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그라마톨로지> 발제문(pp.163-214) +1
김우리
/ 2017-07-17
/ 조회 1,0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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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대한 간추리려고 했는데, 길어져서 죄송합니다. ^^;
편의상 소제목을 붙였어요.
그림·단어 퍼즐과 기원들의 연계(Le rebus et la complicité des origines)
1> 문자와 과학(학문) 및 대상의 객관성 성립 사이의 문제
데리다는 필적에서 드러나는 한 개인의 정신뿐만 아니라 집단의 정신을 연구할 수 있게 해주는 학문이 있다고 가정해보기를 제안한다. 그것은 사회학·역사·민족지학·정신분석학에 의해 새로워지고 풍요로워지는 필적학으로, 이러한 학문이 탄생할 수 있기 위해서는 이와 관련된 보다 일반적이고 근본적인 문제들이 해명되어야 한다. 그 문제들 중에는 어떤 대상이나 표상에 정서적 가치 또는 의미를 부여하는 ‘(심적 에너지) 투자’(investissements)에 대한 문제가 포함된다. 그런데 이때 데리다가 말하는 ‘투자’는 이미 정립된 객관적 대상에 주관적 심리를 투사하는 작용이 아니라, 오히려 대상의 객관성 자체를 성립시키는 작용, “객관성 일반이 가능하게 되는 데 있어서 없어서는 안 될 그러한 힘을 주는” 작용이다. 데리다는 이 문제에 있어서 정신분석학적 유형의 연구가 지닌 특권을 인정해야 한다고 말한다. 정신분석학은 이 문제를 다루면서 ‘대상의 객관성 및 가치의 기원적 구성’과 관련을 맺기 때문이다. 또한 데리다는 이념적 객관성의 성립이 본질적으로 문자로 씌어진 기표를 통과해야 한다는 점에서, 객관성의 성립을 다루고 있는 다른 이론들[=후설의 이론] 역시 문자(글쓰기)에 나타나는 ‘투자’를 무시할 수 있는 권리가 없다고 말한다. 객관성에 대한 이론과 정신분석학에 부여된 과제는 어려운 만큼 필연적인 것/필요한 것이다.
2> 그림·단어 퍼즐과 ‘문자의 표음화’ 역사의 해체
데리다는 문자 역사학자 역시 이와 같은 필연성/필요성을 자신의 작업 속에서 만나며, 그 문제들은 모든 과학들의 뿌리에서만 재검토될 수 있다고 말한다. 기존의 문자 역사학에서 수학적인 것, 정치적인 것, 경제적인 것, 종교적인 것, 기술적인 것, 법률적인 것 등의 본질에 관한 고찰은 문자의 역사에 대한 고찰과 내적인 방식으로 통한다. 그런데 이 모든 고찰에서 ‘문자의 표음화’(목적론적 역사)라는 관점이 근본적인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하지만 최근의 연구들이 가르쳐주고 있는 것은 구조적 또는 본질적인 이유들로 인해, 순수하게 표음적인 문자는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표음 문자와 비표음 문자의 구분은 일부 문자 체계들의 순수한 특질이 아니라, 모든 의미 체계 내에서 지배적인 요소들의 추상적 성격일 뿐이다. 게다가 그 중요성은 양적인 배분에서보다는 구조적인 조직에서 기인한다. [상형적이면서 동시에 표음적인 설형 문자의 예] 문자 체계 일반이 이러한 표음적 요소와 비표음적 요소가 복합된 측면을 지니고 있으며, 이는 세련화된 수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데리다는 그림 문자의 예를 든다. 그림 문자에서 토템적인 문장(紋章)은 눈앞에 있는 사물에 대한 재현에서 고유 명사에 대한 상징으로 얼마든지 바뀔 수 있고, 이 순간부터 그것은 하나의 명칭으로서 표음적 가치를 지닌 채 다른 연쇄 고리들 안에서 기능할 수 있게 된다. 즉 기표가 경험적·현재적 의식의 한계를 벗어나 잠재의식의 가장자리나 무의식의 인과 관계에 따라 계속적으로 작용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형상화 속에 기입되는 한에서만 명칭이 되는 (고유)명사는, 그것이 공간 속에서 사물에 대한 표상에 연결되든, 겉보기에 일반적 공간으로부터 해방된 것처럼 보이는 음성적 차이들의 체계 속에 붙들려 있든, ‘공간화’(espacement)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차이와 은유의 체계 내에서 (고유)명사의 고유한 의미란 존재하지 않고, 그것의 ‘외관’만이 필수적인 기능을 한다. 목소리 속에서, 자기가 말하는 것을 스스로 듣는 절대성 속에서 고유한 의미의 절대적 재림(초월적 기의)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상관적인 필연성에 부응하는 기능으로서 차이의 체계 내에 위치되어야 한다.
