그들을 제외하고는 그 이상 그림도 그리지 않는다.”(<<슬픈 열대>>) 그런데 학위 논문에서 일부 남비콰라족이 매우 신속하게 다다른 결과들을 분명하게 드러내고 있고, 레비스트로스는 이 결과들을 ‘우리 자신들의 그림들에 영감을 얻은 문화적 혁신’으로 제시한다. 하지만 이 결과들은 사람이나 원숭이들을 보여주는 표상적 그림들일 뿐 아니라 어떤 계보나 사회구조를 묘사하고 설명하고 적는 도식들이다. 그런데 이는 결정적인 현상이다. 이제 확실한 정보로부터 알 수 있는 것은 문자(통상적 의미에서)의 생성이 도처에서 있었다는 점이고, 대개의 경우 계보에 대한 배려로 귀결된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계보적인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것은 통상적 의미의 문자에 분명하게 다다른 것이며, <<슬픈 열대>>가 암시하는 것(‘노력은 거기서 멈췄다’) 보다 훨씬 멀리 나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원문자로부터 통상적 의미의 문자로 넘어간다. 그것은 에크리튀르를 일반의 내부에서 이루어진다. 족보적 관계와 사회적 분류는 원문자의 봉합점이다. 이 봉합점은 언어(이른 바 구어)와 일반적인 의미에서 문자의 조건인 것이다.

 “그러나 추장은 더 멀리 내다보았다----”(<<슬픈 열대>>) “---문자에 대한 그의 태도는 매우 계시적이다. 그는 즉시 그것의 기호 역할과, 그것이 부여하는 사회적인 우월성을 인식했다.”(학위 논문)  지배명령과 기능과 관련된 앞으로 다루게 될 의미있는 사실 한 대목. “---이러한 코미디는 두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그는 동족들을 놀라게 하고 , 다음과 같은 것들에 대해 그들을 설득시키고자 했을 것이다.  즉 거래가 자신의 중개에 의해 이루어졌고, 자신은 백인의 결연을 얻어냈고, 백인이 지닌 비밀들을 알게 되었다는 것을 말이다.”(학위 논문)
  계급서열, 중개, 및 자본화의 경제적 기능, 거의 종교적인 어떤 비밀에의 참여 등, 문자라는 모든 현상으로 확인되는 그 모든 것이 우리는 여기서 하나의 전범적 구조, 즉 사실들과 몸짓으로 이루어진 짧은 시퀀스의 구조 속에 결집되어 있고 집중되어 있음을 본다. 여기서 문자의 모든 유기체적 복잡성이 한 우화의 단순한 발원지 속에서 채집된다.
 
B)장면의 재기억.    
  우리에게 우선적으로 흥미를 끄는 것은 사실적 확신과 이에 대한 해석적 반복 사이에 존재하는 괴리다. 가장 큰 괴리는 우선 ‘비상한 사건’의 매우 얄팍한 사실과 문자의 일반적 철학 사이에 나타난다.
  사건을 심사숙고할 시간이고 밤샘하며 다시 기억을 더듬어야 할 순간이다:“여전히 나는 이 우스꽝스런 사건으로 괴로워하며, 잠을 설치고 교환의 장면을 되새기며 불면의 시간을 보냈다.”
  곧바로 그 사건에서 두 개의 의미가 산출된다.
  ➀문자의 출현은 순간적이다. 준비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갑작스러운 도약은 문자의 가능성이 음성언어의 안이 아니라 밖에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리라. “흔히 사람들이 상상하듯이 문자는 남비콰라족에게 결코 수고스러운 학습 끝에 나타난 게 아니었다.”그러나 그것은 기원의 장면이 아니고, 다만 문자를 모방하는 장면이다.   
 ➁문자의 목적은 이론적이 아니라 정치적이고,‘지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것이다. 

