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2장~3장
망원동
/ 2017-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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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라마톨로지
2장
틈새
“차이는 분절이다.” 지난 시간 최원 선생님이 단순히 A와 B의 차이를 말하는 소극적 차이와 달리 적극적 차이는 A와 B를 구성하는 것이라고 했다. 데리다가 인용한 소쉬르의 일반언어학 강의에 “인간에게 자연적인 것은… 언어체계… 구별되는 관념들에 대응하는 구별되는 기호들의 체계를 구성하는 능력” (123쪽)이라고 한다는 말과 유사한 듯하다.
말소리가 들려올 때 그 소리와 ‘심적 자취’(청각 이미지)의 차이를 분절하고 시간 속에서 종합할 때 “차이들이 일련의 의미 작용 속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자취’가 환원불가능하다는 것은 말이 원초적으로 수동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은유가 수동적이라는 것과 같은 말이기도 하다. 은유의 비유기표(보조관념)는 비유기의(원관념)와의 차이에 의해서 그 효과가 나타난다는 점에서 수동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모든 말은 은유라고 할 수 있겠다. 어떤 말은 그 말이 말해질 때의 “어떤 과거와의 관계이”다. “기원의 어떠한 재활성화도 완전하게는 통제할 수 없고 현전으로 되살려낼 수 없는 늘-이미- 있는 어떤 것과의 관계이다.” “따라서 시원적 현전의 명증성을 절대적으로 되살릴 수 없는 이러한 불가능성은 어떤 절대적 과거로 우리를 돌려보낸다. 이 점이 바로 우리로 하여금 어떤 현재의 단순성 속에서 요약되지 않는 것을 흔적이라 부르도록 허용하는 것이다.”(124쪽)
“소쉬르에 따르면, 파롤의 수동성은 우선적으로 파롤이 랑그와 맺는 관계이다.”(126쪽) 파롤의 수동성은 랑그 속에 뿌리 내린 언어의 근본적 무의식이라고 할 수 있다. 말소리가 들릴 때 그것을 심리적 자취로 분절하는 것은 무의식에 의해서 일어난다. “의미 작용의 기원을 구성하는 공간화(휴지 공백 구두점 간격 일반 등)”은 역시 ‘차이=분절’이라고 할 수 있다. “공간화...는 언제나 비지각된 것, 비현재적인 것 그리고 비의식적인 것이다.”(127쪽)
원문자(원-에크리튀르)는 ‘차이=분절’=공간화이고, “어떤 현전의 현상학적 경험 속에서 있는 그대로 주어질 수 없다” “원-에크리튀르는 살아 있는 현재의 현전 속에서, 모든 현전의 일반적 형태 속에서 죽은 시간을 표시한다. 죽은 시간이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문자 언어(에크리튀르)는 주체를 구성하면서 동시에 와해시키지만, 어떤 의미에서든 주체와는 다른 것이다. 에크리튀르는 에크리튀르의 역사를 통해서 우연한 사건들 아래 어떤 태연한 현전의 실체성으로 귀결되거나, 주체 자신과의 관계가 현전하는 현전 속에서 고유한 것의 동일성(정체성)으로 귀결될 것이다. “그런데 문자 언어(에크리튀르)로서의 공간화는 주체의 부재화이고 무의식화이다.” “주체가 자신의 죽음과 맺는 관계로서의 이 생성 변전은 주체성의 구성 자체이다.” “모든 문자소는 유언적 본질의 성격을 띤다.”(128쪽)
‘흔적=원-에크리튀르=공간화’는 “살아 있는 것이 자신의 타자와 맺고 안이 바깥과 맺는 수수께끼 같은 관계”이다. “공간적이고 객관적인 외재성”은 “살아 있는 현재의 구체적 구조로서의 죽음과의 관계가 없다면”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메타포는 금지될 것이다.” (메타포는 'A=B'라고 말하기 위해서 A와 B의 유사성이라는 ‘X’를 매개시킨다. ‘살아 있는 현재의 구체적 구조로서의 죽음은 메타포에서 가정된 유사성 ‘X’가 될 듯하다.)(132쪽)
“기호 개념 자체가 고전적 존재론의 역사에 여전히 참여하고 있”다. “기표 측면과 기의 측면 사이의 구분에 참여하고 있”다.
“현대 언어학의 입장에서 볼 때 기표가 흔적이라면, 기의는 원칙상 직관적 의식의 충만한 현전 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의미이다.” 하지만 중세적인 사고에서는 기표는 “흔적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흔적이 기호의 두 측면에서 기호의 총체성에 영향을 미칠 때부터, 우리는 전적인 필연성 속에서” “기호의 관념을 해체시켜야” 한다. “기호가 (창조된 유한한 정신에게만이 아니라) 기원적으로, 그리고 본질적으로 흔적이라는 사실, 그것이 언제나 이미 기표의 입장에 있다는 사실, 이것이 바로 로고스, 현전, 의식의 형이상학이 문자를 자신의 죽음이자 자원으로 고찰해야 하는 외관상 순수한 명제이다.”(136쪽)
제3장 실증과학으로서의 문자학에 대하여
문자학은 어떤 조건에서 가능한가? 에크리튀르가 무엇이고 그 개념의 다의성이 어떻게 규제되는지 안다는 조건에서 가능하다.
