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뮨] 칼 맑스의 자본I_22장 발제
윤도현
/ 2017-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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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2장 잉여가치의 자본으로의 전화
제1절 확대된 규모의 자본주의적 생산과정. 상품생산 소유법칙의 자본주의적 취득법칙으로의 전화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사용되는 것을 우리는 흔히 자본의 축적이라고 일컫는다.
자본가치는 처음에는 화폐형태로 투하된 반면 잉여가치는 처음부터 총생산물 가운데 일정부분의 가치로 존재한다. 총생산물이 판매되어 화폐로 전화하면 자본가치는 다시 원래의 형태로 돌아가지만 잉여가치는 원래의 존재형태를 바꾸게 된다. 이 순간부터 자본가치와 잉여가치는 모두 화폐액이고 그것들이 자본으로 재전화하는 방식은 완전히 똑같다.
자본가는 이 둘을 모두 상품 매입에 투하하고 이 상품들은 그가 새로 자신의 제품을 제조하기 시작할 수 있도록 해준다.
- 상품들은 시장에 가기 전에 이미 연간 총생산물 속에 존재하고 있다. 시장에서 이루어지는 일은 그저 연간 생산물의 각 구성 부분들이 각기 매매되어 옮겨가는 것에 불과하며, 이 과정은 연간 총생산량을 증대시키거나 생산된 물건의 성질을 변화시킬 수도 없다.
- 연간 생산물은 그 해에 소비되는 물적 자본성분을 보전할 모든 물품을 공급해야만 하는데, 이 부분을 공제하고 나면 잉여생산물이 남는데 여기에 잉여가치가 포함되어 있다.
- 축적을 위해서는 잉여생산물 가운데 일부를 자본으로 전화시켜야 하는데 그것은 생산수단과 생활수단 뿐이다. 따라서 연간 잉여노동의 일부분은 투하자본 보전에 필요한 분량 이상의 추가적 생산수단과 생활수단 생산에 사용되어야만 한다. 한마디로 말해 잉여가치가 자본으로 전화할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잉여생산물이 이미 새로운 자본의 물적 성분들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 성분들이 실제 자본으로 기능하기 위해서 자본가계급은 추가적인 노동을 필요로 한다. 그런데 이미 고용된 노동자의 착취가 내외적으로 더 이상 증대될 수 없다면 추가적인 노동력이 매입되어야 한다. 이에 대해 자본주의 생산기구는 노동자계급을 임금에만 의존하는 계급으로 재생산하고 있으며, 이 계급의 통상 임금은 노동자계급의 유지와 증식을 보증하기에 충분하다. 다양한 연령층의 노동자계급이 공급하는 이들 추가노동력을, 자본은 그저 연간 생산 속 추가 생산수단에 결합시키기만 하면 되며, 잉여가치의 자본으로의 전화는 그것으로 완료된다. 축적은 규모가 누진적으로 증대하는 자본 재생산으로 귀착된다.
- 제1의 추가자본을 구성하는 잉여가치가 초기 자본의 일부분으로 노동력을 매입한 결과였다면, 제2의 추가자본과 그 이후의 추가자본이 단지 제1 추가자본의 결과일 뿐이고 따라서 그 최초 관계의 귀결이라면, 뿐만 아니라 하나하나의 거래가 지속적으로 상품교환 법칙에 따르면서 자본가는 늘 노동력을 매입하고 노동자는 늘 그것을 판매한다면 분명 상품생산과 상품유통에 따른 취득 법칙이나 사적 소유 법칙은 그 자신의 내적인 변증법에 따라 정반대의 결과를 가져올 것이다.
- 노동력과 교환된 자본 부분 그 자체가 단지 등가 없이 취득한 타인의 노동생산물 가운데 일부에 지나지 않고, 이 자본 부분은 그 생산자인 노동자에 의해 보전되어야 하므로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교환관계는 오직 유통과정에 속하는 피상적인 형식에 지나지 않게 된다. 끊임없이 되풀이되는 노동력 매매는 바로 그런 형식일 뿐이다.
- 그 내용은, 자본가가 계속적으로 등가 없이 취득하는 타인의 노동 가운에 일부를 계속해서 더 많은 타인의 노동으로 전화시킨다는 데 있다. 처음에는 소유권이 자신의 노동에 기초해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나, 소유는 이제 자본가 입장에서는 타인의 불불노동을 취득하는 권리로 나타나고, 노동자 입장에서는 자신의 생산물을 취득할 수 없는 조건으로 나타난다.