문자언어의 상징은 차용되었다.---그런데 이 점은 지적이라기보다는 사회적인 목적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뭔가를 알고 기억하고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희생시켜 한 개인 _또는 한 기능_의 위세와 권위를 증대시키는 일이었다.(<<슬픈 열대>>)
 ‘사회적인 목적’과 지적인 목적’의 구분. 전자를 문자에 부여함으로써 주체간의 관계와 지식 사이의 매우 문제적인 차이가 신뢰를 얻는다. 문자는 주체 상호간의 폭력의 지평을 넘어서는 사유되지 않는다는 점이 사실이라면, 그런 지평을 근본적으로 벗어나는  _과학이라 할지라도_가 있을까?
  결론; 여기서 ‘문자’(다시 말해 통상적 의미에서의)라고 불리는 것의 영역을 폭넓게 벗어나고 있다. 그것은 또한 비문자적 음성언어의 영역을 포괄하고 있다. 이 점이 의미하는 바는 폭력을 문자와 연결시켜야 한다면, 에크리튀르가 좁은 의미의 문자보다 먼저 나타난다는 것, 다시 말해 그것이 음성언어 전체를 여는 원문자나 차연 속에서 이미 나타난다는 것이다.

첫 번째 명제
미개성과 문명을 구분하기 위한 모든 기준들을 제거하고 나면, 적어도 다음과 같은 기준을 간직하고 싶을 것이다: 문자가 있든 없든 어떤 민족들은 옛날에 획득한 지식을 획득할 수 있고 그들이 설정한 목표를 향해 점점 더 신속하게 진보하는 반면에, 또 다른 민족들은 개인적인 기억으로 충분히 고정시킬 수 있는 단편적 부문을 넘어서 과거를 기억할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들 민족들은 유동적인 하나의 역사에 사로잡혀 있는데, 이 역사에는 언제나 기원이, 그리고 어떤 기획에 대한 지속적 의식이 부재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류의 진화에서 문자의 역할에 대해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어떤 것도 이러한 발상을 정당화시키지 못한다.

  이 명제는 두 개의 조건이 따를 때만 의미가 있다.
  1)과학이라는 관념과 기획이 전혀 고려되지 않아야 한다. 다시 말해 권리상의 무한 전달 가능성으로서의 진리 관념이 전혀 고려되지 않아야 한다.
  2)우리가 아직도 기대어 살고 있는 심충적 구조들이 창조되었다고 사실상 간주될 수 있는 신석기 시대가 문자와 같은 무언가를 경험하지 않았어야 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 명제. 레비스트로스가 모든 것이 문자 이전에 획득하였다는 가정 하에 한 말.

반대로, 문자의 발명 이후부터 현대과학의 탄생까지, 서양은 약 5천년 동안 살아왔으며, 이 기간 동안 지식은 증가되기보다는 표류해왔다. 

  우리는 이러한 주장이 그릇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또한 진실이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다분히 그것은 어떤 명분상의 필요상 아무 의미가 없는 질문에 답하는 것이리라. “현명한 사람은 참된 답을 제공하는 사람이 아니고, 참된 물음을 던지는 사람이다.” <<날것과 익힌 것 >> 지식의 양이란 무엇인가? 우리는 ‘현대 과학’ 이전 반 세기 동안에, 그리고 오늘날 매순간에 지식의 증가는 수천 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것을 무한히 능가했다. 이 점은 지식의 증대라는 면에서 그렇다. 표류의 개념은 그 자체가 완전히 경험적인 것으로 나타난다. 
 