(언제 어디서 시작하는가? 이는 기원의 문제이다. “기원의 문제들은 현전의 형이상학을 동반하여 가져온다는 것, 이것이 바로 흔적의 성찰이 아마 우리에게 가르쳐 주게 되어 있는 것이리라.”)(1) “언제 그리고 어디서는 다음과 같은 경험적인 질문들을 유발할 수 있다. 즉 역사와 세계 속에서 에크리튀르의 최초현상들이 일어난 특정 시기들과 장소들은 언제이고 어디인가?” (2)“그러나 기원의 문제는 우선 본질의 문제와 뒤섞인다” “흔적에 대한 사유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 것은, 흔적이 단순히 본질의 존재-현상학적 문제에 종속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사실과 권리의 대립을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 이 대립은 형이상학적 존재론적 초월적인 온갖 형태로 제기된 (그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체계 속에서만 기능했던 것이다.”
“문자는 어디서나 철저히 역사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자에 대한 과학적 관심이 언제나 문자 역사의 형태를 취했다는 것은 당연하면서도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과학이 또한 요구했던 것은 문자의 이론이 사실들의 순수한 기술에, 순수한 기술이란 표현이 의미를 지닌다는 것을 전제로 해서 방향을 잡아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대수학: 비밀과 투명성
“17세기말과 18세기에 씌어진 기호 이론”에 대한 훌륭한 연구로 다비드의 작업이 있다.
문자의 일반 역사에 관한 최초의 기획들은 신학적인 성격을 갖고 있었다. ‘신이 준 히브리 문자’라는 식의 신학주의는 문자학의 수립을 방해하고, 알파벳의 역사를 탐구하는 데 장애물이 되었다.
“최초의 탈중심화”는 “‘중국 문자에 대한’ 편견”을 수반하는 “한계”가 있지만 “중국 문자”로부터 “철학적 언어의 모델”을 발견한다. (한자는 창힐이 만든 것으로 전해지니까?) “창안의 임의성과 인위성을 통해 이 문자를 역사로부터 벗어나게 하면서 철학에 적합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다.”
데카르트는 보편 언어 기획이 ‘듣기 싫은 발음’이나 ‘기초적 낱말들’을 공부해야 하는 번거로움을 돌파할 수 없을 것이라고 보았다. 철학적 언어로서의 보편 언어는 가능할지 몰라도 그것은 일상생활에서는 사용될 수는 없을 것이다.
라이프니츠는 데카르트의 입론을 받아안아서, 모든 것을 단순한 본질로 환원하고, 문장을 그러한 단순 본질의 기호 연산으로 대체하면 보편 언어가 성립한다고 보았다. 보편 언어나 보편 문자에 관한 기획들 사이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여기에는 ‘절대적 단순성’ 개념이 항상 작동하고 있다. “이 개념이 무한주의적인 신학과 로고스, 즉 신의 무한한 오성으로 항상 귀결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은 쉬운 일일 것이다.(…) 그리고 본질적으로 표음적이 아닌 보편기호학에 대한 라이프니츠의(…) 기획은 전혀 로고스중심주의를 단절시키는 것이 아니다.(…) 역사적인 특정 시기의 내부에는 무한주의적 신학, 로고스중심주의 그리고 특정 기술주의 사이에 심층적인 통일성이 있는 것이다.”
로고스중심주의는 본래적인 의미에서 “민족 중심적인 형이상학이다.” 라이프니츠는 한자로부터 역사에 대한 한자의 독립성을 빌려오려고 한다. 라이프니츠는 이집트의 통속적이고 감각적인 문자에 비하여 중국의 한자는 철학적, 지성적이라고 간주하면서, 이보다 더 지적이고 보편적인 문자를 창안하려고 시도한다.
“따라서 중국 문자의 개념은 유럽인들이 지닌 일종의 환각처럼 기능했다. 이 점은 결코 우연적이지 않았다. 이러한 기능 작용은 엄밀한 필연성에 따른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환각은 무지보다는 몰인식을 나타냈다.”(149쪽)
라이프니츠의 합리주의와 다른 신비주의적 형태로는 키르케 신부의 연구가 있다.(150쪽)
인식론적 단절의 사례를 보여준 것은 프레레와 워버턴의 연구다. 프레레는 중국 문자가 철학적 언어가 아니라는 점을 밝히고, 워버턴은 상형 문자주의를 공격한다. 그리고 샹플리옹은 상형 문자의 해독 기술에 초점을 맞추었다. 이들의 노력 덕분에 이집트와 중국의 문자를 좀 더 정확히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과학과 인간이라는 명칭
“문자학은 확실한 과학의 길에 들어섰던 것일까?” “해독의 기술”이 “발전”하면서 “엄청난 발견”이 있었지만 “체계적인 분류에 대한 고심”은 “단순한 묘사”만 낳았다. 문자에 대한 발견들은 “로고스와 문자 사이의 관계라는 결정된 상황”에 맞추어진 “철학적 개념성”의 “토대들”을 흔들 수 있었는데 그렇게 하지 못하고 있다. “문자의 역사가들이 사용하는 개념들의 체계적 비판”이 가능하려면 “우리의 역사적 토양 자체”인 “지층”에 속해 있는 “허위적 증거들”을 “간파”할 수 있어야 한다.(152쪽)
<<고대에 있어서 문자의 역사>>(1892)를 저술한 P. 베르제의 경우 문자들의 유형 구분이 이론적으로만 적절할 뿐 역사적 사실과는 맞지 않는다고 비판한다. 문자들의 유형 구분은 “목적론적 환상” 속에서만 적합한 “표음적 모델로부터 영감을 받”았는데 문자의 도구주의적 관점에 입각해 있다고 한다.
문자들의 유형 구분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형이상학적 개념틀은 로고스 중심적 목적론, 자연과 제도의 대립, 표상(représentati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