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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차이와 반복》서론: 반복과 차이(pp56-83) ​ +1
namu / 2017-07-13 / 조회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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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제:《차이와 반복》서론: 반복과 차이(pp56-83) ​​​​​

 

4절 반복은 개념의 동일성이나 부정적 조건으로만 설명되지 않는다

 

◎반복에 대한 설명의 불충분성

 자연적 봉쇄의 세 가지 경우: ⓵이산 ⓶소외 ⓷억압. 이들 각각은 명목적 개념들, 자연의 개념들, 자유의 개념들에 상응한다. 첫 번째 경우, 반복이 성립하는 것은 명목적 개념이 본성상 유한한 내포를 지니기 때문이다. 두 번째 경우, 반복이 성립하는 것은 자연의 개념이 본성상 기억을 결여하고 소외되어 있으며 자신의 바깥에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 경우는 자유의 개념이 무의식 상태에 놓여 있고 기억내용과 표상이 억압되어 때문에 반복이 성립한다. 이 모든 경우들에 반복하는 것은 오로지 ‘포괄’하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덕분에 반복한다. 회상하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의식하지 못하므로 반복을 행하는 것이다. 어디에서건 반복을 정당해준다고 간주되는 것은 개념의 불충분성이자 그 개념의 표상에 동반하는 것들(기억과 자기의식, 재기억과 재인)의 불충분성이다.
  자연적 봉쇄 자체를 설명하기 위해서, 그리고 동시에 그 봉쇄를 통한 반복을 설명할 수 있기 위해서는 초-개념적 성격의 어떤 실증적인 힘이 필요한 것이다.
     
‘죽음본능’의 기능들 : 실증적 원리를 요구하는 반복(자유의 개념을 사례로)

 

  프로이트 사상의 거대한 전환점은 <<쾌락원칙을 넘어서>>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죽음본능이 발견되는 것은 파괴적인 경향들 때문도 아니고 공격성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다만 반복의 현상들을 직접적으로 고려하는 가운데 발견된다. 기이하게도 죽음본능은 반복을 설명하는 근원적이고 실증적인 원리의 자리에 오른다. 죽음본능의 고유한 영역과 의미는 바로 반복에 있는 것이다. 쾌락원칙이 단지 심리학적 원리에 불과한 반면, 죽음본능은 어떤 초월론적 원리의 역할을 감당한다. 죽음본능은 어떤 형식을 통해 반복을 긍정하고 명령하는가? 가장 심층적인 문제는 반복과 위장僞裝의 관계에 있다. 위장과 이형異形들, 가면이나 가장복假裝服들은 ‘겉에서부터’ 덮어씌우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거꾸로 그것들은 반복 자체의 내적인 발생 요소들, 반복을 이루어내고 구성하는 부분들이다. 이 길을 통해서 무의식의 분석은 어떤 참된 연극으로 행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프로이트는 거기에 이르지 못하고  김빠짐 반복의 모델을 끝내 유지하게 되는데.) 이는 프로이트가 고착을 이드에 귀속시킬 때 분명히 엿볼 수 있다. 이때 위장은 힘들 간의 단순한 대립에 입각해서 이해된다. 위장된 반복은 자아와 이드의 대립적인 힘들 간의 이차적 타협의 산물에 불과하다. 심지어 쾌락원칙의 저편에서 조차 헐벗은 반복의 형식이 존속하는 것이다. 프로이트가 전적으로 물리적이거나 물질적인 반복의 모델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죽음본능을 무기적인 물질 상태로 되돌아가려는 어떤 경향으로 해석하기 때문이다.

