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 《진실의 용기》 0713 발제 +1
유택
/ 2017-07-10
/ 조회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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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의 용기》 3강 1984년 2월 8일 – 첫 번째 시간
푸코는 파레지아의 역사에서 일어난 변화에 주목한다. 폴리스를 지향하며, 폴리스와 상관적인 파레지아로부터 에토스를 향한, 에토스와 상관적인 파레지아로의 전환을 통해서 오늘 어떻게 서구철학이 진실한 담론의 실천형식으로서 형성되어 왔는지 보여주려고 한다.
에우리피데스에서의 파레지아 : 고귀한 혈통을 가진 시민의 특권인 파레지아
에우리피데스의 텍스트에서 첫째, 파레지아라는 이 발언권은 태생적으로 시민이 아닌 자는 가질 수 없는 권리라는 점이다. 둘째, 고국에서 추방되어 낯선 도시국가 안에 있는 자는 파레지아의 권리를 갖지 못한다는 점을 알 수 있다. 파레지아는 좋은 혈통의 일부로, 명예로운 시민의 실존으로서의 권리 내지 특권으로, 자신의 견해를 제시할 수 있고 그래서 집단의 결정에 기여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 이해되는 정치적 삶에 접근케 한다. 파레지아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유지해야 할 권리, 최대한으로 행사해야 할 권리이며, 자유로운 시민의 자유로운 실존의 표명되는 형식의 하나이다.
민주주의적 파레지아에 대한 비판 : 도시에 미친 해악과 당사자의 위험
플라톤에서 이소크라테스를 거쳐 데모스테네스에 이르기까지 파레지아에 대한 불신의 발전을 보게 된다. 민주주의 제도가 파레지아의 장소라는 주장에 대한 비판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타난다. 첫째, 민주주의 안에서 파레지아는 도시국가에 위험한 것으로 나타난다. 그 이유는 파레지아가 아무나 자기 생각을 표명할 수 있는 자유이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민주주의는 파레지아가 특권적 의무로 행사되는 장이 아니라, 아무나 말할 자유, 아무것이나 말할 자유, 그들이 좋아하는 것이면 언제나 말할 자유로서 행사되는 장이다. 둘째, 민주주에서는 파레지아가 나라 자체에 위험할 뿐만 아니라 파레지아를 행사하는 개인에게도 위험하다는 점이다.
소크라테스의 정치적 유보
왜 소크라테스는 정치적 파레지아를, 혹은 민주주의적 파레지아를 의회에서 실천하는걸 거부했을까? 여기서 민주주의적 실천으로서의 파레지아적 진실-말하기가 지닌 위험이 드러나는데, 그것은 나라 전체에 대한 위험이 아니라 개인, 고귀한 이성을 가지고 다른 사람들의 의지에 반하려 하는 개인이 처한 위험이다.
데모스테네스의 협박
좋은 파레지아를 위한 자리를 만들지 못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격렬한 비난을 데모스테네스의 담화에서도 찾을 수 있다. 민주주의에서 진실-말하기는 더 이상 특정한 조건을 충족시킨 사람들의 특권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진실-말하기는 도발적인 으름장을 통해서만 일어나게 된다. “나는 당신에게 진실을 말할 텐데, 그럼 당신은 나를 벌주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내가 미리 당신이 나를 벌줄 거라고 말한다면, 이것이 나에 대한 처벌을 멈추게 하고, 내가 진실을 말할 수 있게 할 것이다”(p49) 민주주의에서 진실담론이 무력해지는 이유는 민주주의의 구조 때문이다. 왜냐하면 민주주의에서는 좋은 화자와 나쁜 화자를 가려낼 수 없고, 진실을 말하면서 나라에 유용한 담론과 거짓과 아첨을 일삼는 해로운 담론을 구분할 수 없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서 윤리적 차별화의 불가능성 : 아테네 헌정의 사례
민주주의에서 진실과 거짓담론을 구분할 수 없다는 원칙은 아주 오래전 크세노폰(Xenophon)의 저작 <아테네의 정체>에서 나온다. 아테네 민주주의를 찬미함으로써 속내는 거세게 비난하는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즉 민주정은 최상의 사람들이 아니라 일반대중이 결정을 내리는 제도이다. 다수는 최선자일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최악이다. 최선자는 소수다. 최선자는 나라에 좋은 것, 곧 그들 자신에게 좋은 것을 결정한다….(p53~54) 푸코는 이 저서가 ‘궤변적 주장’이기는 하지만 주목할 부분이 있다고 말한다. 기원전 4세기에 파레지아 공간으로서의 민주주의 대한 비판형식으로서 공통적으로 받아들여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의 정치적 사유의 네 가지 원리
첫째, 양적인 원칙 내지 양적 구별에 근거한 반대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대중’과 ‘소수자’의 양적 구분이 국가 내부의 대립관계를 조직하고 ‘누가 통치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제기된다. 둘째, 다수와 소수 간의 이런 양적인 대립은 최선자와 최악자 간의 대립과 조응한다. 셋째, 최선자와 덜 선한 자 간의 윤리적 구분이 정치적 구분과 상응하는 것이다. 넷째, 정치적 담론 영역에서 모든 이들에게 발언권을 주는 민주주의 형식 안에서는 본질적으로 진실이-무엇이 국가에 좋고, 유익하고, 건강한가-말해질 수 없다는 것이다. 진실은 말하는 주체들의 차별화가 없을 때는 정치적 장 안에 말해질 수 없다.
