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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 세미나 첫번째 발제문
lizom / 2017-07-11 / 조회 1,6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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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와 반복 서론 앞부분 발제입니다. 처음 읽을 때는 막막하더니 꼼꼼히 읽고 함께 얘기나누니 읽을 만합니다. 

 

<차이와 반복 > 서론 : 반복과 차이​ 1~3절 / 우리실험자들 / 박정수 / 2017. 7. 7 

 

   1절                    

 

반복과 일반성 : 첫 번째 구별(행동의 관점에서) 

 

우리는 보통 반복을 일반성과 혼동한다. 그래서 “두 사물이 물방울처럼 닮았다”고 하거나 “일반적인 것에 대해서만 과학이 성립한다”와 “반복하는 것에 대해서만 과학이 성립한다”를 같은 의미로 받아들인다. 일반성은 유사성과 등가성의 질서를 가진다. 유사한 것들은 순환 주기를 가져 통상적인 반복의 이미지를 형성한다. 등가의 것은 동등성을 가져 교환되고 대체될 수 있다. 특수한 것들 간의 교환과 대체는 일반성에 상응하는 대표적인 행동이다. 

 

반면에 우리는 반복이 ‘대체될 수 없는 것’과 관련된 행동이라고 생각한다. ‘행동이자 관점’으로서의 반복은 대체 불가능한 특이성singularit과 관련한다. 그것은 증여되거나 절도될지언정 결코 교환되지 않는다. 반복한다는 것은 유사성도, 등가성도 없는 어떤 유일무이하고 독특한 것과 관계하면서 행동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외적 행위로서의 반복은 더욱 비밀스러운 어떤 떨림, 심층적이고 내면적인 어떤 반복의 반향이다. 샤를 페기의 말처럼, 국가가 정한 7월 14일 축제는 바스티유 감옥의 점령을 기념하고 재현하는 축제가 아니다. 오히려 바스티유 감옥의 점령이 축제이며 그 위에 이어지는 다른 축제일들을 앞서 반복한다. 바스티유 점령은 보편적 축제를 반복하는 독특한 축제이다. 

 

일반성은 유사성, 등가성과 함께 법칙성을 내포한다. 보통 반복을 법칙성, 법칙의 반복으로 이해한다. 하지만 오히려 법칙은 특수자들에게 반복이 불가능함을 보여주며, 변화를 강요한다. 법칙은 그 주체들에게 법칙을 예시하도록 내몰지만, 동시에 주체들의 고유한 변화(변이)를 요구한다. 물론, 법칙이 지정하는 항들에는 불변항들도 있고, 또 자연에는 영속적이고 집요하는 남는 것들이 있다. 그러나 집요하게 남는다는 것은 반복과 무관하다. 한 법칙의 불변항은 더 일반적인 법칙에서 보면 변항들이 된다. 법칙에 예속된 주체는 더 크고 항구적인 대상과 관계함에 따라 반복하지 못하는 자신의 무능력을 경험한다. 만일 반복을 자연에서 발견할 수 있다면 그것은 법칙에 의해서가 아니라 기적에 의해서이다. 반복은 일반성에 대립하는 어떤 독특성, 특수성에 대립하는 어떤 보편성, 평범함에 대립하는 어떤 특이한 것, 변이에 대립하는 어떤 순간성, 항구성에 대립하는 어떤 영원성 등을 표현한다. 어떤 관점에서 보든 반복은 결국 위반이다. 반복은 법칙에 물음을 던진다. 

 

일반성의 두질서: 유사성과 동등성

보통 실험은 반복을 뒷받침한다고 한다. 어떤 조건에서 그런가? 실험은 닫힌 환경을 만든다. 그 환경에서 하나의 현상은 소수의 선택된 요인들에 입각해 정의된다. 여기서 수학이 자연과학에 적용된다. 선택된 요인이나 폐쇄된 환경들이 어떤 기하학적 좌표 체계를 이루기 때문이다. 이런 조건들 아래서 현상은 선택된 요인들의 양적 결합관계와 동등한 것으로 나타난다. 실험은 하나의 일반성의 질서에서 다른 일반성의 질서로, 즉 유사성의 질서를 동등성의 질서로 대체하는 것이다. 이런 이행에서 반복이 나타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건 가설적이다. ‘만약 똑같은 조건이 주어진다면...’ 이런 식으로 현상의 동등함을 재현할 수는 있지만, 반복에서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다. 본질상 반복은 어떤 독특한 ‘역량’에 의존한다. 

