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의 엽서] 바깥 쪽은 안쪽이다X (그라마톨로지 85~122쪽)
최원
/ 2017-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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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쪽은 안쪽이다X (그라마톨로지 85~122쪽)
1. 제도화된 흔적
데리다는 기호의 자의성이라는 소쉬르의 테제 자체를 철저하게 고수함으로써 소쉬르 자신의 모순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탈구축의 작업을 펼친다. 소쉬르에 따르면 기호의 자의성 테제는 음성 기표들과 그것들의 기의들 일반 사이의 “자연적” 관계 내에서만 적용될 수 있다. 그러나 음성기표와 문자기표의 총체를 비동기화된 제도들(institutions immotivées)로 간주하는 순간부터 기표들의 범주들 사이의 종속 또는 위계질서는 배제되어야 할 것이다. 에크리튀르가 한 기호의 지속적 제도/확립을 의미한다면(이것이 에크리튀르 개념의 환원 불가능한 유일한 핵심이다), 에크리튀르 일반은 언어 기호들의 전 영역을 포괄하는 것이다. 푸시스와 노모스의 대립은 에크리튀르의 매개에 의해 뒤흔들린다. 따라서 불가피한 결론은 자연적 기호들만이, 즉 헤겔과 소쉬르가 ‘상징’이라고 일컫는 기호만이 문자학으로서의 기호학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전에 그 자연적 기호들은 일반 기호학의 분야로서의 언어학 영역 밖으로 떨어진다. 따라서 기호의 자의성에 대한 주장은 소쉬르가 에크리튀르를 언어의 외적 어둠 속으로 쫓아낼 때 표명한 논지를 간접적으로,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반박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기호의 자의성 자체를 명분으로, 에크리튀르를 언어(langue)의 이미지로 규정한 소쉬르의 정의를 거부해야 한다. 음소란 상상될 수 없는 것이고, 어떤 가시성도 음소를 닮을 수 없다는 점 외에도, 소쉬르가 상징과 기호의 차이에 대해 했던 말만 고려해도, 소쉬르가 어떻게 에크리튀르를 언어의 ‘이미지’나 ‘형상화’라고 말하면서 동시에 다른 곳에서는 언어와 문자를 “구분되는 두 기호 체계”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프로이트가 <꿈의 해석>에서 말한 [빌려온 주전자의] 논리처럼, 소쉬르는 문자의 배제를 위해서 모순적 논지들을 축적한다. <일반 언어학 강의>의 제6장(문자언어에 의한 언어의 대리 표상)은 조금도 과학적이지 않다. 단지 하나의 지표로서만 취급하고 있는 소쉬르의 텍스트가 보여주는 것과 몇몇 다른 지표들(일반적으로 에크리튀르 개념의 처리)은 가장 큰 총체성-에피스테메 및 로고스중심주의적 형이상학-의 탈구축을 시작하는 확실한 방법을 제공한다. 이 총체성 속에서, 에크리튀르에 대한 문제제기 없이 분석, 설명, 읽기, 해석의 모든 서구적 방법들이 생산되었다.
에크리튀르가 말하기(parole)의 이미지나 상징이 아니기 때문에 말하기에 보다 외재적이고 동시에 보다 내재적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말하기는 그 자체에 있어서 하나의 에크리튀르다. 기호표기의 개념은 제도화된 흔적이라는 판단기준을 의미 작용의 모든 체계들에 공통적인 가능성으로서 암묵적으로 전제한다. 제도화된 흔적은 ‘동기가 없다’. 그러나 그것이 변덕스럽다는 뜻은 아니다. 소쉬르가 말한 자의성은 ‘기표가 말하는 주체의 자유로운 선택에 달려 있다는’ 뜻은 아니다. 기표는 기의와 어떠한 ‘자연적 관계’도 없다는 뜻이다(사회적 협약). 이 같은 ‘자연적 관계’의 단절은 자연성의 관념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제도’라는 단어는 고전적 대립 안에서 너무 서둘러 해석되어선 안 된다. 제도화된 흔적이라는 것을 통해 떠올리는 것은 하나의 지시 구조 내에서 차이의 기억(rétention)이다. 또 다른 지금-여기의 부재, 또 다른 시원의 부재. 이런 부재라는 표현은 기호의 자의성(자연과 규약, 상징과 기호의 대립)이 함축하는 구조를 기술하며, 이 파생적 대립이 의미를 갖는 것은 오직 흔적의 가능성이 있을 때부터이다. 기호의 ‘비동기화’는 타자 전체가 이 전체가 아닌 것 속에서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종합을 요구한다. 타자 전체가 있는 그대로 나타난다는 것, 바로 이것이 모든 역사이다. 타자와의 관계가 표시되는 흔적은 존재자의 모든 영역(무생물, 생물, 의식)에서 자신의 가능성을 드러낸다. 존재자 이전에 흔적을 생각해야 한다. 그러나 흔적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은폐되어 있다. 그것은 자신의 은폐처럼 발생한다. 타자가 있는 그대로 나타나는 데 비해 그것은 자신의 은폐 속에서 나타난다.