플라톤의 전도
진실 –말하기에 꼭 필요한 윤리적 구별이 없기에 민주주의에서는 파레지아를 찾을 수 없다면, 플라톤은 진실한 담론이 국가정체의 초석으로서, 철학을 통해, 철학의 형식안에서 수립되는 것은 오직 민주주의를 제거하고 붕괴시킬 때뿐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저함
아리스토텔레스의 명확한 ‘민주주의적’(수많은 인용 속에서) 감각에도 불구하고, 그 역시 플라톤과 같은 문제설정, 즉 민주주의가 말하고, 숙고하고, 의사 결정하는 주체들의 윤리적 차별화에 어떤 공간도 남겨둘 수 없을 때 민주주의 제도가 안게 되는 진실-말하기 파레지아의 존재불가능성을 공유하고 있다.
도편추방의 문제
도편추방은 범죄나 악행뿐만 아니라 명성, 탁월함, 다른 시민들보다 너무 높이 추앙 받는 자질 때문에 다수 대중이 특정 개인을 추방할 수 있게 하는 아테네 제도이다. 도편추방은 자신의 우월함으로 단일하고 절대적인 전제권력을 행사하고픈 유혹과 기회를 가진 야심 많은 시민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뿐만 아니라, 몇 가지 자질이 다른 사람보다 월등한 그런 시민에 대항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도 정당화 된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한다. 그러나 그 ‘탁월한 덕’을 갖춘 누군가가 있다면 모든 시민이 그 사람에게 기꺼이 복종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아리스토텔레스는 도편추방을 통한 정치적 도전이라는 난해하고 역설적인 문제에 부딪히게 된다. 간략히 말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민주주의 법과 규칙에 최대한의 정당성을 부여할 때, 민주주의가 도덕적 탁월성에 하나의 자리를 마련할 수 있으며, 그 자리는 민주주의의 거부를 구현하는 자리이다. 만약 실제로 어떤 탁월한 덕을 갖춘 이가 있다면, 민주주의는 사라지고 사람들은 그에게 복종하게 되고 윤리적으로 탁월한 그 사람은 왕과 같을 것이다.
《진실의 용기》 4강 1984년 2월 8일 – 두 번째 시간
진실과 전제군주
기원전 4세기의 파레지아에 대한 문제제기는 두 가지 측면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민주주의에서 파레지아는 가능하며, 또한 현실적으로 유효하다는 주장에 대한 비판이다. 또 다른 측면은 파레지아에 대해 보완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이다. 파레지아와 진실-말하기에 보다 적합한 장소로서 왕과 조언자 사이의 관계를 든다.
히에로(Hiero)의 예
진실-말하기와 전제정치는 양립할 수 없으며, 전제군주는 침묵과 아첨을 좋아한다는 표현은 그리스문학에서 빈번하게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나 그리스인들이 전제정치에서 어떤 위험을 인식했든, 이런 통치형태에서 진실-말하기가 맞닥뜨릴 수 있는 위험이 무엇이든, 왕과 진실을 말하는 사람 간의 관계, 왕과 조언자 간의 관계에서 파레지아의 실천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여전히 남아있다. 왕과 조언자의 관계는 민중과 연설가들의 관계보다 본질적으로 파레지아에 더 우호적이다.