세 번째 명제. “아마 문자가 없었다면, 19세기와 20세기에 이룩된 과학적 개화를 제대로 상상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필요조건은 그런 개화를 설명하는 데는 분명 충분하지 않다.” 그러나 문자가 과학의 ‘필요한 조건’이라는 것과 문자 없이는 과학도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일이 중요하며 레비스트로스는 이 점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리고 엄밀한 의미에서 19세기에 과학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것은 어렵기 때문에 대략적 추측에 불과하다는 멍에를 지게 된다.
  이런 측면은 레비스트로스가 과학의 문제가 문자의 기원과 기능에 이르기 위한 좋은 접근이 아닌지 신속하게 설명하려고 집착하고 있다는 점에 기인한다: “문자의 출현이 문명의 몇몇 특정한 성격들과 상관관계에 있는 것으로 주장하려면, 다른 방향에서 추구되어야 한다.” 문자의 기원은 ‘지적‘이라기보다는 ’사회학적‘인 필요성이 부합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사회학적 필요성이‘지배‘착취‘예속’‘불신’의 필요성이라는 점을 드러내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글을 적절하게 읽기 위해서는 그것을 층위별로 차별화해야 한다.
  “만약 나의 가설이 정확하다면, 문자로 씌어진 소통의 일차적 기능은 예속을 쉽게 하는 것이라는 점을 인정해야만 한다.” 첫 번째 수준에서 이 가설은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인지라 가설이란 명분에도 적합하지 않다. 오래전부터 우리는 소수, 즉 하나의 세습 특권 계급이나 계층의 손아귀에 있는 문자의 힘이 계급화, 우리가 정치적 차연이라 말할 수 있는 계급화와 동시대적이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계급화는 경제-기술-정치적 권력을 지닌 집단들, 계급들 그리고 이 권력의 수준들을 구분하는 것이며, 동시에 자본 축적의 기관에 맡겨진 지연된 힘으로서의 권위를 위임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정착 생활의 초기부터 농경 사회의 기원에서 식량저장이 이루어짐과 동시에 발생한다.
    이러한 측면은 우리를 두 번째 독서 수준으로 이끈다. 그것은 레비스트로스의 최후의 의도와 정치적 이데올로기를 드러낸다.  이 이데올로기는 우리가 ‘현전의 형이상학’이라 불렀던 것의 가장 훌륭한 예와 더불어, 마르크스주의적 가설의 이름으로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예속이라 불리게 되는 것이 또한 합당하게 해방이라 명명될 수 있다. 그런데 담론이 하나의 일정한 이데올로기가 그런 것이라면, 우리가 우려된다고 판단할 이데올로기로 마비되는 때는 (예속과 해방으로) 이처럼 왔다갔다하는 동요가 예속의 의미 위에 멈추는 순간이다. 이 텍스트에서, 레비스트로스는 계급화와 지배 사이에, 정치적 권위와 착취 사이에 어떠한 차이도 두지 않는다. 이러한 고찰을 지배하는 음조는 법과 억압을 의도적으로 혼동하는 무정부주의자의 음조이다. 정치권력은 부당한 힘의 보유자일 수 있다. 다른 주장에 따르면 법의 일반성은 반대로 국가에서 자유의 조건이다.

문자는---지배강화에 필요 불가결했을 것이다. 의무교육을 위한 유럽국가들의 체계적인 활동은 19세기에 전개되는데, 국방 의무 및 무산 계급화와 짝을 이룬다. 그리하여 문명퇴치와 권력에 의한 시민들의 통제강화가 하나가 된다. 이 권력이 어느 누구도 법을 몰라서는 안 된다고 말할 수 있기 위해서는 모두가 글을 읽을 줄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슬픈 열대>>)

  법과 국가를 단순하고 일방적 방식으로 규정하고 그것들을 하나의 윤리적 관점에서 단죄하기 위해, 그리고 그것들과 함께 문자· 국방 의무 및 무산 계급화의 확대, 정치적 의무의 일반화를 단죄하고 ‘어느 누구도 법을 몰라서는 안 된다’는 것을 단죄하기 위해 이 필연성을 방패로 삼는다는 것은 위와 같은 전제들로부터 전적으로 추론되지 않은 결과이다. 그럼에도 그 같은 결과가 추론된다면, 곧바로 비착취·자유 등과 같은 것은 군복무·공교육· 법 일반의 비강제적 성격 및 문맹과 ‘짝을 이룬다’고 결론을 내려야 한다.
  레비스트로스는 그 무정부적인 이데올로기의 영향을 받아 더 멀리 나아간다. 이 이데올로기의 반식민주의적이고 반민족 중심주의적 색채는 상당히 특이하다:
문자 보급과 같은 시도는 국가적 차원에서 국제적 차원으로 이동했다.  신생국가들과 부자들로 이루어진 국제 사회 사이에 맺어진 공모 때문이다. 부유한 서양 국제사회는 문자로 쓰일 수 있는 음성언어를 통해 의지에 따라서 변경될 수 있는 표현으로 사유할 수 있는 훈련이 덜된 민족들의 반응이 그들의 안정에 가져다줄 수 있는 위협을 걱정하고 있었다. ---도서관 속에 축적된 지식에 접근하면서 이들 민족들은 인쇄된 문헌 자료들이 더 큰 비율로 유포시키는 거짓말에 취약하게 노출되었다.    

