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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공백] 서정주편 후기 (2017. 7. 11.)
최원 / 2017-07-13 / 조회 1,3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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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공백 세미나 후기: 서정주 편

 

세미나에서 저희는 <자화상>, <화사>, <부활>, <서풍부>, 이렇게 총 네 편의 시를 놓고 토론을 했습니다.  

 

서정주의 <자화상>은 대가의 면모를 보여주는 시라는 평이었고, 특히 첫 연의 첫 행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어도 오지 않았다”, 그리고 둘 째 연의 첫 행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는 모두 충격적이고 시인의 과감성을 드러내 보여준다는 데에서 의견이 일치했습니다. 그 두 행은 모두 자신이 고귀한 기원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의 인정 또는 자신의 기원의 부재의 인정이자 동시에 자신의 기원은 자기 자신이라는 것에 대한 선언으로 보입니다. 아무도 자신을 돌봐주고 후견인이 되어주지 않는 상황에서 시인은 홀로 세상과 온 몸으로 부딪히며 살아야 했고, 따라서 거기서 살아남기 위해 이런저런 부끄러운 일들을 해야 했고 그것들이 부끄러운 일들임을 잘 알고 있지만, 그리고 다른 이들이 그것들을 확인해주기까지 하지만, 그러나 시인은 “나는 아무 것도 뉘우치지 않을런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실존을 긍정하는 것이지요. “뉘우치지 않을런다”의 의미를 둘러싸고 여러 해석이 있었는데, 한 편으로는 역설적 표현으로 뉘우치지 않음으로써 자신의 잘못을 오히려 잊지 않겠으며 계속 부끄러워 하겠다는 뜻일 수 있다는 해석이 있었고, 또 다른 한 편으로는 시인이 생존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그 잘못들을 부인할 수밖에 없다는 뜻일 수 있다는 해석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둘은 서로 양립불가능한 해석은 아닌 듯합니다. 헤겔은 한 번 “아름다운 영혼”에 대한 비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아름다운 영혼은 타락한 세상에 대해 도덕적인 비판을 하면서 자신의 도덕적 순수성을 지키려고 하는 영혼이지요. 하지만 헤겔은 바로 이런 거리두기야말로 세상에 존재하는 악함 내지 타락을 변화시키지 못하는 무기력한 것에 불과한 것이라고 말합니다. 세상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스스로 그 세상 속에 뛰어 들어야 하고 그 안에서 더러운 것들을 만지고, 심지어 그것과 타협하면서, 그것을 변화시킬 기회를 찾아내야 한다는 것이지요. 이 시에서 서정주가 갖고자 하는 태도는 바로 이런 세상 속으로 뛰어듬의 태도가 아닌가 여겨집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3연에서 “이마 위에 얹힌 시의 이슬에는/언제나 몇 방울의 피가 섞여 있어/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을 늘어뜨린/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고 말하는 것 같습니다. 그의 시는 이슬처럼 맑고 투명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그 안에는 몇 방울의 피가 섞여 있다는 말, 그의 삶은 병든 수캐의 삶이라는 말은 그가 세상을 관조하는 자가 아니라 세상과 부딪히며 살아가는 자라는 점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시인의 태도는 때로 자신의 잘못과 타협의 알리바이가 되는 것은 아닐까요?

 

그의 시 <화사>는 매우 에로틱한 시이자 서정주 자신이 보들레르의 악마주의의 영향을 받아 썼다고 한 시입니다. 그런데 이 시는 매우 충격적인 기법으로 색의 대조 등을 통해 자신의 성적 욕망을 드러내고 또한 긍정하는 시이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동시에 남성적 성욕에 대한 어떤 반성적 사유도 가지고 있지 않은 시일 수 있다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보통 남성들이 자신들이 저지르는 성폭력에 대해 그건 남자들의 본능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변명하는 것과 별반 다를 바 없는 인식(이른바 일베적 인식)이 시인에게서 보이고 있는 것 같습니다. “스며라, 배암!”에서 “스며라”라는 말은 그런 자신의 폭력적 일방성을 무마시키기 위한 표현이라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끝으로 시인 자신의 말과는 달리 이 시는 보들레르의 악마주의와는 좀 거리가 멀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또 다른 시 <서풍부>는 서정주가 1941년에 쓴 시로 이 시를 쓰면서 그는 친일로 전향을 했다고 합니다. 이 시의 첫 년에서 시인은 “서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오갈피 상나무와/개가죽 방구와/나의 여자의 열두발 상무상무”라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서녘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밀려오는 서방문화를 말하며 그 속에서 상모마냥 마구 돌아가며 혼란스러워 하는 전통문화의 방황이 느껴집니다. 2연에서 이러한 방황은 “홰냥노루”라는 말로 표현되기도 하지요. 가장 멋진 표현을 보여주는 3연 “서서 우는 눈먼 사람/자는 관세음”은 그런 방황 속에서 눈이 멀어 슬퍼하고 있는 시인 자신, 그리고 그 혼란에서 자신을 구원해줄 유일한 존재인 관세음이 잠을 자고 있는 상황에 대한 절망이 드러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서녘에서 불어오는 바람 속에는/ 한바다의 정신ㅅ병과/징역시간과”라고 다시 한 버 자신의 방황을 토로하고 있지요. 결국 이 시를 쓰면서 시인은 친일의 길을 가기로 한 듯한데, 한 편으로 너무 오랜 일제강점 기간을 보내고 모든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에 그런 길을 가게 된 것이 이해되는 면도 있다는 평가도 있었습니다. 영화 <밀정>에 나온 친일파 이정재가 나중에 왜 친일을 했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일제로부터 조선이 그렇게 빨리 해방될 줄은 몰랐다”고 말하던 부분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졌는데, 잠깐 배우 자체에 대한 팬심을 드러내는 모습들이 보였고 그러자 더욱 논의가 활기를 띠는 것 같다는 느낌도 살짝 들었지만 그건 아마 저의 착각이었겠지요.  

 

<부활>이라는 시는 하지만 조금 다른 정서를 가지고 있는 듯합니다. 사랑하는 “순이”에 대한 애도의 정서가 매우 절절하게 흐르는 시라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특히 “종로 네거리에 뿌우여니 흩어져서 뭐라고 조잘대며 햇볕에 오는 애들./그 중에도 열아홉 살쯤 스무 살쯤 되는 애들. 그들의 눈망울 속에, 핏대에, 가슴속에 들어앉아 순아! 순아! 순아! 너 이제 모두 다 내 앞에 오는구나”가 시인의 사무치는 그리움을 너무나 잘 표현한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젊었을 때 쓴 <자화상>이 적어도 어떤 패기가 느껴져서 가장 마음에 들었습니다.  

 

(후기 작성: 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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