 

반복과 일반성: 두 번째 구별(법칙의 관점에서)

 

스토아주의의 오류는 자연법칙의 반복을 기대한 데 있다. 반복을 가능케 할 법칙을 발견하려는 꿈은 도덕법칙의 영역으로 자리를 옮긴다. 도덕주의자들은 선과 악을 이런 관점에서 서술한다. 자연에 속한 우리는 자연의 본성에 따라 반복(쾌락, 과거, 정념)을 꾀한다. 그때마다 절망이나 권태밖에 출구가 없는 저주받은 시도로 끝난다. 자연이 아니라 ‘선’이 우리에게 반복의 가능성을 선물할 것이다. 선은 자연의 법칙이 아니라 의무의 법칙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칸트는 사유의 시험(네 행위 준칙이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지에 대한 사유 시험)을 통해 모순 없이 반복될 수 있는 의무의 준칙을 도덕법칙으로 규정했다. 의무의 인간은 악마적인 것과 판에 박힌 것을 다 같이 극복했다고 믿는다. 그러나 칸트의 양말대님(가터벨트)과 고정적인 산책시간 같은 반복 장치들에 그의 도덕주의가 기반한 게 아닐까? 몸단장을 무시하고 버르장머리가 없는 것이 어떤 격률을 따르는 행동이라면, 그에 대해 칸트는 ‘이런 격률들은 모순 없이는 보편적 법칙으로 생각될 수 없고, 그러므로 권리 상 반복의 대상이 될 수 없다.’라고. 

 

칸트의 도덕적 양심은 정말 자연법칙에 외면적이고 우월한 걸까? 도덕적 양심은 자연법칙의 이미지와 모델을 되살릴 때만 도덕법칙에 적용되는 게 아닐까? 도덕법칙을 통해 우리는 참된 반복에 도달하기는커녕 여전히 일반성에 매몰되어 버린다. 습관의 일반성 말이다. 본질적으로 도덕적인 것, 선의 형상을 띠는 것은 습관의 형식이다. 

 

만약 반복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자연법칙에 반하는 만큼이나 도덕법칙에 반하여 성립한다. 도덕법칙을 전복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상승의 길로, 어떤 법칙의 질서는 더 상위의 질서, 더 일반적인 질서에 준거하여 파생적이고, 차용적인 질서로, 어떤 본연의 힘을 우회시키고 원천적인 역량을 참칭하는 이차적인 원리로 부정된다. 다른 하나는 하강의 길로, 법칙은 그 귀결들로 내려갈수록, 과도할 정도로 완벽한 세심함을 기울려 복종할수록 전복되기 쉽다. 허위로 복종하는 영혼이 법칙을 회피할 수 있고 법이 금지하는 쾌락을 향유할 수 있는 건 법칙을 그대로 따른 덕분이다. 준법파업이나 메저키즘에서 이걸 볼 수 있다. 첫째는 아이러니의 형식이고, 둘째는 유머의 형식이다. 반복은 해학과 반어에 속하는 사태이다. 반복은 본성상 위반이고 예외이다. 반복은 법칙에 종속된 특수자에 반하여 위반 속에 나타나는 독특성을 드러내고, 법칙을 만드는 일반성에 반하여 어떤 보편자를 드러낸다. 

 

   2절                    

 

반복 철학의 프로그램: 키에르케고르, 니체, 페기          

 

키에르케고르, 니체, 그리고 샤를 페기Charles Peguy(1873-1914)는 자기만의 방법으로 반복을 언어와 사유의 고유한 역량, 파토스, 고등 병리학으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미래 철학의 근본 범주로 만들었다. 키에르케고르와 니체 사이에 일치되는 명제가 있다. 1) 반복을 어떤 시험, 선별, 선별적 시험과 이어놓기, 반복을 의지와 자유가 향하는 최상의 대상으로 설정하기. 2) 반복을 자연법칙에 대립시키기. 3) 반복을 도덕법칙에 대립시키기. 반복을 윤리의 지연과 보류로, 선악을 넘어선 사유로 만들기, 반복은 고독한 자, 단독자의 로고스로 나타나며 ‘사적인 사유자’의 로고스로 나타난다. 가령, 욥은 무한한 항의를, 아브라함은 무한한 체념을 구현한다. 욥은 아이러니의 방법으로 법률을 문제삼고 모든 간접적 형태의 설명을 거부하며 일반적인 것을 퇴출시킨다. 그리고 마침내 원리의 자격과 보편성을 지니는 가장 독특한 것에 도달한다. 아브라함은 유머의 방법으로 법칙에 굴복하지만 바로 이 굴복 안에서 법률이 제물로 요구했던 외아들의 독특성을 찾아낸다. 니체는 도덕법칙 안에 있는 반복의 시험을 두고 칸트와 경쟁한다. 영원회귀는 이렇게 말한다. 네가 무엇을 의지하든 그것의 영원회귀를 의지하는 방식으로 그것을 의지하라. 이것은 칸트류의 형식주의지만, 칸트를 전복시킨다. 미리 가정된 도덕법칙에 반복을 결부시키는 대신 니체는 도덕을 넘어서는 어떤 법칙(영원회귀)에 반복을 결부시키고, 반복을 그 법칙의 유일한 형식으로 만든다. 영원회귀에서 나타나는 반복의 형식, 그것은 무매개성의 난폭한 형식이며 보편성과 독특성을 하나로 엮는 형식이다. 이 형식을 통해 모든 일반적 법칙은 특권적 지위를 빼앗기고 매개들은 용해되며 법칙에 예속된 특수성들은 사라지게 된다. 

