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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세미나] 선집읽기: 폭력비판을 위하여 발제 (2017년 7월 11일)
최원 / 2017-07-10 / 조회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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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비판을 위하여

폭력의 문제는 법과 정의의 개념으로 규정되는 영역에서 생겨나는데, 법적 관점에서 보면 가장 원초적인 기본관계는 목적과 수단이다. 그리고 폭력은 목적이 아닌 수단의 영역에서 찾을 수 있다.

대립하는 법철학에서의 두 가지 조류

- 자연법: 정당한 목적을 위해 사용되는 폭력적 수단은 정당하다. (스피노자, 다윈)

- 실정법: 폭력이 역사적으로 생성된 결과로 본다. 실정법[법실증주의]은 모든 생성하는 법을 오로지 그 수단에 대한 비판을 통해 판단. 정의가 목적들의 기준이라면 적법성이 수단들의 기준이다.

두 학파는 기본 도그마에서 수렴

- 정당한 목적들은 정당화된 수단들을 통해 달성할 수 있고, 정당화된 수단들은 정당한 목적들에 사용될 수 있다.

- 자연법론은 목적의 정당성을 통해 수단을 정당화하려고 하고 실정법은 수단을 정당화함으로써 목적의 정당성을 보증하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정당화된 수단과 정당한 목적이 서로 합치할 수 없게 대립하면 이율배반은 해결 불가능.

실정법론으로부터 출발할 필요

- 폭력 연구에서 목적의 영역은 우선 제외. 수단들의 정당화에 대한 질문이 중심대상.

- 폭력의 종류에 대한 근본적 구분을 해주는 실정법론은 논의의 가설적 토대로 활용가능: 승인된 폭력과 승인되지 않은 폭력.

- 단 이런 구분이 일어나는 영역 자체의 가치를 비판하기 위해서는 법실증주의 외부로 나가야 하는데 이는 동시에 자연법의 외부이기도 해야 한다. 역사철학적 고찰만이 이 입지를 제공할 수 있다.

- 실정법은 모든 폭력에 대해 그것의 역사적 기원에 대한 증명을 요구한다는 점, 그런 증명이 일정한 조건에서 그 폭력의 적법성과 승인을 획득한다는 점.

- 이런 역사적 인정이 필요 없는 목적들이 자연적 목적들이고, 그런 인정이 필요할 때 법적 목적이라고 부를 수 있다.

법이 폭력을 독점하려는 이유

- (유럽에서) 법상황의 특징은 개인의 자연적 목적들을 위해 폭력이 추구될 수 있는 경우 그것을 허용하지 않으려고 하며, 따라서 모든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영역에 법적 목적들을 세워두고 법적 강제력만이 그것을 실현할 수 있게끔 한다.

- 법은 개인의 수중에 놓인 폭력을 법질서를 전복할 위험요소로 간주한다.

- 그러나 법적 목적을 위협하기 때문은 아닌데, 왜냐하면 불법적 목적에 이용된 폭력만이 유죄판결을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컨대 교육적 처벌권은 목적이 동일하게 남아 있어도 그 폭력이 어떤 한도를 넘어설 때에 유죄가 된다).

- 따라서 법이 폭력을 독점

- 법이 폭력을 독점하려는 것은 법적 목적을 지키려는 의도 때문이 아니라 법 자체를 지키려는 의도 때문이다.

파업권

- 조직된 노동자 계급은 오늘날 국가 이외에 폭력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고 있는 유일한 법적 주체다.

- 한편에 파업은 행동의 중지, 비행동이기에 그것은 폭력이라 부를 수 없다는 이의가 있을 수 있지만, 다른 한편에 그런 중지행위가 ‘협박’의 형태를 취하기 때문에, 파업권은 일정한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 폭력을 사용할 권리라는 견해가 있다.