- 따라서 자본주의적 취득양식은 원래의 상품생산 법칙들과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런 모순은 이들 법칙이 훼손되면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들을 적용함으로써 발생한다. 노동력을 산 자본가는 자기 것이 된 노동의 힘을 빌려 이미 자신이 소유하고 있던 생산수단을 새로운 생산물로 전화시키고 이 생산물은 법률적으로 그의 소유가 된다.
- 특수한 상품인 노동력이 노동을 공급한다는 독특한 사용가치를 지녔다고 해서 그것이 상품생산의 일반적인 법칙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임금에 투하된 가치액이 생산물을 통해 재현되고 또한 잉여가치만큼 증가되어 나타나는 것은 단지 구매자가 이 상품을 소비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되는 것일 뿐이다.
- 교환법칙은 서로 양도되는 상품들의 교환가치가 동등해야 한다는 것만을 그 조건으로 하고, 처음부터 이 상품들의 사용가치가 상이함을 그 조건으로 하며, 거래가 끝난 뒤에 비로소 시작되는 이들 사용가치의 소비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 그러므로 화폐가 자본으로 처음 전화하는 과정은 상품생산의 경제적 법칙들은 물론 그것들에서 파생되는 소유권과도 정확하게 일치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그럼에도 이 전화는 다음과 같은 결과를 낳는다.
① 이 생산물은 자본가의 소유가 되고 노동자의 소유는 되지 않는다.
② 이 생산물의 가치는 투하자본 가치 외에 잉여가치를 포함하고 있으며, 이 잉여가치를 위하여 노동자는 노동을 소비하고 자본가는 아무것도 소비하지 않았지만 그것은 자본가의 합법적인 소유가 된다.
③ 노동자는 계속 자신의 노동력을 보유하고 있고 구매자를 발견하면 다시 그것을 판매할 수 있다.
- 단순 재생산은 그저 이 최초 과정이 주기적으로 반복되는 것이며, 이 법칙은 파괴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작동할 기회를 가질 뿐이다.
- 임노동이 상품생산의 기초가 되는 그 때부터 상품생산은 사회 전체에 강제력으로 작용한다. 상품생산이 그 자체의 내재적 법칙들에 의해 자본주의적 생산으로 발전해감에 따라 상품생산의 소유법칙은 자본주의적 취득법칙으로 전화한다.
제2절 확대된 규모의 재생산에 관한 잘못된 경제학적 견해
- 자본가가 잉여가치의 일부분으로 자신의 소비를 위해서 구입한 상품이 그에게 생산이나 가치증식 수단으로 사용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가 자신의 갖가지 자연적·사회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하여 구입한 노동은 생산적 노동이 아니다. 이런 상품이나 노동을 구매함으로써 그는 잉여가치를 자본으로 전화시키는 대신 그것을 수입으로 소비하거나 지출한다.
- 다른 한편 부르주아 경제학은 자본주의적 생산을 화폐축장과 혼동하고 축적된 부를 그 현존하는 현물 형태의 파괴[소비]를 모면한[또는 유통에서 구출된] 부라고 생각하는 편견과 싸워야했다.
- 화폐를 유통시키지 않고 묶어두는 것은 화폐를 자본으로 전화시켜 가치를 증식시키는 일과 정반대 행동이며, 단순히 축장을 위해 상품을 축적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에 지나지 않는다. 대량 상품축적은 유통 정체나 과잉생산의 결과다.
- 그러므로 고전파 경제학이 만일 비생산적 노동자가 아니라 생산적 노동자에 의한 잉여생산물 소비를 축적과정의 특징적인 계기로 강조한다면, 그것은 맞는 얘기이다. 그러나 바로 여기서 고전파 경제학의 오류가 또 다시 시작된다. 애덤 스미스는 축적을 단지 생산적 노동자에 의한 잉여생산물 소비로 설명했다.
- 이런 생각에 따르면 자본으로 전화하는 잉여가치는 모두 가변자본이 될 것이다. 그러나 노동력은 자신의 기능을 통해서 생산수단을 소비하는 동시에 노동력 구매를 위해 지불된 화폐는 생활수단으로 전화하고 이 생활수단은 ‘생산적 노동’이 아니라 ‘생산적 노동자’가 소비한다. - 애덤 스미스는 완전히 전도된 분석을 통해서 모든 개별 자본이 불변성분과 사변성분으로 나누어진다고 해도 사회적 자본은 오직 가변자본(임금 지불)으로만 지출된다는 어리석은 결론에 도달했다.