(비표음적인 것과 표음적인 것의) 전이에 의한 그림·단어 퍼즐(rébus à transfert)은 원시적 단계의 순수한 그림 문자가 순수한 표음 문자로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사물의 표상(재현)이 그림 문자이면서 동시에 표음적 가치가 부여되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표는 최소한 하나의 사물과 하나의 소리를 동시에 지시한다. 사물 자체가 ‘공간 속에서’ 사물들의 한 전체이면서 또한 차이들의 한 연쇄체일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복합적인 구조는 이른바 ‘원시적’ 문자들 속에서 또는 ‘문자가 없는’ 것으로 생각되었던 문화들 속에서 발견되고 있다. [아즈텍인들의 문자의 예: 고유명사인 테오칼티틀란(Téocaltitlan) = 입술(tentli)+길(otlim)+집(calli)+치아(tlanti)]
이어서 데리다는 중국 문자에 대한 제르네(J. Gernet)의 분석에서 동의하기 어려운 부분을 지적한다. 1) 표음 문자를 역사의 궁극목적(telos)으로 간주하는 것 2) 중국의 표기 기호가 유일하고 특이한 현실과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에 원초적 위력을 간직하고 있는 것으로 묘사하면서, 고대 중국에서는 이러한 문자 언어의 힘에 의해 음성 언어가 빛을 잃게 되었다고 간주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한 기표도 ‘유일하고 특이한 현실’을 지니지 못한다. 왜냐하면 관념성의 조건이기도 한 하나의 기표는 그것 자체로 반복 가능성, 이미지 혹은 유사의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유일하고도 특이한 현실’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많은 상황들 속에서 무한하게 반복될 수 있다. 여기에서 우리가 벗어나야 하는 것은 모든 차이들을 뒤처짐이나 빗나감으로 변모시키는 일종의 문자 표기 단일발생론(monogénétisme)이다. 또한 음성 언어에 대한 태양 중심적 개념에서 엿보이는 로고스 중심주의도 경계해야 한다. 어둠과 빛, 문자 언어와 음성 언어의 관계는 다르게 나타나야 하는데, 이것은 18세기에 이루어졌던 탈중심화와는 다른, 철학적 또는 과학적 행위일 수 없는 탈중심화이다. 탈중심화에서 관건은 음성 언어와 문자 언어를 연결하는 다른 체계에 접근함으로써 에피스테메의 랑그와 문법의 토대가 되는 범주들을 와해시키는 것인데, 이론ㅡ철학과 과학을 에피스테메 안에서 통합시키는 것ㅡ의 자연적 경향은 울타리를 돌파하기보다는 돌파된 진지를 메우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3> 기원들의 연계와 문자학
데리다는 ‘표음화’가 그것의 기원과 역사, 모험들 속에서 탐구되는 순간부터, 그 운동이 과학·종교·정치·경제·기술·법률·예술과 같은 개별 분야들의 운동들과 뒤섞이는 것을 보게 된다고 말한다. 이 분야들은 단지 엄격한 경계 설정을 위해서만, 추상 작용을 통해서만 분리된다. 기원들의 이와 같은 연계(complicité, 결탁, 공모)를 데리다는 ‘원문자’라고 부른다. 이러한 연계 속에서 기원이라는 개념 그리고 기원을 노래하는 음성 언어와 연결된 ‘기원의 단순성에 관한 신화’는 소멸한다. 문자로 씌어진 기호에의 접근이 개별 분야들의 성립을 가능하게 한다. 이와 같은 개별 분야들의 공통의 뿌리는 차이-자체의 명명할 수 없는 운동ㅡ흔적, 보유(réserve) 또는 차연ㅡ이며, 그것은 철학의 무능력이기도 한 과학의 무능력, 에피스테메의 역사적 울타리 안에서만 ‘문자’라고 불릴 수 있다.