- 두 견해의 대립은 총파업(Generalstreik)이 대두했을 때 날카롭게 드러남. 노동자들은 자신의 파업권을 주장할 것이지만, 국가는 파업권이 모든 기업체에서 동시에 파업을 하는 것을 허용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하며 비상조치법을 발동할 것이다.

- 이런 해석상의 차이 속에 법적 상황의 객관적 모순이 표현되는데, 이에 따르면 국가는 그 목적을 이따금 자연적 목적들로 무관심하게 대하다가 (총파업 같은) 심각한 경우에는 적대적으로 대하는 어떤 폭력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 어떤 법을 수행하면서 취하는 태도 역시 특정 조건에서는 폭력이 된다.

* 능동적일 경우: 자신에게 부여된 권리를 그 권리를 부여한 법질서를 전복하기 위해 행사할 때

* 수동적일 경우: 협박(요구를 관철시키기 위한)일 경우.

- 이는 법적 상황에서의 객관적 모순을 증명해주며, 그것은 법 안에 있는 논리적 모순을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국가는 파업에서 폭력의 기능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을 밝혀내는 것이 본 연구(폭력비판)의 핵심.

전쟁권

- 전쟁권(전쟁법)에서 매우 특이한 점은, 원시적 상황에서조차, 그리고 승자가 이제는 침범할 수 없는 어떤 소유물을 장악한 경우에서조차 어떤 평화의 세레모니(의례)가 요구된다는 점이다. 이는 새로운 법의 시작이며, 따라서 여기서 보이는 것은 폭력의 법정립적(law-making) 기능이다.

- 그런데 지난 1차 대전에서 군사적 폭력에 대한 비판이 폭력 일반에 대한 격렬한 비판의 출발점이 되었다면 그 폭력은 법정립적 폭력으로서만 비판의 대상으로 떠오른 것이 아니라 또 다른 기능을 두고 비판받았다. 국민개병제도를 통해 나타난 군국주의가 문제였는데, 군국주의는 폭력을 국가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보편적으로 사용하게끔 하는 강박, 폭력을 법적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는 강박이다. 폭력의 이 두 번째 기능은 법-보존적(law-preserving) 기능이다.

- 이런 법-보존적 폭력에 대한 비판은 모든 법적 폭력에 대한 비판, 다시 말해 법적 또는 행정적 권력(Gewalt: 폭력/권력)에 대한 비판과 합치하며 그보다 적은 프로그램을 가지고는 전혀 수행할 수 없다. 이에 대한 비판은 폭력의 운명적 질서(인류의 이해관계와 결부된)에 대해 어떤 상위의 질서의 자유(개인의 자유)를 명시할 수 없으면서 형태를 알 수 없는 ‘자유’의 이름으로 무력하게 비판하는 것으로 해결될 수 없다. 완전히 무력한 것은 그 비판이 법질서 자체의 몸통과 사지를 반박하지 않고 개별적인 법률이나 법 관례들만 반박할 때이다.

사형제도

- 법-보존적 폭력은 어떤 위협적인 폭력이다. 이는 겁을 준다는 의미는 아니다. 법적 위협의 무규정성에 대한 귀중한 힌트는 형벌 영역에 놓여있는데, 사형제도가 그것이다. 사형제도는 형량이나 법률의 문제가 아니라 법 자체의 원천과 관련되어 있으며, 사형제도에 대한 비판은 그 원천을 공격한다. 폭력이, 운명적으로 등극한 폭력이 법의 원천임을 보여주기 때문(역시 Gewalt의 중의성).

- 사형의 의미는 범법행위를 처벌하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 법을 확립하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서, 사형 안에서는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이 결합해 있다.

경찰

-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이 사형제도에서보다 더 비틀린 결합 속에서 유령 같은 혼합 속에서 나타나는 곳이 경찰.