그렇기 때문에 ‘비동기화’의 운동은 ‘기호’가 ‘상징’의 단계를 넘어설 때 하나의 구조에서 다른 구조로 넘어가는 것이다. 흔적의 비동기화는 어떤 ‘자연’에도 준거하지 않은 채 언제나 생성되었다. 하지만 사실을 말하자면, 동기 없는 흔적은 없다. 흔적은 무한히 자기 자신의 비동기화인 것이다. 소쉬르는 말하지 않았지만, 그의 언어를 사용하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상징도 기호도 없지만, 상징의 ‘기호-되기’가 있다.
2. 퍼스
퍼스는 비동기화의 환원 불가능성에 대해 소쉬르보다 더 주의를 기울였다. 상징의 비동기화가 초점인데, 퍼스가 사용하는 ‘상징’ 개념은 소쉬르가 상징과 대립시키는 기호의 개념과 유사한 역할을 한다. 퍼스는 외관상 양립불가능한 두 가지 요구에 응한다. 첫째, 상징 체계가 비상징 체계, 다시 말해 미리 앞서 연결된 어떤 의미 작용범주에 뿌리내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둘째, 그러나 이 같은 뿌리내림이 상징적 영역의 구조적 독창성을 해쳐서는 안 되고, 어떤 분야, 생산, 유희의 자율성을 해쳐서도 안된다. “모든 상징은 상징으로부터 나온다.”
퍼스에 따르면, 논리학은 하나의 기호학에 불과하며, ‘엄밀한 의미에서의’ 논리학은 이 기호학에서 근본적이 아닌 일정한 수준만을 차지한다. 후설의 경우처럼 가장 낮은 수준, 즉 논리학을 가능하게 만드는 토대는 토마스 데르푸르트의 “사변문법”의 계획에 대응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의 담론이 의미를 갖기 위해, 다시 말해 무언가를 말하고자 하기 위해 만족시켜야 하는 조건들에 대한 형식적 독트린을 구상하는 것이다. 이 의미가 허위적이거나 모순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이처럼 말하고자 하는 바의 일반 형태론은 진리의 모든 논리에 독립적이다.
기호과학의 세 갈래. 1) 사변문법 = 순수문법. 2) 엄밀한 의미에서의 논리학. 3) 순수 수사학(이것의 과제는 모든 과학적 정신에서 한 기호가 또 다른 기호를 탄생시키고, 보다 특수하게는 한 사유가 다른 사유를 낳는 그 법칙을 결정하는 것).