 

4) 반복을 습관의 일반성뿐 아니라 기억의 특수성들과 대립시키기. 니체와 키에르케고르에게 반복은 상기라는 고전적 범주에, 그리고 하비투스라는 근대적 범주에 대립하는 위치에 있다. 반복 안에서, 반복을 통해서, 비로소 망각은 어떤 실증적 역량이 되고, 무의식은 어떤 실증적이고 월등한 무의식이 된다.(가령, 힘으로서의 망각은 영원회귀의 체험을 구성하는 일부이다.) 키에르케고르가 반복을 의식의 이차적 역량이라고 할 때 ‘이차적’은 두 번째를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히려 단 한번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무한자, 한 순간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영원, 의식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무의식, ‘n승’(반복)의 역량을 의미한다. 니체가 영원회귀를 힘의 의지에 대한 무매개적 표현이라고 제시했을 때 이 의지는 ‘역량을 의욕한다’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무엇을 의지하든 간에 의지하는 바의 것을 ‘거듭제곱’의 역량으로 끌어올리는 것을 뜻한다. 즉 역량의 우월한 형식을 끌어내라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의 우월한 형식 -그것은 ‘n승’(반복)의 역량을 가졌는가 - 여기에 영원회귀와 초인의 직접적 동일성이 있다. 

 

니체와 키에르케고르는 둘 다 철학에 새로운 표현수단을 도입했다. 이들의 모든 저작이 문제삼고 있는 것은 ‘운동’이다. 이들이 헤겔을 비난하는 것은 그가 거짓 운동, 추상적인 논리적 운동, 다시 말해 ‘매개’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다. 키에르케고르와 니체는 형이상학이 운동성과 활동성을 띠게 되기를 원한다. 이들은 재현을 넘어 정신을 뒤흔들 수 있는 방식으로 운동을 표현하고자 했다. 운동 자체를 중재도, 매개도 없이 하나의 작품으로 만드는 것, 재현을 직접적 기호로 대체하는 것. 직접적으로 정신에 힘을 미치는 어떤 진동, 회전, 소용돌이, 중력들, 춤 또는 도약들을 표현하는 것이 문제다. 이런 문제의식은 시대를 앞서가는 연극인의 이념이며 연출자의 이념이다. 단순히 철학적 연극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철학 안에서 연극에 상응하는 어떤 놀라운 등가물을 발명하고, 새로운 철학은 물론 미래의 연극을 동시에 정초한다. 키에르케고르가 경건한 기사와 주일을 지키는 부르주아는 혼동되리만큼 유사하다고 설명할 때 우리는 이 철학적 언급을 경건한 기사가 어떻게 연기되어야 하는지를 지시하는 연출자의 언급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니체도 마찬가지다. 니체가 바그너와 결별한 것은 이론의 문제, 음악의 문제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니체가 꿈꾼 연극 안에서 텍스트, 플롯, 조음, 음악, 빛, 노래, 춤, 무대 장치 각각이 떠맡는 역할과 관련된 문제 때문이다. 비제가 바그너보다 뛰어나다면, 그건 연극의 관점에서, 또한 <차라투스트라>에 들어갈 춤들에 비추어 그렇다. 니체가 바그너를 비난한 건 그가 ‘운동’을 전도시키고 훼손했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행진하고 춤추게 하지 않고 진창 속을 걷고 헤엄치게 하는 물위의 연극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철학적인 책이지만, 또한 전적으로 무대 연출을 위해 구상되었다. 우월한 인간의 외침에 상응하는 정확한 소리를 찾으려고 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차라투스트라>를 읽을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이야기를 열어가는 줄타기 광대를 무대에서 연출해보지 않은 채 어떻게 이 작품의 서설을 읽을 수 있단 말인가? 니체는 괜히 초인의 희극성에 대해 말하는 게 아니다. 늙은 마법사의 입을 통해 흘러나오는 아리아드네의 노래를 떠올려 보라. 두 개의 가면이 중첩된다. 페르세포네와 같은 젊은 여인의 가면이 있고 그 가면은 혐오스러운 늙은이의 가면에 중첩된다. 배우는 페르세포네를 연기하는 노인의 배역을 연기해야 한다. 니체가 초인은 예수회에 소속되는 동시에 프로이센 장교집단에 속한다고 말할 때 이것은 초인이 어떻게 연기되어야 하는지를 지시하는 연출가의 언급이다. 