  죽음은 물질적 모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반면 죽음본능을 가면이나 가장복들에 대한 정신적 관계 안에서 이해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반복이란 자신을 구성해가는 가운데 스스로 위장하는 것 스스로 위장함으로써만 자신을 구성하는 어떤 것이다. 반복은 가면들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 가면 저 가면으로 옮겨 가면서 자신을 형성한다. 마치 하나의 특이점에서 다른 특이점으로, 하나의 특권적 순간에서 다른 특권적 순간으로 이행하듯이 자리를 옮겨 가면서, 변이형들과 더불어 그리고 변이형들 안에서 자신을 형성한다. 가면들이 가리는 것은 다른 가면들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반복되어야 할 최초의 항이란 것은 없다.
  가면이야말로 반복의 참된 주체다. 반복은 본성상 재현이나 표상과 다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반복되는 것은 표상될 수 없다. 다만 자신을 지시하는 것을 통해 지시되긴 하나 이내 다시 가려질 뿐이다.
나는 억압하므로 반복하는 것이 아니다(“억압하기 때문에---반복한다”―정신분석 사례). 나는 반복하므로 억압하며 반복하기 때문에 망각된다. 내가 억압한다면, 그것은 오로지 반복의 양태를 통해서만 특정한 사물이나 경험들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식의 체험을 방해하는 것을 억압하는 본성을 지녔다. 다시 말해서 나는 체험된 것을 동일성이나 유사성을 띤 어떤 대상의 형식에 맞추어 매개하는 표상을 억압하도록 결정되어 있다.   
  반복하는 일을 멈추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 프로이트는 이에 대해 기억내용이 머물렀던 그곳에서 기억을 찾고 곧장 과거 안에 자리 잡은 가운데 앎과 저항, 표상과 봉쇄를 생생히 결합시켜야 한다고 보았다. 이는 치유행위라기 보다는 연극적이고 드라마 같은 작업이다. 이러한 작업과정을 전이轉移라고 명명하며, 이것이 바로 반복이다. 즉 반복이 우리를 병들게 한다면, 치료하는 것도 역시 반복이다. 이러한 전이는 확실히 과학적 실험과 유비적 측면이 있다. 인위적 조건 안에서 반복을 가정한다. 그러나 전이에게 정작 중요한 것은 동일한 사태의 확인이 아니라, 역할을 인증하고 가면을 선별하는 데에 있다. 전이는 분석적 경험 전체의 근거를 마련해주는 어떤 원리이다. 역할을 인증하는 시험은 죽음본능이라는 보다 높은 원리, 심층적 재판관에 의해서이다. 전이에 대한 성찰은 쾌락원칙을 넘어서서 ‘저편’을 발견하도록 유도한 결정적 동기였다. 이런 의미에서 반복은 스스로 우리의 병과 건강, 우리의 타락과 구원을 선별하는 유희로 자신을 구성해간다.
  “나는 내가 자유로웠다는 것을, 내가 경험했던 죽음이 나를 자유롭게 해주었다는 것을 깨닫는다.”(밀러)
  죽음본능이라는 관념은 세 가지 상보적이고 역설적인 요구들에 입각해서 이해되어야만 한다. 그 세 가지는 ⓵반복의 실증성을 띈 원천적 원리의 자격을 부여하는 것, ⓶반복에 어떤 자율적 위장의 역량을 부여하는 것, ⓷반복에 어떤 내재적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5절 두 가지 반복 : 개념의 동일성과 부정적 조건에 의한 반복, 이념 안의 차이와 과잉에 의한 반복(자연적 개념과 명목적 개념을 사례로)

 

◎자연적 개념으로서 반복의 실증적 원리: 대칭의 결여로서의 비대칭의 요소

 