  문자의 보급은 의지주의 심리학 개념들로 제시되고, 그것이 성립시키는 국제정치적 현상은 의도적이면서 의식적으로 꾸며진 음모라는 표현으로 묘사된다. 또한 이는 국가 일반과 신생국가들에 대한 비판이다. 우리는 ‘도서관 속에 지식’에의 접근, ‘인쇄된 문헌 자료들이---유포시키는 거짓말’에 대한 취약성이라고 일방적으로 규정된 그러한 접근에, 이러한 표현들이 오늘날 숨 쉬고 있는 이데올로기적 분위기를 기술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불평등 기원론>>의 유산이고(“따라서 모든 과학적 책들을 버려두고----인류 영혼의 가장 단순한 최초의 활동들에 명상하면서---.”“오 인간이여---내가 읽었다고 생각하는 그대의 역사가 여기 있노라, 거짓말쟁이인 그대의 동료들이 지닌 책들 속에서가 아니라, 결코 거짓말을 하지 않는 자연 속에서 읽은 그런 역사가---.”), <<에밀>>의 유산이며(“책의 남용은 과학을 죽인다---.”“너무나 많은 책이 우리로 하여금 세계라는 책을 소홀하게 만든다.”“책을 읽는 어린이는 생각하지 않는다.”등), <<사부아 지방의 보좌신부의 신앙 고백>>의 유산이고(“나는 모든 책을 덮어버렸다---.”) <<크리스토프 드 보몽에게 보내는 편지>>의 유산이다. (“나는 책속에서 진리를 추구했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서 거짓과 오류만을 발견했다.”)

  레비스트로스는 이와 같은 어두운 명상을 하고 난 후 그 ‘비상한 사건’으로 돌아온다. 추장의 기만과 문자에 대한 용기 있게 저항한 그 현명한 남비콰라족에 관한 찬양을 위한 것이다. 변화의 숙명적 흐름을 차단시킬 줄 알았고,‘약간의 유예猶豫를 마련한’사람들에 대한 찬양.
  결론 부분에서 두 개의 동기가 나타난다. ⓵ 진보의 형태 자체로서 필연적인, 아니 그 보다는 숙명적인 타락. ⓶ 이러한 타락 이전에 있었던 것에 대한 향수와 저항의 작은 섬들을 향하고 일시적으로 부패로부터 안전한 작은 공동체들에 대한 정서적 충동. 이 부패는 문자에 연결되고, 자신의 음성언어가 자기 현전 속에 결집된 민족의 분산과 결부된다.

아마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말한  남비콰라족 마을에서는 성격이 강한 사람들이 가장 현명했다.

  여기서 말하는 성격이 강한 사람들은 저항하는 자들이며, 추장이 속일 수 없었던 이들이며, 교묘함보다는 기개가 있고, 정신의 개방성보다는 진심어린 마음과 전통적인 긍지를 갖고 있었다.
  추장이 문명의 키드놀이를 시도한 후, 그와 결별한 사람들은 문자와 배신이 공모하여 조화롭게 살아가는 그들 세계에 침투했다는 것을 막연하게 이해했다. 보다 깊은 덤불숲으로 피신한 그들은 문명의 이기가 들어오는 것을 지연시키려고 발버둥쳤다.