이렇게 해서 퍼스는 초월적 기의, 어느 순간엔가 기호가 기호를 계속적으로 지시하는 현상에 종지부를 찍게 될 초월적 기의(곧 기표 없는 기의, 순수 기의)의 탈구축이라고 부른 것의 방향으로 멀리 나간다. 퍼스는 이런 계속적 지시의 무한정성을 기호체계의 기준으로 봤다. 의미 작용의 운동을 출범시키는 것은 중단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물 자체가 하나의 기호이다. 이는 후설이 받아들일 수 없는 명제인데, 왜냐하면 후설의 현상학은 현전의 형이상학을 가장 급진적으로, 가장 비판적으로 복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후설의 현상학과 퍼스의 현상학의 차이는 근본적이다. 퍼스는 현상학의 발명자에 후설보다 더 가깝다. 실제 랑베르는 사물들의 이론을 기호들의 이론으로 귀결시키고자 했다. 퍼스의 현상기술학 또는 현상학에 따르면 발현(manifestation)은 현전을 드러내지 않고 기호를 만든다. <현상학의 원리>에는 “발현의 관념은 하나의 기호 관념이다”라는 문장이 있다. 따라서 의미화된 사물을 자신의 현전이 발하는 광채 속에서 빛나게 해주는 기호나 표상체를 환원시키는 현상성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른바 ‘(사)물 자체’는 언제나 이미 직관적인 명증성의 단순성으로부터 벗어난 표상체(representamen)이다. 이 표상체는 하나의 해석체를 야기함으로써만 기능하고, 이 해석체 자체도 기호가 되며 그렇게 무한히 계속된다. 기의의 자기 정체성은 끊임없이 이동된다. 표상체의 고유함(속성)은 자기 자신이며 타자라느 것이고, 돌려보내기의 구조로서 스스로를 생산하고 자신으로부터 분리된다는 것이다. 표상체의 고유함은 고유하지 않다는 것, 다시 말해 자신과 절대적으로 가깝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데 표상된 것은 언제나 이미 하나의 표상체이다.
따라서 의미가 있는 그 순간부터 기호들만이 있다. 우리는 오직 기호들을 통해서만 생각한다. 이것이 니체에게서처럼 기호의 요구가 그 권리의 절대 속에서 인정되는 바로 그 순간에 기호의 의념을 망가뜨리게 되는 것이다. 초월적 기의의 부재를 유희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퍼스의 시대는 언어학을 의미론에 연결시키는 것(소쉬르로부터 옐름슬레우에 이르기까지 모든 유럽 언어학자들이 아직도 취하는 자세)을 거부하면서, 즉 의미의 문제를 연구에서 제외하면서 미국의 일부 언어학자들이 끊임없이 유희의 모델에 준거하는 시기이다. <파이드로스>는 에크리튀르를 유희로 단죄했고, 이 유치한 놀이에 말하기의 진지하고 어른다운 진중함을 대립시켰다. 이는 세계 안에서의 유희가 아니다. 이는 세계의 유희이다.
따라서 우리는 처음부터 상징의 비동기화 속에 있는 것이다. 이 비동기화에 비추어 볼 때, 통시적인 것과 공시적인 것의 대립 역시 파생된 것이다. 흔적의 비동기성은 이제 하나의 상태가 아니라 활동, 주어진 구조가 아니라 활동적 운동이나 탈동기화로 이해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기호의 자의성을 다루는 과학, 흔적의 비동기화를 다루는 과학, 음성 언어 이전의 그리고 음성 언어 안에서의 에크리튀르를 다루는 과학인 문자학은 가장 방대한 영역을 포함한다 할 것이다.
3. 문자학
따라서 <일반언어학 강의>에서 기호학을 문자학으로 바꾸어 놓아야 한다. 소쉬르에게선 실제로 기호학이 언어학보다 일반적이고 포괄적이었다 할지라도 그것은 언어학의 한 분야의 특권을 계속 추종했다. 언어 기호는 기호학에 모범적으로 남아 있었다. 언어 기호가 지배적인 기호이자 생성적 모델인 것처럼, 주인인 것처럼 기호학을 지배했다. 소쉬르는 언어학을 기호학의 부분이라고는 말했지만, 바르트는 기호학이 언어학의 부분이라고 말함으로써 소쉬르의 언어기호 특권화의 의도를 실행한다.
어떤 점에서 언어(랑그)가 에크리튀르의 일종인지를 보기 위해 데리다는 소쉬르가 음성적 차이를 언어적 가치의 조건으로 설명하는 순간에 에크리튀르와 비교를 행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본다: 1) 에크리튀르의 기호들은 자의적이다. 2) 철자들의 가치는 순전히 소극적이고 차이적이다. 3) 에크리튀르의 가치들은 일정 수의 철자들로 이루어진 규정된 하나의 체계 내에서 서로 대립함으로써만 작용한다. 4) 기호의 생산 수단은 아무래도 좋다. 5) 자의성과 차이성은 상관적인 두 개의 특질이다.