 

헤겔은 이념을 드라마로 극화하는 대신 재현의 반성적 지반 위에서 개념들을 재현한다. 반면에 키에르게고르와 니체의 철학-연극은 비어 있는 무대 공간에서 전개된다. 이 빈 공간이 기호와 가면들- 배우는 이것들을 가지고 다른 배역들을 연기하는 어떤 배역을 연기한다 - 에 의해 채워지면서, 반복은 자기 안에 차이들을 포괄하면서 하나의 특이점에서 다른 특이점으로 직물처럼 짜여나간다. 반복의 연극은 재현의 연극에 대립한다. 이는 운동이 개념과 재현에 대립하는 것과 같다. 재현은 운동을 개념과 결부시킨다. 반면에 반복의 연극에서 체험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순수한 힘들이며 공간 안에서 용솟음치는 역동적인 궤적들이다. 이들은 단어들이 존재하기 이전에 말하는 언어, 유기적 신체들보다 앞서 표현되는 몸짓들, 얼굴들보다 앞선 가면들, 등장인물들보다 앞선 유령과 환영들이다. 잔혹극. 

 

키에르케고르와 니체의 차이는 ‘운동을 만든다’ 혹은 반복한다. 반복을 획득한다는 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에 달려 있다. 키에르케고르는 그것을 ‘도약하는 것’으로 본다. 반면에 니체는 ‘춤추는 것’으로 본다. 키에르케고르가 우리에게 보여주는 것은 어떤 신앙극, 영적인 운동, 신앙의 운동이다. 그는 모든 미학적 반복을 극복하고 반어뿐 아니라 해학조차도 극복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단지 그런 극복의 미학적, 반어적, 해학적 이미지만을 보여줄 뿐이다. 니체가 보여주는 것은 어떤 불신앙의 연극, 퓌지스에 해당하는 운동의 연극이며 그것은 어떤 잔혹극이다. 여기서 반어와 해학은 극복할 수 없다. 자연의 밑바닥에서 그게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영원회귀가 지닌 힘은 ‘같음’ 일반을 되돌아오게 하는 힘이 아니라 창조하되 선별하고, 추방하는 힘, 생산하되 파괴하는 힘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니체는 영원회귀 안에서 나타나는 반복의 근거를 신의 죽음과 자아의 붕괴 위에 두고 있다. 반면에 키에르케고르는 어떤 재발견된 신과 어떤 재발견된 자아의 결합을 꿈꾼다. 

 

   3절                    

 

반복과 일반성: 세 번째 구별(개념의 관점에서)           

 

이제 개념 혹은 재현의 관점에서 반복과 일반성의 대립을 살펴보자. 권리 상 어떤 개념(고유명사)은 실존하는 사물의 개념일 수 있고 그런 한에서 무한한 내포를 갖는다. 라이프니츠에 따르면 완벽하게 창조된 자연에는 그 어떤 사물도 동일하지 않다. 즉 식별불가능한 두 개체는 없다. 똑같은 두 밀알, 두 먼지는 없다. 모든 사물이 언제나 어떤 내적 차이, 개념적 차이를 가진다. 그렇지만 개념의 내포는 무한히 확장되지 못하도록 각각의 규정에 의해, 즉 자신이 내포하는 술어들 각각의 수준에서 봉쇄될 수 있다. 각각의 규정(가령, ‘동물’이라는 규정)은 일반적인 것으로 남아 있거나 어떤 유사성을 정의한다. 개념 안에 고정되어 있으면서 권리상 무한히 많은 사물들(동물의 내포는 인간과 말에 공히 적용된다)에 합치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이(개념 안의 차이, 종적 차이)의 원리는 유사성(일반성)들의 포착을 금지하지 않는다. 오히려 어떤 차이가 있는가? 라는 물음은 항상 어떤 유사성(일반성)이 있는가? 라는 물음으로 바뀔 수 있다. 