왜 반복은 개념이나 재현 안의 동일성 형식에 의해서는 설명될 수 없는가? 어떤 의미에서 반복은 우월하고 월등한 어떤 ‘실증적’ 원리를 요구하는가?  일단 두 경우의 경계에 있는 장식의 모티프로부터 생각해보자. 여기서 하나의 도형이 절대적으로 동일한 어떤 개념 아래에서 재생산된다. 하지만 예술가는 그런 식으로 작업하지 않는다. 그는 매순간 한 표본의 한 요소를, 뒤따르는 표본의 또 다른 요소와 결합한다. 역동적인 구성의 과정 속에 어떤 불균형, 불안정, 비대칭, 일종의 입벌림 현상  등을 끌어들인다. 이런 요소들은 오로지 총체적인 결과에서만 사라진다. 예술적 인과성과 자연적 인과성에서 중요한 것은 대칭적 요소들이 아니라 원인 안에 결여된 요소들, 원인 안에 있지 않은 요소들이다. 이는 논리적 인과범주를 넘어서는 것이다. 원인이 결과보다 대칭을 적게 가진다는 가능성의 경우에는 원인이 결과보다 완전하고 안정적이어야 한다는 논리적 원칙을 벗어나는 것이다. 논리적 관계가 실제적으로 실현되기 위해서는 ‘신호화’라는 물리적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 과정 안에서 비대칭적 요소를 갖추고 불균등한 크기의 질서들을 거느리고 있는 하나의 체계를 ‘신호’라고 부르고, 불균등한 것들 사이에 성립하는 소통방식을 ‘기호’라고 부르게 된다. 여기서 대칭의 결여로서 신호화는 인과과정의 기원이자 반복의 실증적 원리이다. 기호는 그러한 신호화의 원리가 생산된 비대칭의 표현이자 비대칭이 소멸된 대칭으로서의 가면의 예비이다.
 인과성을 분해하면 두 가지 유형의 반복이 나온다. 하나는 추성적인 총체적 결과로서 정태적인 반복이고 다른 하나는 작용 중의 원인으로서의 동태적 반복이다. 정태적 반복은 표본들의 똑같은 개념 반복이고, 동태적 반복은 어떤 내적 차이의 반복이다. 동태적 반복은 각각의 계기들 안에 내적 차이를 포함하며, 그 차이를 한 특이점에서 또 다른 특이점으로 운반한다. 재현적 성격의 개념은 미리 역동적인 실존 공간에서는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재현이 실존의 역동성에 근거하고 있다.
  이러한 이중성은 리듬 연구나 대칭 연구에서 확증된다. 먼저 대칭은 등차적 대칭과 등비적 대칭으로 나뉜다. 등차적 대칭은 정수적 계수나 분수적 계수를 가리킨다. 등비적 대칭은 무리수적 비례나 관계들에 기초한다. 전자는 정태적 대칭(입방체, 육각형)이고 후자는 역동적 대칭(나선형의 선운동, 등비수열적 파동, 진화)이다. 등비적 대칭이 등차적 대칭의 중심부에 있다. 등비적 대칭은 등차적 대칭의 심장이자 능동적 기법이고 실증적 절차이다. 등비적 대칭은 제곱의 형태로 발전하는 그물 안에서 어떤 방사하는 선들이 발견된다. 이 선들은 대칭 없는 선들로 방사상 형태이며 그물은 뼈대를 덮는 천과 같다. 그물은 대칭을, 방사하는 선들은 비대칭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인다. 대칭적 성격의 전체의 발생 원리이자 성찰원리가 비대칭의 요소라는 의미이다. 리듬연구도 마찬가지로 박자-반복과 리듬-반복으로 구분될 수 있다. 박자-반복은 규칙적 분할이며 동일한 요소들의 등시간적 회귀이다. 그러나 악센트가 동등한 간격으로 재생된다는 것은 악센트 기능의 오해이다. 악센트는 강도의 지배를 받는다. 강도는 어떤 비동등성과 통약 불가능성들을 창조하면서 작용하는 음가音價의 원리이다. 여기서도 동등하지 않은 것이 가장 실증적이다. 박자는 단지 외피일 뿐, 다多 리듬의 어떤 특이점이 더 근원적이다. 과학에서 말하는 공전公轉주기도 진화의 주기와 가변 곡률曲律의 나선螺線들을 드러내면서 비대칭적인 측면을 가진다.

 