흔적, 차연, 보존에 대한 사유는 이러한 한계에 이르러서 이 한계를 쉬지 않고 반복하면서, 또한 에피스테메의 영역 너머를 가리켜야 한다. 여기에서 ‘사유’는 하이데거적인 맥락과 달리 중립적인 이름, 텍스트적 공백, 차연이 도래할 시대에 대한 필연적으로 미결정적인 지침을 의미한다. 이 지침은 모든 열림처럼 그 자신 안에 보이도록 하는 면에 의해 지나간 시대의 안쪽에 속한다. 즉 문자에 대해 사유한다는 것(데리다 자신의 사유)은 에피스테메를 완전히 넘어선 곳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에피스테메 속에서 개시하는/상처를 내는(entamer) 무엇인 것이다. “문자학, 이 사유는 아직 현전 속에 갇혀 있다.”
제2부 자연, 문화, 에크리튀르
‘루소의 시대’에 대한 서론
1> ‘루소의 시대’가 지니는 전범적 가치
음성 중심주의(로고스 중심주의)의 개시와 그 철학적 완성 사이에는 현전의 동기가 결정적으로 분절되어 나타난다. 데카르트의 코기토에서 확실성의 순간이 이를 현저하게 보여준다. 현전의 동일성을 가능하게 해주었던 에이도스의 관념성 또는 우시아의 실체성이라는 객관적 형식은 자기 자신과 관계 맺는 순간에 자기 자신을 의식하고 확신하는 실체의 변양으로서 관념의 형태, 즉 표상/재현전화(représentation)의 형태를 취하게 된다. 관념성과 실체성은 절대적인 독립을 획득하여 생각하는 사물(res cogitans) 안에서 자기 자신과 관계 맺는다. 데카르트에서부터 헤겔에 이르기까지 신의 무한한 지적 능력은 자기 자신에의 현전으로서 로고스가 지닌 다른 이름이 된다. 로고스는 목소리를 통해서만 무한할 수 있고 자기 자신에게 현전할 수 있으며, 자기-촉발(auto-affection)로서 발생할 수 있다. 목소리는 그것을 통해 주체가 자신으로부터 나와 자신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기표의 질서이며, 발설하는 동시에 자기 자신을 느끼게 하는(affecter) 기표를 자기 바깥에서 빌려오지 않는다. 이러한 것이 바로 목소리의 경험, 자기 자신이 말하는 것을 스스로 듣는다는 것의 경험ㅡ혹은 의식ㅡ이다. 그리고 이 경험은 자신에의 현전을 중단시키는 ‘외부적’ ‘감각적’ ‘공간적’ 기표에 호소하는 문자의 배제로서 체험되고 언급된다. 현전의 동기가 이와 같이 분절된 이래 루소는 의식 혹은 감정 속에서 주체가 자기 자신에 현전하는 현전의 새로운 모델에서 출발하고 있으며, 데카르트와 헤겔에 이르는 모든 시대가 암암리에 전제해왔던 문자 언어에 대한 환원을 하나의 주제와 체계로 만들었다. 나아가 루소가 살았던 시대는 라이프니츠적 유형의 시도들이 로고스 중심적인 안전에 균열을 만들어 놓았던 시대로, 이 시대는 이러한 보편문자의 기획에 맞서 음운론주의와 로고스중심주의적 형이상학의 방어를 조직하는 반작용이 더할 나위 없이 활기하게 이루어졌던 시대, 문자 언어가 가하는 위협에 맞서 전쟁이 개시되었던 시대였다. 이와 같은 내용들로 데리다는 ‘루소의 시대’에 전범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이유를 설명한다
댓글목록
numu님의 댓글
numu잘 읽어볼게요. 엄청 수고하셨네요. 제 건 복사 안해도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