 

이런 유형의 인위적(논리적, 분류학적) 봉쇄와 다른 유형의 봉쇄를 생각할 수 있다. 그것은 자연적 봉쇄라 불러야 할 것이다. 가령, 그 내포가 유한한 국면에서 포착한 어떤 개념이 있는데 이 개념에 시간과 공간상의 한 장소를, 즉 보통 외연=1에 해당하는 어떤 실존을 강제로 할당한다. 그럼 유한한 내포가 요구하는 외연=무한대와 강제로 부여된 외연=1 사이에 분열이 생기는데, 그것을 이산적discrte 외연이라 한다. 그 결과 개념의 관점에서는 절대적으로 동일하지만 실존 안에서는 각각 독특한 개체들이 발생한다. (분신들, 혹은 쌍둥이) 이산적 외연이라는 이 현상은 개념의 자연적 봉쇄를 함축하는데, 그것은 (논리적 봉쇄처럼) 사유 안에 유사성의 질서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실존 안에 어떤 참된 반복을 형성한다. 이렇게 봉쇄된 내포는 개념의 일반성이라는 논리적 역량을 지칭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개념의 무능력이나 실재적 한계를 증언하며, 반복을 실존으로 이행하게 만든다. 이런 이행의 사례는 에피쿠로스의 원자이다. 공간 안에 국소적 위치를 점하는 개체로 정의된 원자는 빈곤한 내포만을 갖지만, 이런 빈곤성은 이산적 외연과 더불어 만회되고(즉 외연=1의 실존성을 가지면서) 결국 똑같은 형상과 똑같은 크기의 원자들이 (마치 쌍둥이처럼, 분신처럼) 무한하게 많이(반복하여) 실존하기에 이른다. 

 

또 다른 자연적 봉쇄가 있다. 한 개념이 자신의 내포를 무한정 확장해나가면서도(그럼 외연=1이 되어야 하는데) 그 자체가 언제나 무한정한 복수의 대상을 포섭할 수 있는 경우다. 그 내포가 아무리 멀리까지 진행될 수 있다 하더라도, 항상 이 개념은 서로 완전히 동일한 어떤 대상들을 포섭한다고 간주될 수 있다. 이 경우 우리는 이 대상들 사이에 비개념적 차이(시,공간 상의 차이)들이 현존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거기에는 어떤 최소한의 반복이 있다. 반복은 개념을 통한 종별화에 저항하는, 직관 속에 끈덕지게 실존하는 존재자의 고집을 표현한다. 반복은 실존하는 존재자의 어떤 고유한 역량을 드러낸다. 무한정한 내포를 갖는 개념들이 자연의 개념이라면, 그 개념들은 자연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자연을 응시하는 정신 안에 있게 된다. 자연이 외면화된 개념이라거나, 자기 자신과 대립되는 소외된 정신이라고 말하는 경우다. 자연은 왜 반복하는 것일까? 그것은 자연이 ‘일시적 정신’이기 때문이다. 이런 종류의 개념들에 대응하는 대상들은 그 자체가 기억을 결여하고 있다. 

 

또 다른 자연적 봉쇄가 있다. 무한한 내포를 지니고 기억을 갖추었으나 자기의식을 결여한 어떤 개별적 기초개념이나 특수한 표상이 있다. 어떤 개념의 내포 안에 기억내용도 있으나 어떤 자연적 이유로 의식의 대자적 차원이나 재인의 차원이 결핍되는 경우가 있다. 의식이 앎을 결여할 때 앎은 인식되는 게 아니라 반복되고 행동으로 옮겨진다. 반복은 여기서 자유로운 개념의 무의식, 앎이나 기억내용의 무의식, 표상의 무의식으로 드러난다. 이런 봉쇄에 자연스런 설명이유를 마련해준 것은 프로이트였다. 억압과 저항에 의해 (무의식의) 반복은 어떤 ‘강제’, ‘강박’이 된다. 프로이트의 관점에 따르면, 반복과 의식, 반복과 재기억, 반복과 재인 사이에는 반비례 관계가 있다. 더 적게 회상하고 더 적게 의식할수록 과거는 그만큼 더 많이 반복된다. 반복하지 않으려면 회상하시오. 기억을 철저히 되새기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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