피시스트라투스(Pisistratus)의 예
농부의 세금을 면제해 준 이야기.(p75)
윤리적 차별화의 자리인 영혼(psukhe)
왜 민주주의는 진실-말하기의 출현이 그렇게 힘들고, 가능성이 떨어지고, 위험한 장소일까? 바로 윤리적 차별화(ethical differentiation)를 위한 자리를 만들고 생성함에 있어서, 민주주의가 지닌 불가능성 때문이다. 이제 반대로 어떻게 왕과의 관계가 파레지아를 위한 공간이 될 수 있을까? 그 이유는 최고권력자의 영혼, 엄밀하게 그것이 개인의 영혼인 한, 윤리적 차별화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왕에게는 영혼이 있고 영혼은 설득되고 교육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진실담론을 통해서, 그는 진실을 이해하고 진실에 따라 스스로를 지도할 수 있는 에토스를 영혼 안에 불어넣을 수 있다.
플라톤의 일곱 번째 편지로 돌아가서
플라톤이 디오니시소스 2세를 가르치는 과업을 위해 시칠리아에 갔다. “한 사람만 설득하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p74) 그러나 플라톤은 실패한다. 여기서 구조적인 실패로 여기지 않았다는 점을 이해하는 게 중요하다. 민주주의가 구조적인 이유로 파레지아의 공간을 창출하지 못하는 데 반해서, 플라톤의 진실-말하기, 그의 철학적 진실-말하기가 디오니소스 2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하고, 시칠리아에서 실패한 것은, 본질적으로 역사적이고 상황적인 이유 때문이다.
이소크라테스가 니코클레스에게 한 말
이소크라테스는 왕(니코클레스)에게 ‘가장 좋은 것’을 선물하고자 했다. 그는 ‘개별 상황에서 취해야 할 행동들’에 대해 자신의 관점을 제시하는 조언자의 역할과 그 자신, 이소크라테스의 임무, 즉 왕의 영혼을 지도하는 임무, 진실을 말함으로써 왕의 윤리적 형성과 윤리적 차별화를 보장하는 임무를 명확히 구별한다. 니코클레스가 자기 자신을 바치고 그의 시간을 바쳐서 습득해야 할 습속, 삶의 방식을 제시하는 것. 그래서 정치적 행위에 대한 상황적 충고와, 왕이 평생에 걸쳐 몸에 익혀야 할 통치하는 자로서 그가 가져야 할 습관들을 훈련시키는 도덕적 조언 간의 대비가 이뤄진다.
민주주의적 파레지아에서 자기통치적 파레지아로의 변모
파레지아의 본질적 상관항이 폴리스에서 프시케로 이동한다. 진실-말하기의 객체는 도시의 구원이기보다는 개인의 에토스가 된다. 파레지아의 이런 변모, 민주주의에 관한 제도적 관점에서 개인적인 에토스 형성으로의 이동을 통해 그리스철학, 혹은 서구철학의 어떤 근본적인 특질을 이해하기 위해 긴요한 어떤 것을 보게 된다. 세 가지 현실 내지 세 가지 축을 만나게 된다. 알레테이아(aletheia 진실표명)와 진실-말하기의 축, 폴리테이아(politheia 정체)와 통치의 축, 마지막으로 에토포에시스(ethopoiesis 에토스 내지 주체의 형성)의 축. 이 세 축(알레테이아/폴리테이아/에토스)은 서로에게 흡수되지 않으면서 상호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이 세 축의 근원적인 환원불가능성과 그것들 상호간의 영향구조야말로 그리스에서 오늘날까지 모든 철학담론의 존재를 떠받치고 있다고 푸코는 말한다.
철학적 담론의 특수성
철학담론이 과학담론(알레테이아 진실표명), 정치제도적 담론(폴레테이아 정체) 그리고 도덕담론(에토스)이 아니게 하는 것은 이 문제들 각각에 대해 나머지 두 문제를 동시에 제기한다는데 있다.
댓글목록
소리님의 댓글
소리
성실한 유택! 진짜 빨리 올리셨네요.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 세미나 때 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