  1)이 서론에서 우리는  폭력은 좁은 의미에서 문자의 출현을 기다리지 않았고, 문자는 이미 언제나 언어 속에 시작되었다고 환기하면서, 레비스트로스처럼 폭력은 문자라 결론내렸다. 그러나 이 명제는 근본적으로 다른 의미가 있다. 그것은 신화의 신화에 의지하는 것, 다시 말해 시원적으로 선한 음성언어의 신화와 이 음성 언에에 숙명적인 사고처럼 달려드는 폭력의 신화에 의지하는 것을 멈춘다. 말씀의 순진무구함 이후로 악 속에 타락했다는 관념에 이처럼 다소 공공연하게 준거함으로써 레비스트로스가 그 고전적이고 묵시적인 신학을 자기 것으로 삼고 있기 때문은 아니다. 다만 그의 민족학적 담론이 그런 신학 및 형이상학과 체계적으로 그리고 계보적으로 공모하고 있는 개념들· 도식들· 가치들을 통해 생산되고 있는 것이다.
  <문자의 가르침>을 믿는다면, 남비콰라족은 문자 이전에는 폭력을 알지 못하고, 계급화도 알지 못했다. (다음은 한 쪽 반에 걸쳐 문자 이전의 남비콰라족에 대한, 다시 말해 평화롭게 공존하는 공동체 생활에 대한 세 개의 묘사가 이어집니다.(242-243쪽 참고_발제자) 

  2)여기서 우리는 루소로 돌아오게 된다. 따라서 문자에 관한 이러한 철학을 심층에서 떠받치고 있는 이상은 차연없이 그 자체에 현전하는 공동체, 다시 말해 모든 구성원들이 말로 소통할 수 있는 음성 언어 공동체 이미지이다. 이 점을 확인하기 위해 <<구조 인류학>> 속에 편입된 하나의 텍스트를 참고할 것이다. 문자는 그 속에서 사회적 비진정성의 조건으로 규정된다:

타자와 우리의 관계는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것에 지나지 않으며 더 이상 총체적인 경험, 즉 한 사람의 주체가 다른 주체를 구체적으로 이해하는 행위에 토대를 두지 않는다. ---이제 우리는 개인들과의 체험된 접촉을 함축하는 구전을 통해서가 아니라, 도서관들에 쌓인 책을 통해서 과거와 연결된다.---우리는 온갖 매개물들_서면 자료들 혹은 행정적 매커니즘들 _을 통해서 동시대인들의 방대한 대다수와 소통한다.  이 매개물들은 우리의 접촉을 엄청나게 확장해주고 있지만, 동시에 이 접촉들에 비진정성의 특성을 부여하고 있다. ----문자가 인류에게 많은 복을 가져다 준 동시에 뭔가를 박탈했다는 것을 인식하는 것이 불가결하다.
 
  바야흐로 민족학자의 사명은 윤리적 의미를 함축한다. 자신의 작업 영역에서 ‘진정성의 수준들’을 식별하는 일. 그 기준은 ‘모든 사람이 서로 알고 있는’ 공동체 속에서의 ‘이웃’관계이다:
   
아마 미래의 후손들은 인류학이 사회과학에 공헌한 가장 큰 업적은 사회적 존재의 두 가지 유형을 도입한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다. 하나는 전통적이고 아주 오랜 것으로 당초에 인식된 생활양식으로서, 무엇보다도 진실한 사회들의 생활양식이다. 다른 하나는 최근의 형태들로서 최초 양식이 부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들 생활 형태들에서는 불완전하게 그리고 불충분하게 진실한 집단들이 보다 방대한 체계 안에 조직화되어 있으며, 이 체계 자체가 비진정성의 낙인이 찍혀 있다. (<<구조 언어학>>) 

 ‘크리스털 같은’구조를 갖고 있고, 전적으로 자기 자신에 현전하고, 가까운 이웃 관계 속에 결합된 이 소공동체의 모델은 아마도 루소적이라 할 것이다. 여러 텍스트들에서 이 모델을 확인할 터이지만, 현재로서는, <<언어 기원론>>쪽으로 방향을 돌려보자. 루소가 이 책에서 보여주는 것은 사회적 거리, 즉 이웃들의 분산이 억압·독단·해악의 조건이라는 것이다. <<언어 기원론>>은 우선적으로 근대 정치 기구에서 사회생활 및 정보의 구조들에 대해 우리를 경계시키고 있다. 그것은 충만한 언어가 지닌 웅변에 대한, 아니 그 보다는 어법에 대한 찬양이고, 돈 선전 책자(소책자)· 무장하고 제복을 입은 병사들과 같은 무언의 비개성적인 기호들에 대한 단죄이다:

언어들은 인간들의 필요욕구에 따라 자연적으로 형성된다. 이 필요욕구가 변화함에 따라 언어들은 변화하고 변질된다. 설득이 공권력을 대신했던 고대에는 웅변이 필요했다.---사회들은 마지막 형태를 취했다. 지배자들은 대포와 돈 없이는 아무것도 변화시키지 못하는 것이다. 그들은 돈을 내놓으라는 말 이외에는 민중에게 더 이상 할 말이 없으므로, 거리 모퉁이에 벽보를 붙이거나 집에 병사들을 보내 이 말을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아무도 모이게 해선 안된다. 백성들을 흩어져 있게 해야 한다. 이는 근대 정치의 첫 잠언이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모인 민중이 알아들을 수 없는 모든 언어는 노예 언어라는 것이다. 민중이 자유로운 상태에 있으면서 이런 언어를 말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제 20장, <언어와 정부와의 관계.)

  따라서 자기 자신에의 현존, 얼굴을 마주 대한 가운데 투명한 인접 그리고 음성의 직접적인 효력 등, 사회적 진실성의 이 같은 규정은 고전적이다. 이는 루소적이지만 , 이미 플라톤 철학을 계승하고 있고, 법·권력·국가 일반에 반대하는 무정부주의적이고 절대 자유주의적인 항의와 통하고 있으며, 19세기의 공상적 사회주의들의 꿈, 푸리에주의와 통하는 것이다. 따라서 민족학자 레비스트로스는 자신의 연구실 혹은 작업장에서 많은 것들 가운데 하나의 부품이나 도구처럼 이 꿈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민족학자가 ‘언제나 자기 자신의 무언가를 담아내는’ 집요한 동일 욕망에 봉사하면서, 이 도구는 다른 ‘응급수단’들과 타협을 해야 한다. 민족학자는 또한 프로이트주의자이자 마르크스주의자(그가 추종하는 마르크스주의는 그 비판적 작업이 ‘불교적 비판’과 대립되지도 모순되지도 않는 그런 ‘마르크스주의자’이다)이기를 원하고, 그 자신이 ‘통속적인 유물론’에 유혹받고 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브리콜라주의 유일한 취약성-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아닌가?- 은 그것이 만들어 낸 담론 어디에서나 정당화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신화적 사고는--- 옛 토양의 담론이 남긴 잔해들을 가지고 이데올로기적 궁전들을 건설한다.’(<<야생적 사고>>)
  일체의 브라콜라주와 단절하는 엔지니어라는 개념은 창조주의적 신학에 속한다. 다만 그런 신학만이 엔지니어와 브리콜뢰르 사이의 본질적이고 엄격한 차이를 신뢰할 수 있다.
  결국 ‘사회적 진실성’의 가치는 도덕성 일반의 가치에 있어 필요불가결한 두 중심축들 가운데 하나이다. 살아있는 음성 언어의 윤리는 완벽하게 존중될 수 있을 것이며, 그것이 유토피아적이든 비장소적(atopoque)이든 (즉, 공간화와 에크리튀르로서의 차연에서 해방된) 그 존중 자체로 존중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그것이 헛된 미끼와 자신의 근원조건에 대한 비존중으로 살아가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 같은 윤리가 문자 언어에서 부정된 현전을 음성 언어에서 꿈꾸지 않는다면 말이다. 음성 언어의 윤리는 억압된 현전의 미끼이다.
  음성언어에서 문자(에크르튀르)를 인지한다는 것, 다시 말해 음성 언어의 차연과 부재를 인지한다는 것은 미끼를 생각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타자의 존재 없이 윤리는 없으며, 따라서 또한 부재, 숨기기, 우회, 차연, 문자 등이 없이는 윤리는 없다. 원문자는 비도덕성으로서의 도덕성의 근원이다. 윤리의 비윤리적 개방성, 폭력적 개방성, 문자에 대한 통속적 개념에 대해 그렇게 했듯이, 도덕의 계보를 반복하기 위해서는 폭력의 윤리적 판단 기준을 엄격하게 지연시켜야 할 것이다.
  하므로 목소리가 미치는 효과에 대한 찬양, 문자의 멸시와 결합된 그 찬양은 루소와 레비스트로스에게 공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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