◎명목상 개념으로서 반복의 실증적 원리

명목상 개념에서도 반복의 실증적 원리가 있을까? 단어의 반복에서 각운은 구두적口頭的 반복이다. 두 단어 사이의 차이를 포함하고 있는 반복이며, 차이를 시적 이념 안에 기입하는 반복이다. 각운은 음색의 길이들을 강세적 리듬에 봉사하도록 만들어서 산술적 리듬으로부터 독립하도록 돕는다. 똑같은 단어의 반복인 ‘일반화된 각운’은 두 가지 기법으로 분석할 수 있다. 하나는 두 가지로 취해진 한 단어가 두 의미 사이의 역설적인 유사성이나 동일성을 담보하는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단일한 의미로 차용된 한단어가 주변 단어에 인력引力을 통해 중력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강력한 중력이 인접한 단어들을 순서화하면서 반복시킨다.
  평범한 단어들의 수평적인 반복을 특이점들의 반복, 수직적 반복으로 대체한 두 명의 문학자: 레이몽 루셀과 샤를 페기. 레이몽 루셀은 언어의 병리적 역량을 예술적 차원으로 끌어올렸다. 이중의 의미를 지니는 단어나 동음이의어들에서 출발해 그 단어 의미 사이를 이야기와 두 번 제시되는 대상들을 통해 메워간다. 고유한 영토를 넘어 최대치의 차이를 반복 안에 단어의 중심에서 열리는 공간 안에 기입한다. 모든 것이 일단 말해지고 난 이후 모든 것이 반복되고 다시 시작된다. 페기의 기법은 다르다. 반복을 통해 이음동의어를 대체한다. 인접성의 기능이라고도 부르는 이 기법은 언어 이전의 언어, 여명의 언어를 형성한다. 모든 미세한 차이들에서 출발하여 점진적으로 단어들의 내면적 공간을 산출하는 절차를 볼 수 있다. 페기와 루셀은 서로 다른 방향에서 언어를 한계로까지 이끌어가고 있다. 명목적 개념이나 구두적 재현의 결핍을 언어학적이고 문체론적인 이념의 과잉에서 오는 어떤 실증적인 반복으로 대체하는 것이다. 언어는 죽음을 통해 영감을 얻게 된다.
  배움은 표상에서 행위로 이어지는 관계(같음의 재생산처럼) 안에서 성립하지 않고, 기호에서 응답으로 이어지는 관계 (다름과 부딪히는 마주침처럼)에서 성립한다. 기호는 세 가지 관점에서 다질성을 포함한다. 첫째, 기호를 담지하거나 발산하는 대상 안에서, 대상은 불균등한 어떤 수준의 차이를 드러낸다. 둘째, 기호 그 자체 안에서 차이를 드러낸다. 대상을 그 경계 안에서 다른 대상을 봉인하고 있고, 자연과 정신의 어떤 역량을 구현하고 있다. 셋째, 기호가 재촉하는 응답 안에서 응답의 운동은 기호의 운동과 유사하지 않다. 예를 들어, 수영하는 사람의 운동은 물결의 운동과 닮지 않았다. 우리가 그 물결의 운동에 대응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은, 실천적 상황 안에서 그 운동들을 어떤 기호들처럼 파악할 때나 가능한 일이다. “나처럼 해봐”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해보자”라고 하는 사람에게서 비로소 배울 수 있다. 기호의 발신과 응답. 신체는 자신의 특이점들을 물결의 특이점들과 조합할 때 어떤 반복의 원리와 관계를 맺는다. 이 반복은 다름을 포괄하는 반복이고, 하나의 물결과 몸짓에서 또 다른 물결과 몸짓으로 이어지는 차이를 포괄하는 반복, 이 차이를 그렇게 구성된 반복의 공간으로 운반하는 반복이다. 배운다는 것은 어떤 기호들과 부딪히는 마주침의 공간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헐벗은 반복과 옷 입은 반복(반복의 두 가지 형식)
 
헐벗은 반복 옷 입은 반복   
차이는 개념에 외부적인 것으로 설정 차이는 이념의 내부에 있음    
무차별성을 띤 시간과 공간  역동적인 시간과 공간을 창조하는 어떤 순수한 운동   
같음의 반복 자신 안에 차이를 포괄   
개념이나 재현의 동일성 스스로 이념의 타자성 안에, 어떤 간접적 현시의 다질성 안에 포괄됨   
개념의 결핍에서 성립하는 부정적 반복 이념의 과잉에서 성립하는 긍정적 반복   
가언적 정언적   
정태적 동태적   
결과 안에서 일어남 원인 안에서 일어남   
외연 안에서 일어남 강도적   
평범하다 특이하고 독특하다   
수평적 수직적   
개봉되고 설명되어야 함 봉인되어 있고 해석되어야 함   
공전(公轉)의 성격 진화의 성격   
동등성, 통약 가능성, 대칭성  비동등성, 통약불가능성, 비대칭성   
물질적 정신적   
생기가 없음 우리의 죽음과 삶들 우리의 속박과 해방들 악마적인 것과 신적인 것의 비밀을 간직하고 있음   
정확성 진정성 