따라서 소쉬르를 소쉬르 자신에 대립시켜야 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기호의 자의성이 아니라 기호의 자의성에 토대를 제공하는 언어 가치의 원천으로서의 차이이다. 차이는 정의상 그 자체로서는 결코 감각적 충만함이 아니기 때문에 차이의 필연성은 언어가 자연적으로 음성적 본질을 지녔다는 주장과는 어긋난다(차이는 음성적 본질을 가졌다고 말할 수 없다). 실제로 소쉬르는 “언어기표는 본질상 전혀 음성적이 아니고 무형적이다”라고 말한다. 음성적 질료의 이런 환원이 없다면, 랑그와 파롤의 구분은 어떤 엄밀성도 지닐 수 없다. “음성학은 .... 파롤에 속한다.” 따라서 파롤이 비롯되는 원천은 랑그라는 에크리튀르의 자산이다.
야콥슨/할레는 음성적 실체를 괄호 속에 넣고 불변요소들을 연구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옐름슬레우의 언리학을 비판한다. 그 이유는 첫째, 그것이 실천 불가능하다는 것, 즉 음성적 실체가 분석의 모든 단계에서 고려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범례의 구실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히 반박할 수 있다. 둘째, 권리상 받아들일 수 없는데, 왜냐하면 언어에서 상수가 변수에 대립하듯이 형태가 실체에 대립한다고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야콥슨/할레는 “구어를 마스터하고 난 후에야 읽고 쓰는 법을 배운다”는 사실상의 발생순서에 의거해서 문자 언어의 부차성을 주장하고, 문자언어를 기생적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문제는 기생물이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자언어가 기생물에 대한 우리의 논리를 재고하도록 만든다면 어쩔 것인가? (마르티네의 논의, 타자기 원리와 음운론 사이에 유사함이 있음을 인정하면서도 대부분의 언어학자들은 자신의 과학 영역에 순전히 가설적인 체계들을 포함시킬 수 있다는 이론적 이점만을 위해 전통적인 술어체계를 철저히 수정하는 데에는 주저한다고 말하면서 기각).
4. 원-에크리튀르
에크리튀르의 이른바 파생이 매우 현실적이고 지대하다 할지라도, 그것은 다음과 같은 하나의 조건으로만 가능했다는 점이다. 즉 ‘최초의’ ‘자연적’ 언어는 결코 존재한 적도 없었고, 그것이 에크리튀르로부터 영햐을 받지 않고 순수하게 있었던 적도 없었고, 그것 자체가 언제나 하나의 에크리튀르였다는 점 말이다. 그것은 원-에크리튀르였는데, 우리는 여기서 이 원에크리튀르라는 새로운 개념의 윤곽을 제시하고자 한다. 원-에크리튀르를 계속 에크리튀르라고 부르는 것은 다만 그것이 본질적으로 문자의 통속적 개념과 통하기 때문이다. 차이는 흔적 없이는 생각될 수 없는 것이다.