- 연간 총생산 기금만을 고려한다면, 연간 재생산 과정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연간 생산의 모든 성분은 상품시장으로 다시 나와야 해서 여기에서 난관이 시작된다.
- 순생산물 중에서 자본으로 전화하는 부분은 모두 노동자계급이 소비한다고 하는 애덤 스미스의 명제를, 경제학이 자본가계급을 위해 이용해먹었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 없다.
제3절 잉여가치의 자본과 수입으로의 분할. 절욕설
- 잉여가치 가운데 일부는 자본가가 수입으로 소비하며 나머지 부분은 자본으로 사용되거나 축적된다.
- 잉여가치의 양이 주어져 있다면 이 부분 가운데 어느 한 부분이 적어지면 다른 부분은 그만큼 커질 것이다. 이 분할은 잉여가치의 소유자 즉 자본가가 수행하며, 자본가의 의지행위이다.
- 가치증식의 광신자인 자본가는 가차없이 인류에게 생산을 위한 생산을 강요할 뿐만 아니라 물적 생산조건의 창조 까지 강요한다. 오로지 인격화된 자본으로 존재할 때만 자본가는 존중받는다.
- 이런 존재로서 그는 화폐축장자와 똑같이 절대적으로 부유해지고자 하는 욕망을 품는데, 화폐축장자에게는 개인적 광기로 나타나던 것이 자본가에게는 사회적 메커니즘 작용으로 나타나며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는다. 또한 경쟁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갖가지 내재적 법칙을 개별 자본가들에게 외적인 강제법칙으로 강요한다.
- 자본주의 생산양식의 역사적 초창기에는 치부의 충동과 탐욕이 절대적인 열정으로 지배한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생산의 진보는 향락의 세계만 창조하지 않고 투기와 신용제도를 비롯하여 무수히 많은 벼락치부의 원천을 개방한다.
- 자본가는 화폐축장자와 달리 자신의 노동이나 절약에 비례해서 부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 타인의 노동력을 얼마나 착취하고 또 노동자에게 인생의 온갖 향락을 얼마나 억제하도록 강요하는가에 따라서 부를 이룬다.
- 그러나 고전파 경제학에서 프롤레타리아가 단지 잉여가치를 생산하기 위한 기계로서만 간주될 뿐이라면, 자본가도 역시 잉여가치를 잉여자본으로 전화시키기 위한 기계로만 간주될 뿐이다. 고전파 경제학은 자본가의 역사적 기능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 자본가들은 오로지 생산, 생산의 확대만을 주장하며 축적에만 전념하도록 하는 것이 공정하지 못하다고 여기는 한편, “노동자를 계속 근면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될 수 있는 대로 노동자를 최저임금에 묶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근로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절욕을 요구한다. 노동과정의 모든 조건은 그때부터 자본가의 절욕행위로 전화한다.
제4절 잉여가치의 자본 및 수입으로의 비례적 분할과는 무관하게 축적규모를 결정하는 여러 요인 : 노동력의 착취도, 노동생산력, 사용되는 자본과 소비되는 자본 간 차이의 증가, 투하자본의 크기
- 잉여가치율은 첫째, 노동력 착취도에 달려있다. 경제학은 이 역할을 너무 높이 평가한 나머지 때로는 노동생산력 증대로 인한 축적속도 증가를 노동자에 대한 착취의 층대로 인한 축적 속도 증가와 동일시하기도 한다.
- 그러나 실제 운동에서는 임금을 노동력 가치 이하로 강제로 인하하는 것이 아주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 인하는 사실상 일정한 한계 내에서 노동자의 필요소비기금을 자본의 한 축적기금으로 전화시킨다.
- 어떤 산업부문이든 불변자본 가운데 노동수단으로 이루어지는 부분은 투자규모에 따라 결정되는 노동자 수에 비해 충분해야 하지만, 그것이 반드시 사용노동량과 같은 비율로 증가할 필요는 없다. - 어떤 공장에서 100명의 노동자가 8시간 노동으로 800 노동시를 공급한다고 할 때, 자본가가 노동시를 50% 증가시키고자 한다면 새로운 노동자를 고용하고 임금 뿐 아니라 노동수단에 대해서도 새로운 자본을 투하해야 한다. 그러나 기존 노동자 100명을 8시간에서 12시간으로 일을 시킬 수도 있다.
- 자본은 부의 두 본원적 형성주체인 노동력과 토지를 자신과 결합시켜 팽창능력을 획득하는데, 이를 통해 자본은 자본 자신의 크기에 따라 설정된 것처럼 보이는 한계를 넘어서서 자신의 축적요소들을 확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