이 두 가지 반복은 서로 독립적이지 않다. 하나는 특이한 주체이고, 다른 하나의 심장이자 내부이며 그것의 깊이다. 다른 하나는 단지 겉봉투, 추상적 결과일 뿐이다. 비대칭적 반복이 대칭적 총체나 효과들 안으로 숨어든다. 특이점들의 반복은 평범한 점들의 반복 아래서 일어난다. 도처에서 다름은 같음의 반복 안에서 발생한다. 이것이 가장 심층적이고 비밀스러운 반복한다. 오직 이 반복만이 또 다른 반복의 이유를, 개념이 봉쇄되는 이유를 제공한다. 헐 벗은 것의 진실은 가면, 위장된 것, 가장복假裝服에 있다. 이는 필연적으로 그렇다. 반복은 다른 사태에 의해 은폐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위장하면서 자신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반복은 이런 자신의 고유한 위장들에 앞서 미리 존재하지 않으며, 자신을 형성하는 가운데 헐벗은 반복 - 자신을 봉인하는 반복 -을 구성해낸다.

6절  개념적 차이와 개념 없는 차이

우리가 차이를 개념적 차이, 내생적으로(intrinsically, 개념 안에서 성립하는) 개념적인 차이로 파악한다면, 그리고 반복을 어떤 외생적(extrinsically, 개념 밖에서 성립하는) 차이, 하나의 똑같은 개념 아래 재현된 대상들 사이의 차이로 파악한다면, 차이와 반복의 관계를 둘러싼 문제들은 사실들을 통해 해결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 그러나 개체화 원리의 기준을 사실들 안에서 찾는 것은 문제를 제대로 설정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차이가 내적(internal, 강도덕 차이)임에도 불구하고 개념적이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상을 재현하기에 앞서 이념을 드라마화하는 어떤 내적 차이들이 있다. 여기서 차이는 대상의 재현인 개념에 대해서는 외부적(exterior)일지라도 이념에는 내부적(interior, 이념 안의 차이)이다. 칸트는 직관의 형식들 안에서 개념들의 질서로 환원될 수 없는 어떤 외생적 차이들을 식별했다. 하지만 이 차이들은 여전히 ‘내적인’ 것들이다. 이는 공간을 형성하는 어떤 내적인 역동적 구축 과정이 점차적으로 등장하고, 이 구축 과정이 외면성의 형식인 총체성의 ‘표상’에 선행해야 한다는 것을 말한다. 이 내적 발생의 요소는 도식이 아니라 강도량에 있고, 지성의 개념들보다는 이념들에 관계하는 것으로 보인다. 외생적 차이들의 공간적 질서와 내생적 차이들의 개념적 질서가 궁극적으로 조화를 이룬다면, 이것의 보다 심층적인 원천은 이런 미분적이고 강도적인 요소에, 순간에 이루어지는 연속체의 종합에 있다.

차이의 개념(이념)은 개념적 차이로, 반복의 적극적 본질은 개념 없는 차이로 환원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 이래 라이프니츠를 거쳐 헤겔에 이르는 차이의 철학이 저지른 과오는, 차이를 개념 일반 안에 기입하는 것으로 만족한 데 있을 것이다. 그것은 차이의 개념을 단순한 개념적 차이와 혼동하는 것이다. 사실 차이를 개념 일반 안에 기입하는 한, 차이의 특이한 이념을 기대할 수 없다. 다만 이미 재현에 의해 매개되어 있는 어떤 차이의 요소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두 가지 물음과 마주하게 된다. 단순한 개념적 차이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고유한 이념을 요구하는 차이, 이념 안의 어떤 독특성을 요구하는 그런 차이의 개념은 무엇인가? 다른 한편 반복의 본질은 무엇인가? 개념 없는 차이로 환원되지 않고 어떤 똑같은 개념 아래 재현된 대상들의 외양적 성격과 혼동되지 않는 반복, 다만 그 역시 이념의 능력에 해당하는 특이성을 증언하는 반복의 본질은 무엇인가? 차이와 반복이라는 두 기초개념의 마주침은 결코 처음부터 설정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두 노선, 곧 반복의 본질로 이어지는 노선과 차이의 이념으로 이어지는 노선이 교차하고 간섭하는 모습들을 들여다 볼 때에나 비로소 나타나는 마주침일 것이다.

 

 

댓글목록

선우님의 댓글

선우

고생하셨어요, 나무 님.
세미나 시간엔 좀 더 분명해 지겠지요?
어렵더라구요. 그래도 이렇게 발제문 작성하신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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