이 원-에크리튀르는 그 개념이 기호의 자의성과 차이라는 주제에 의해 부름받았지만, 하나의 과학대상으로 결코 인정되어서는 안되고 또 될 수도 없는데, 그것이 현전의 형태로 환원될 수 없기 때문이다. <일반언어학강의>의 뒷부분에서 6장을 뒤흔드는 진보가 나타나는데, 그 진보에서 가장 엄격한 결과를 끌어낸 옐름슬레우의 대수학주의에 대해서도 우리는 같은 말을 할 수 있을까? 옐름슬레우는 형식 개념을 도입하고 실체와 구분했다. “언어는 하나의 형식이지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소쉬르), 언리소들은 정의상 비물질적(의미론적,심리적,논리적)이고 물질적인 실체와 독립적이다.” 언어 및 언어 유희의 기능작용 연구가 전제하는 것은 의미의 실체와 소리의 실체를 괄호 속에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옐름슬레우는 랑그의 도식 또는 유희의 개념을 소쉬르의 계보 속에, 그의 형식주의와 가치 이론 속에 위치시키고 있다. “언어의 도식은 결국 하나의 유희이지 그 이상이 아니다.” 옐름슬레우는 음성적 표현 실체로부터 실체들의 ‘파생’을 전제하는 것을 거부하면서, 이 문제를 엄밀하게 언어학적이고 구조적인 분석의 영역 밖으로 몰아낸다. 이런 언리학적 비판이 소쉬르 덕분에, 동시에 소쉬르에 반대해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 문자학의 고유한 공간이 <일반언어학강의>에 의해 열리면서 동시에 닫히고 있다는 것을 H. J. 울달은 괄목할만하게 표현하고 있다. “두 실체, 즉 공기의 유출과 잉크의 유출 가운데 하나가 이 언어 자체의 필수불가결한 부분이라면, 언어를 바꾸지 않고는 하나에서 다른 하나로 이동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이렇게 해서 코펜하겐학파는 연구 영역을 해방시키고, 표기 요소를 기술하는 수단들을 확보했을 뿐 아니라, 문학적 요소에의 접근, 즉 문학에서 형식의 유희를 일정한 표현 실체에 연결시키면서 절대적으로 표기적인 텍스트를 거쳐가는 것에의 접근을 지적해주었다. 문자학 속에 목소리, 에포스, 시로 환원되지 않는 무언가가 있다면, 우리는 형식의 유희와 표기적 표현실체 사이의 그 관계를 엄격하게 분리시킬 때만 그것을 간파할 수 있다. 문학에 대한 이와 같은 관심은 코펜하겐학파에서 실질적으로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것은 문학 에술에 대해 루소와 소쉬르가 나타낸 불신을 제거한다.
언리학은 이렇게 새롭고 풍부한 연구영역을 열어냈지만, 그러나 언리학은 에크리튀르의 통상적 개념을 가지고 작업한다. 이 에크리튀르는 우리가 여기서 이야기하는 원-에크리튀르와 관련해서 매우 종속적이고 파생적이다. 원에크리튀르는 표기적 표현형식 및 실체 뿐 아니라 비표기적 표현 및 실천에서도 작동한다. 이 주제에 대한 연구는 옐름슬레우의 체계틀 안에서 어떤 자리도 갖지 않는다. 왜냐하면 차연의 운동, 환원불가능한 원종합으로서의 원-에크리튀르는 단 하나의 동일한 가능성 속에 시간화, 타자와의 관계 그리고 언어활동을 가동시킴으로써 모든 언어체계의 조건인바, 언어체계 자체에 속할 수 없고 이 체계의 영역 속에 하나의 대상으로 위치될 수 없기 때문이다. 원에크리튀르의 개념은 체계 자체의 과학적 실증적 내재적 기술(description)을 전혀 풍요롭게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 만큼 언리학의 창설자는 아마 이 개념의 필요성에 이의를 제기했을 것이다. 언어 체계의 환원 불가능한 내재성으로부터 출발하지 않는 모든 언어학 외적 이론들을 거부하듯이 말이다. 그는 원-에크리튀르 개념 안에서 경험에의 호소 같은 것을 보았을 것이다. 그는 왜 에크리튀르라는 이름이 통상적 에크리튀르와 다르게 되는 그 X를 위해 계속 사용되는지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경험에 대해: 경험이란 개념은 형이상학의 역사에 속한다. 따라서 우리는 그것을 말소된 상태로만 사용할 수 있다. 경험은 현전과의 관계를 지칭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탈구축을 통해 경험이란 개념의 최후 토대에 도달하기 전에, 그 토대에 도달하기 위해, 그 개념의 자원을 다 파내야 할 것이다. 이것이 경험주의 및 경험에 대한 순진한 비판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조건이다.
