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엽서] 2017년 7월 4일 세미나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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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7-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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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 그라마톨로지 세미나 후기 2017년 7월 4일
이번 세미나는 데리다의 논의가 특히 까다로워지는 부분이라서 그가 주장하는바가 무엇인지를 파악하는 데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우선 가장 중요하게 논의됐던 것은 ‘제도화된 흔적’으로서의 에크리튀르였습니다. 주지하다시피 소쉬르는 기호의 자의성이라는 테제를 내세우지요. 이는 주체가 기호를 자의적인 방식으로, 다시 말해서 변덕스러운 방식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소쉬르가 말하는 것은 기호를 구성하는 두 요소로서의 기의와 기표의 결합이 그 어떤 필연적이자 자연적인 원인도 결여하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 양자 사이의 결합은 철저히 사회적 협약의 문제입니다. 소쉬르는 기호의 자의성을 주장하면서, 기호를 푸시스와 노모스 가운데에 노모스 쪽에 완전히 귀속시키려고 했지요. 그리고 이를 위해서 소쉬르는 상징과 기호를 구분합니다. 상징은 알다시피 무엇에 대한 상징이며, 따라서 상징되는 것과 상징하는 것 사이의 모종의 연관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이 때문에 상징은 자연적인 것, 자연적인 연결을 유추할 수 있는 것이지요. 반면 기호는 그런 연관이 없는 것으로서 인위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데리다는 바로 이 지점에서 매우 놀라운 주장을 합니다. 데리다는 ‘제도화된 흔적’으로서의 에크리튀르는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것으로서 기호의 자의성이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지만, 이는 본래적으로 동기를 가지고 있지 않음으로 파악되어서는 안 되고 동기를 가지고 있던 것이 비동기적으로-됨으로 이해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데리다는 상징도 없고 기호도 없으며, 언제나 상징의 기호-되기가 있을 뿐이라고 말하지요. 다시 말해서 우리가 어떤 사물을 지시하기 위해서 어떤 말을 사용하거나 만들어낼 때에, 그것은 동기가 있는 것으로서의 상징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물을 지시하는 말(기표)은 그 동기를 하나의 의미로서 안정화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요. 그런데 문제는 그 말 또는 그 기표는 지시되고 있는 그 사물 자체는 아니며 그 사물에 첨가되는 어떤 이질적인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이 때문에 그 기표는 본래의 의미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운동을 할 수 있는 어떤 것이기도 합니다.
예컨대 저의 부모님은 저에게 ‘원(元)’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는데, 그 이름을 붙여주실 때 부모님은 분명 어떤 동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으뜸이 되라. 넌 으뜸이다. 그러나 전 으뜸으로서의 삶을 전혀 살고 있지 않지요. 뜨내기 시간 강사나 하면서 말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계속 ‘원’이라고 불리웁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원’은 본래의 동기로부터 떨어져 나와서 다양한 콘텍스트들과 마주치면서 산종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데리다에 따르면, 이러한 동기를 가진 것의 비동기화는 상징의 기호-되기로서의 에크리튀르의 차원에서 설명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데리다가 이런 설명을 하는 도중에 ‘타자는 있는 그대로 나타나지만 흔적의 운동은 은폐된다’는 말을 하지요. 세미나에서는 이 말이 뜻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날카로운 문제제기가 있었고, 그것을 해명하면서 우리는 데리다의 논의를 더욱 깊이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타자는 나타나지만 흔적은 은폐된다는 말을 설명하기 위해서 우리는 소쉬르의 차이 개념으로 다시 돌아갔는데, 소쉬르의 차이는 알다시피 A와 B라는 어떤 적극적인 항들 사이에서 파생되는 적극적 차이를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차이가 나는 두 항 자체가 규정되어지지 않은 소극적 상태에서 오히려 그 차이나는 두 항을 만들어내는 차이를 지시하지요. 데리다의 논의도 바로 이런 사유를 따르면서 그것을 더욱 발본화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데, 타자(차이가 나는 것으로서의 타자)는 현전하게 되지만(현재 속에서 명확히 나타나게 되지만), 그 타자를 만들어내는 차이 또는 차연의 운동으로서의 흔적은 은폐된다는 것이지요.
세미나에서 우리는 예전에 읽은 아즈마 히로키의 논의가 놓치고 있는 부분이 있다는 점을 또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아즈마는 에크리튀르의 단수성이 있고 그 후에 그 단수적 에크리튀르가 상이한 콘텍스트들을 마주침으로써 산종된다고 설명했지요. 이 설명은 매우 탁월하지만, 한 가지를 미제로 남겨두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그 기원적 에크리튀르와 마주치는 콘텍스트들은 어디서 오냐는 문제를 말이지요. 이제 우리는 데리다를 따라 이렇게 말해야 합니다. 애초에 에크리튀르가 콘텍스트(동기)를 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에크리튀르는 늘 콘텍스트를 만들기 위해 필수적으로 요구되는 어떤 것이지만, 또한 그러한 콘텍스트들로부터 떨어져 나올 수 있는 것(비동기화 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우리는 데리다가 말하는 ‘원종합’이라는 말도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원래 종합이란 종합되어지는 요소들을 전제하는 것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원종합이라는 말은 사실 형용모순으로 들립니다. 종합되는 요소들이 먼저 있기 때문에 종합은 늘 그 요소들에 후속하는 기원 이후의 자리를 차지해야 하지요. 그런데 데리다는 여기에서 기원의 구성에 반드시 필요한 상이한 두 요소의 결합이 있어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선행하는 요소 없는 종합으로서의 원종합을 말하지요. 우리는 거꾸로, 종합되는 상이한 두 요소란 사실은 이런 원종합의 결과로서 파생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데리다의 상징의 기호-되기로서의 차연의 운동은 결국 기의를 제도화(안정화)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흔적으로서의 기표가 시간 속에서 본래의 기의로부터 떨어져 나오는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소쉬르가 구분하는 랑그와 파롤의 구분, 공시성과 통시성의 구분이 바로 이 차연의 운동을 통해서 훨씬 더 잘 설명될 수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소쉬르는 공시적인 것, 불변적인 것으로서의 랑그가 본래적으로 주어져 있다고 말하면서, 통시적인 파롤이 거기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설명하지요. 그런데 사실은 기의와 기표를 결합시켜 상징을 만들고, 그 상징에서 기표가 떨어져 나오는 기호되기의 운동은 공시성과 통시성을 모두 포함하거나 동시에 설명하는 차연의 운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공간화(공시화)-시간화(통시화)의 이중적 운동으로서의 차연의 운동인 것이지요.
이외에도 이번 장의 제목인 “바깥쪽은 안쪽이다”의 ‘이다’에 X표를 치는 것이 갖는 의미에 대해서도 논의가 있었는데, 간략히 말하자면 안쪽을 비판하기 위해 바깥쪽으로 나가는 것이 오히려 바깥을 현전의 중심으로 만드는 것일 수 있기 때문에, 그 탈출의 운동을 감행하면서도 그것을 유예하는 이중적 운동이 바로 탈구축의 운동이라고 볼 수 있다고 정리했습니다.
(후기 작성: 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