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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세미나 후기] <폭력비판을 위하여> (2017. 07. 11.)
wonchoi… / 2017-07-12 / 조회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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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의 <폭력비판을 위하여> 세미나 후기

(2017년 7월 11일)

 

<폭력비판을 위하여>(1921) 세미나에서 저희는 신화적 폭력(mythical violence)과 신적 폭력(divine violence)의 차이를 공부했습니다. 신화적 폭력을 설명하기 위해 벤야민은 니오베 신화를 이야기합니다. 니오베는 일곱 명의 아들과 일곱 명의 딸을 둔 어머니로 여신 헤라에게 ‘나는 인간인데도 이렇게 많은 아들과 딸을 두었는데, 헤라 너는 여신인데도 어떻게 아들 둘 밖에 못 나은 것인가?’ 하며 조롱하다가 분노한 헤라가 자신의 두 아들을 보내 니오베의 아들과 딸을 모두 죽여 버리자 절망과 슬픔 속에서 속죄하며 살아가게 되는 비극적 신화의 주인공이지요. 여기서 핵심은 헤라의 폭력이 아들과 딸만을 죽이고 니오베 자신을 살려둔다는 데에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헤라의 폭력은 니오베를 종속시키기 위한 위협으로서의 폭력이자, 인간과 신 사이의 구분과 위계의 경계에 초석을 세워놓으려는 폭력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벤야민은 이를 법-정립적 폭력과 다르지 않다고 말합니다. 이에 반해 신적 폭력은 구약성서 민수기에 등장하는 예시를 통해 설명되지요. 레위족 사람들이 모세에게 반역하여 모세를 치러 몰려가자 하나님은 땅을 갈라서 이 레위족 사람들을 모조리 집어 삼키게 만들어 버립니다. 이게 신적 폭력인데요, 그런 의미에서 신적 폭력은 공포를 줌으로써 주체를 종속시키거나 속죄하게 만들려고 하는 폭력, 그렇게 해서 법을 정립하려는 폭력이 아니라, 오히려 경계나 종속적 위계를 사라지게 만드는 폭력으로서 법-파괴적 폭력이라고 말합니다.  

 

이 법파괴적인 신적 폭력은 또한 피를 흘리지 않는 폭력이라고 이야기하는데요, 땅을 갈라서 레위족 사람들을 집어 삼키게 만들었기 때문에 거기엔 피가 보이지 않는다고 벤야민은 말하지요. 이 신적 폭력에 대해서 데리다는 나중에 <법의 힘>에서 그것은 나치의 최종 해결책으로서의 아우슈비츠에서의 가스실 학살과 마찬가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유보적인 생각을 표명합니다. 가스실에서의 학살 또한 피를 보지 않은 학살이었다는 것이지요. 이런 비판에 대해 나중에 아감벤은 피에 대한 벤야민의 논의가 너무 글자 그대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는 변호를 하게 되는데요, 사실 데리다가 유보를 표명하는 이유는 거기에 피가 있었는가 없었는가에 관련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그 폭력이 절멸적 폭력이라는 점에 관련된다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즉 종속과 위계관계의 정립을 목표로 하지 않는 폭력이 극단적 폭력일 수 있다는 점을 데리다는 보고 있는 것이지요.

 

사실 벤야민은 <폭력비판을 위하여>에서 죠르주 소렐의 <폭력에 대한 성찰>에 준거하여 두 가지 총파업을 구분합니다. 정치적 총파업과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이 그것입니다. 정치적 총파업은 국가권력 자체 또는 자본주의적 법질서는 전혀 건드리지 않으면서도 몇몇 외적 노동조건을 바꾸려는 파업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협박과 같다고 말하면서 벤야민은 이것이 폭력이라고 말하지요. 반면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은 국가 질서 그 자체를 전복하려고 하는 것이고, 어떤 물질적 이득을 얻기 위한 것이 아닌 만큼 (오염되지 않은) 순수한 수단으로서의 비폭력이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이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이 신적 폭력의 일종인 것인가라는 매우 까다로운 문제가 제기되는데, 그걸 어떻게 생각할지에 대해 세미나에서 이런 저런 논의를 해보았습니다만, 충분히 해결하지는 못했습니다. 신적 폭력을 비폭력적 순수수단으로서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이라고 말하면 왜 그것을 폭력이라고 부르는지가 애매하기 때문이지요.  

 

그러면서 세미나에서 벤야민이 이 두 가지 총파업을 그토록 대립시키는 데에는 당시 시대적인 배경이 놓여 있다는 지적을 했습니다. 1917년에 러시아 혁명이 일어나자 이를 모방한 1918년 독일 혁명이 일어났지요. 전쟁에서 돌아온 병사들과 노동자들이 함께 소비에트를 만들고 봉기를 일으켰지요. 그런데 이 때 다수파였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권력을 움켜쥐자(바이마르공화국 수립) 혁명을 더욱 밀고 나가 그것을 공산주의적 혁명으로 만들려고 했던 공산주의자들, 다시 말해서 로자 룩셈부르크와 리프트크네히트의 지도하에 있던 스파르타쿠스단을 무자비하게 진압합니다. 룩셈부르크와 리프트크네히트는 즉결 총살되고 그 시신은 강물에 던져지지요. 그러니 사회민주주의자들에 대한 공산주의자들의 분노와 증오는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나중에 나치즘이 발흥했을 때 공산주의자들은 심지어 나치와 손을 잡고 총파업을 벌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바이마르공화국을 무너뜨리려고 했지요. 일단 혁명적 정세가 오면 대중들은 나치를 버리고 공산주의자들을 선택할 것이라고 믿으면서 말이지요. 물론 결과는 정반대로 일어났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지요.  

 

벤야민의 <폭력 비판을 위하여>는 1921년 작품으로 그야말로 독일혁명의 실패와 배반이 있은지 3년 정도 지났을 때 쓴 텍스트이지요. 벤야민이 노동의 외적 조건을 바꾸려는 정치적 총파업에 대해 비난하면서 국가-법질서 자체를 무너뜨리는 무정부주의적 총파업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총파업을 주장하는 것은 이런 역사적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벤야민은 법정립적 폭력과 법보존적 폭력의 순환을 분석하면서 법정립적 폭력이 법을 일단 정립시키면 그 후 그 법을 보존하려는 폭력이 지속되고, 다시 그 법을 무너뜨리고 새 법을 만들려는 법정립적 폭력이 또 발발하고, 다시 그 새 법을 지키려는 법보존적 폭력이 지속되는 식의 이 순환이 법적 폭력의 순환이라고 봤습니다. 그리고 그 순환을 끊어내는 폭력으로서 법파괴적인 신적 폭력을 말하면서, 이것을 탈정립적이라고 부르지요.  

 

나중에 아감벤은 네그리나 발리바르가 제헌권력과 제헌된 권력을 나누고 이를 봉기와 구성의 변증법을 통해 사유하는 것을 비판하면서 탈정립을 말하는데, 이는 바로 벤야민의 이런 사고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봉기와 구성의 변증법적 순환 그 자체를 끊어내는 탈정립적인 신적 폭력을 사고하려는 것이겠지요. 우리는 이를 바틀비의 무위의 철학(I prefer not to)과도 연결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는 역사철학테제를 보려고 하는데, 이 텍스트는 <폭력 비판을 위하여>보다 20년 후에 쓴 텍스트이니만큼 무엇이 유지되고 무엇이 변하는지 유심히 살펴봐야할 텍스트라는 이야기를 하며 세미나를 마쳤습니다.  

 

(후기 작성: 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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