옐름슬레우가 ‘이론은 경험으로부터 독립적이어야 한다’라고 말할 때의 그 경험은 경험 전체가 아니다. 언제나 그것은 사실 관련의 혹은 주변적인(역사적, 심리적, 생리학적, 사회학적 등) 경험에 해당하고 어떤 과학을 야기하지만 이 과학 자체가 주변적이고 언어학 밖에 있는 것이다. 원-에크리튀르로서의 경험과 같은 경우는 사정이 전혀 다르다. 경험의 부분적 지대들이나 자연적 경험의 총체성을 괄호에 넣음으로써 초월적 경험의 영역이 발견되어야 한다. 언어체계 자체의 초월적 기원의 문제를 제기하는 것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는 과학 만능주의적인 객관주의에 의해 위협받는다. 우리가 여기서 초월성에 의존하는 것은 순진한 객관주의에 빠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이다. 우리가 여기서 개념들의 말소라고 부르는 것은 앞으로 하게 될 이러한 고찰의 장소들을 나타내야 한다. 예컨대, 초월적 원형의 가치는 그것 자체가 말소되기 전에 그것의 필요성을 느끼게 해야 한다. 원흔적의 개념은 이러한 필요성과 말소의 요구에 응해야 한다. 사실 그것은 동일성의 논리에서 보면 모순적이고 받아들일 수 없다. 흔적은 단지 기원의 사라짐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흔적이 의미하는 것은 기원이 사라지지조차 않았다는 것이고, 기원이 비기원에 의해서만, 즉 흔적에 의해서만 역으로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후설: 그래서 우리는 초월적 경험에로의 현상학적 환원과 준거를 담론의 단순한 계기로 위치시켜야 한다. 현상학적 환원은 흔적의 환원운동에 참여하고, 살아있는 현재는 후설에게 귀결시키는 초월적 경험의 보편적이고 절대적 형태이다. 이는 초월적 현상학이 형이상학에 속함을 알려주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점은 단절의 힘들과 타협해야 한다. 후설이 실질적으로 기술하는 것과 같은 시원적 시간화가 타자 관계의 운동에서, 비현전화나 탈현전화는 현전화와 마찬가지로 시원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흔적에 대한 사상은 초월적 현상학과 단절될 수도 없을 뿐더러 그것으로 환원될 수도 없다.
원흔적. 여기서 차이의 드러남과 기능작용은 어떤 절대적 단순성도 선행하지 않는 시원적 종합을 전제한다. 따라서 이것이 시원적 흔적이 될 것이다. 시간 경험의 최소한 단위 속에서 일차적 과거 기억이 없이는, 다시 말해 타자를 동일한 모습 속에서 타자로 기억하는 흔적이 없이는 어떤 차이도 그 결과를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고 어떤 의미도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중요한 것은 구성된 차이가 아니라, 내용의 어떤 결정도 있기 전의 순수한 운동, 즉 차이를 생산하는 순수한 운동이다. (순수한) 흔적은 차연이다. 그것은 어떤 감각적 충문함에도 종속되지 않고 반대로 이 충만함의 조건이다. 비록 그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비록 그것이 모든 충만함 밖에 있는 현전적 존재자가 아니라고 할지라도 기호, 개념, 작용이라 일컬어지는 모든 것에 권리상 선행한다.
소쉬르가 청각 이미지와 객관적 소리를 구분할 때, 청각 이미지는 그저 소리가 드러내는 나타남의 구조이다. 청각 이미지는 귀로 들린 것이다. 그것은 들려진 소리가 아니라 소리의 들려진 존재이다. 이 현상학적 환원은 들려진 존재의 모든 분석에 필수불가결하다. 자취와 흔적의 특수한 지대 내에서, 이 세계 속에서도 아니고 다른 세계 속에서도 아닌 어떤 체험의 시간화 속에서 요소들 사이에 차이들이 나타나거나, 아니면 그보다 이 요소들을 생산하고 요소들을 요소들로 나타나게 하고, 흔적의 연쇄고리들과 체계들인 텍스트들을 구성한다. 이 연쇄고리들과 체계들은 그런 흔적이나 자취의 그물망 속에서만 윤곽이 그려질 수 있다. 나타나는 것과 나타남(즉 세계와 체험된 것) 사이의 놀라운 차이는 다른 모든 차이들, 다른 모든 흔적들의 조건이고, 그것이 이미 하나의 흔적이다. 흔적은 의미 일반의 절대적 기원이다. 이 점이 뜻하는 것은 의미 일반의 절대적 기원은 없다는 것이다. 흔적은 나타남과 의미작용을 열어주는 차연이다. (발제: 최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