- 경찰 안에서 두 가지 폭력의 구별은 지양되어 있다. 법정립적 폭력은 그것이 승리를 통해 입증되기를 요구받는 반면, 법보존적 폭력은 그것이 새로운 목적을 설정하지 않는다는 제한에 묶인다. 그런데 경찰의 강제력은 이 두 조건들로부터 해방되었다. 경찰의 강제력은 법정립적인데, 그 이유는 그것의 특징적인 기능은 법률을 공표하는 일이 아니라 그것이 법적 권리를 갖고 반포하게 하는 모든 법령을 공표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또한 경찰의 강제력이 법보존적인 이유는 그것이 그러한 목적을 수행하는 데 이용되기 때문이다. - 경찰은 법적 목적과 관련이 전혀 없는데도 법령에 의해 규제된 삶을 통해 무자비하게 괴롭히는 존재로서 시민을 따라다니거나 또는 시민을 완전히 감시하거나 아니면 명백한 법적 상황이 주어져 있지 않은 무수히 많은 경우에 “치안유지”를 구실로 개입한다. 경찰제도가 문명화된 국가들의 삶 속에 떠도는 결코 포착될 수 없고 도처에 확산되어 있는 유령 같은 현상이듯이 그것의 강제력은 형태가 없다.

비폭력적 수단

- 계약은 비폭력적 수단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나 계약의 강제를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 그러나 갈등해결의 비폭력적 수단이 없는 것은 아니다. 사적 개인들 사이의 관계는 그런 예를 보여주는데, 비폭력적 합일은 진심의 문화가 사람들에게 합의를 위한 순수한 수단을 쥐여주는 곳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예의, 애정, 평화에 대한 사랑, 신뢰 등.

- 이런 순수한 수단들은 결코 직접적 해결이 아니라 항상 간접적 해결을 가져다주는 수단들이다. 따라서 순수한 수단들은 갈등을 중재하는 데 직접 관여하지 않으며 사물들의 우회로를 통해서만 관여한다. 인간의 갈등들이 재화와 맺는 가장 사실적인 관계 속에서 순수한 수단의 영역이 열린다.

담화

- 이 순수한 수단의 영역은 시민들의 합의 기술로서 담화(협상)이라 할 것이다. - 담화에서 폭력적 합의가 가능할 뿐 아니라 폭력을 배제하는 것이 가능함을 보여주는 것은 바로 거짓말이 처벌받지 않는다는 것이다. 나중에야 독특한 퇴락의 과정 속에서 법적 폭력이 담화의 영역에까지 침투해 들어와 그것을 ‘사기’로 처벌대상으로 만들었다.

 

파업

- 계급투쟁에 관한 한 파업은 일정한 조건에서는 순수한 수단(비폭력)이다.

- 조르쥬 소렐이 구분한 두 종류의 파업

* 정치적 총파업: 국가권력을 문제삼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기초로 해서 주인을 바꾸거나 인민적 개혁을 행하는 것(102쪽 소렐 인용문 참조)

* 프롤레타리아 총파업: 국가를 지양하겠다는 선언을 해서 정복을 통해 얻을 물질적 이득에 무관심하다는 점을 분명히 드러내는 것.

- 정치적 총파업이 노동조건의 외면적 수정만을 유발하는 ‘위협’으로서의 폭력이라면,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은 순수한 형식으로서의 비폭력이자, 외면적 양보나 노동조건상의 수정이 문제가 아니라, 전적으로 변화된 노동, 국가에 의해 강요되지 않은 노동만을 재개하려는 결심에서 일어나는 전복이다. 첫번째 파업은 법정립적 파업인 반면, 두번째 파업은 무정부주의적 파업이다.

- 정치적 총파업보다 더 비윤리적이고 조야한 성격의 의사들의 파업 사례.

자연법, 실정법의 영역 너머에 있는 폭력

- 모든 법이론(목적과 수단의 관점)이 포착하는 폭력과는 다른 종류의 폭력에 대한 물음이 필연적으로 제기.

- 예컨대 분노는 사람을 극명하게 드러나는 폭력의 폭발, 목전의 목적에 대해 수단으로서 관련되지 않는 그러한 폭발로 이끈다. 그 폭력은 수단이 아니라 발현(Manifestation)이다.

신화적 폭력

- 신화적 폭력: 그것은 신들의 존재의 단순한 발현이다. 니오베 신화. 니오베의 교만은 자신 위에 내릴 숙명을 불러내는데, 그것은 그가 법을 침해하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운명에게 싸움을 걸어 도발하기 때문이다. 그 폭력은 원래 파괴적이지 않다. 그 폭력은 그것이 니오베의 자식들에게 피를 흘리는 죽음을 가져올지라도 어머니인 니오베의 삶 앞에서는 멈춰버리며, 이 삶을 자식들의 종말을 통해 이전보다 더 죄스러운 삶으로 만들면서 영원히 말 없는 죄의 담지자이자 인간과 신들 사이에 가로놓인 경계의 초석으로 남겨둔다. 신화적 발현들에서 나타나는 이런 직접적 폭력이 법정립적 폭력과 가장 가까운 것이라면, 이는 법정립적 폭력의 문제점을 보여준다.

- 법정립에서 폭력의 기능은 이중적이다. 법정립은 물론 법으로서 투입되는 것을 그것의 목적으로 삼아 수단으로서의 폭력을 가지고 추구하긴 하지만 목적한 것을 법으로서 투입하는 순간 폭력을 [소임을 다했으니] 물러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야 비로소 엄격한 의미에서 그것도 직접적으로 법정립적인 폭력으로 만든다.

- 보다 순수한 영역을 열어 보여주기는커녕 직접적 폭력의 신화적 발현은 가장 깊은 차원에서 모든 법적 폭력과 동일한 것으로 드러나며 법적 폭력의 문제성에 대한 예감을 그것의 역사적 기능의 타락상에 대한 확신으로 만들어준다. 이로써 이 역사적 기능을 파괴하는 것이 과제가 된다.

신적 폭력

- 이 과제야말로 신화적 폭력에 중단을 명할 수 있는 어떤 순수한 직접적 폭력에 대한 물음을 최종적으로 제시해준다. 모든 영역에서 신화에 대해 신이 맞서듯 신화적 폭력에 신적 폭력이 맞선다.

- 신화적 폭력이 법정립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법파괴적이고 신화적 폭력이 경계를 설정한다면 신적 폭력은 경계가 없으며 신화적 폭력이 죄를 부과하며 속죄시킨다면 신적 폭력은 죄를 면해주고 신화적 폭력이 위협적이라면 신적 폭력은 내리치는 폭력이고, 신화적 폭력이 피를 흘리게 한다면 신적 폭력은 피를 흘리지 않은 채 죽음을 가져온다. 고라(레위족)의 무리를 치는 신의 법정의 사례(민수기 16장).

생명의 신성함?

생명의 신성함에 대한 논쟁(아감벤의 호모 사케르 논의의 준거점): 인간은 어떠한 경우라도 인간의 단순한 생명과 일치하지 않으며, 그 인간 속의 단순한 생명과도, 그리고 인간의 어떤 특정한 상태나 특성과도, 심지어 인간의 신체적 존재의 유일무이함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생명의 성스러움에 관한 도그마의 원천은 탐구해볼 가치가 있다. 여기서 성스럽다고 언명된 것은 오랜 신화적 사유에 따라 볼 때에는 죄지음의 뚜렷한 담지자, 즉 단순한 생명이다.

신화적 법 형식들의 마력 속에 머무는 이런 순환 고리를 돌파해내는 데에서, 법과 더불어 그 법에 의존하는 폭력들처럼 그 법이 의존하는 폭력들 전체, 즉 종국에는 국가권력을 탈정립(Enktsetzung)하는 데에서, 새로운 역사 시대의 토대가 마련된다.(아감벤 vs 네그리, 발리바르 등등)

(발제자: 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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