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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주체의 해석학 세미나 후기 :: 1982년 2월 17일 강의 +3
뉴미 / 2017-07-03 / 조회 1,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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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세미나 <주체의 해석학> 늦은 후기 

때때로 책 제목은 그 내용보다도 더 많은 영감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책 제목이 ‘주체의 해석학’ 이라니…? 나는 단박에 매료되었고,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푸코 세미나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에 참여 신청을 했다. 그런데 어쩌다가 이렇게 ‘우리 실험자들’과 인연이 되었지? 푸코가 아니라 니체가 계기였다. 고병권 선생님의 니체 강연(벙커원 동영상 강좌)을 듣고 키워드 검색을 하다가 '우리 실험자들'을 찾게 된거다. 니체를 읽으면서 좋아하는 철학자 데리다-들뢰즈-레비나스 사이 접점을 만들어 봐야지 했는데, 엉뚱하게도 ‘주체의 해석학’ 에 시선이 가장 먼저 닿았다. 데리다-들뢰즈-레비나스 아직 어느 하나도 제대로 읽지 않았지만, (그런데 제대로 읽는다는게 당최 어떤건가욤…)(>.<) 푸코가 그들 사이를 관통하며 끼어들었고 금새 난 푸코의 마력에 빠져들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으나 그의 삶, 남겨진 텍스트들이 적잖은 울림을 주었고 지금껏 영향을 미치고 있다. 푸코의 매력을 알게한 <주체의 해석학>  함께한 푸코 세미나 모든 분들에게 고맙다~!    

 

내가 발제한 부분은 푸코의 1982년 2월 17일 강의...

발제한 날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났지만, 이후에도 발제문을 여러번 읽어보면서 그에 대한 생각을 다듬어 보려고 했다. 자기가 발제한 내용에 대해서는 (다른 내용에 비해) 충분히 숙고할 수 있다는게 발제의 장점이 아닐까... 그런데 이 말인즉 발제 때를 제외하면 내용에 충실하지 못했다는 얘기가 되는건가? 여하간 내가 느끼고 생각한 것, 내가 말 할 수 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봐야겠다. 아오~ 그런데 왜 이렇게 후기가 지루하게 써지는 걸까? 창문 밖으로 주룩주룩 장대비는 쏟아지는데… 

(글도 이렇게 ‘졸졸졸…’ 말고 장맛비처럼  ‘쭈룩쭈룩~~’ 시원하게 쏟아지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자기로의 회귀 - 자기로의 전향, 그게 뭐지? 

이 강의 전반에서 푸코는 ‘자기 배려’ 의 완결된 형식으로 ‘자기로의 전향’ 에 대해 말하고 있다. 완결된 형식?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고 자기로의 전향은 어떻게 하는걸까? 푸코는 고대의 문헌들 즉, 그리스어와 라틴어로 된 에픽테토스 어록,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명상록, 세네카의 저서와 서신을 읽었고,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 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이동과 회귀’, ‘항해의 은유’ 같은 일련의 표현들에 주목했다. 

 

덧붙이자면, 여기서 자기로의 전향 - 자기로의 회귀는 잃어버린 ‘기원’ 으로의 회귀를 뜻하는 것이 아니다. 비록 선천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회귀’는 고유한 ‘속성’의 출현을 전제하는 것이며, 그것으로 이동-항해하는 것을 뜻한다.  강의록 <자기 통치와 타자의 통치> 에서 푸코는 이렇게 말한다.

 

“인생의 시작부터 사물화되어 버린 오류・왜곡・악습・의존성의 심층부에 훈육이 가해진다. 그 결과 인간 존재가 여전히 머무르고 있을지도 모르는 젊음의 상태나 유년기의 어떤 단계로 되돌아가는 것이 관건이 아니라, 즉각적으로 결함 있는 교육 및 신앙 체계에 사로잡힌 인생 속에서 결코 나타날 기회가 없었던 ‘속성’을 참조하는 것이 관건이다. 자기 실천은 자기 자신 내에서 결코 나타날 기회가 없었던 속성과 자기 자신을 일치시키면서 자기를 해방하는 행위이다” 

 

또, 그는 “자신의 어린 시절마저도 뽑아 버리는 것이 자기 실천의 임무이다” 라고 쓰면서 스승-타자의 필요성을 이야기 한다. 

 

푸코는 생의 마지막 해인 1984년에 마지막 인터뷰에서 “고대 전반은 내게 ‘심각한 오류’ 였다고 생각된다” 고 했는데, 아마도 푸코가 보기에, 고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자기 배려의 '윤리’  점차 보편적 규범으로 부과되면서 엘리트 귀족 계층의 유행에서 그치는게 아니라 만인에게 의무적인 도덕으로 해석되기 시작한 것이 고대 전반의 ‘심각한 오류’이자 고대의 불운으로 여겨졌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의무적으로 부과된 윤리-도덕마저도 뽑아 버리는 것이 바로 푸코가 말하는 ‘자기 실천’ 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고대 그리스-로마 전반에 걸쳐서 이어진 자기 배려의 ‘심각한 오류’를 교정할 수 있다. 

 

스승-타자의 필요성에 관해서 내가 이해한 바를 적어 보자면, 스승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위계적 질서안에서의 스승이 아니라 어느 누구라도 (심지어 나를 불편하게 만들거나 나에게 치명적인 적일지라도) 나 자신에게 가르침과 깨달음을 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나와 관계하는 다른 사람' 즉 '타인' 혹은 '타자'로 이해된다. 스승이 타자이고(타자가 스승이고), 타자는 곧 (나의)세계가 되는 것이다. '주체의 해석학' 168쪽  stultitia 에 대한 내용을 다시한번 떠올려보자면,  "stultitia​ 로 부터 벗어나는 것은 혼자 힘으로 이루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의지를 집중시킬 수 있고, 자기를 자유롭고 절대적이고 항구적인 의지의 목표로 내놓을 수 있는 자기 구축은 타인의 매개를 통해서만 행해질 수 있다." 요컨대,  stultitia​ 상태를 벗어나게 하는 사람이 스승이고, 스승-타자를 통해서만 자기 구축, 자기 실천이 가능한 것이다.   

 

 

세계에 대한 앎의 해방적 효과, 세네카의 ‘굽어보는 시선’

흥미롭게도 ‘세네카’ 라는 인물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발제를 준비하는 동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애정을 품었던 모양이다. 대화중에 세네카에 대한 부정적 견해들이 나오면  변호하고 싶은 마음이 순간적으로 일어났다."덕있는 영혼은 우주 전체와 소통하며 우주의 모든 비밀을 탐험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는 영혼이다" 아니 무슨 이런 우주 꼰대 같은...? 그런데 나는 이 꼰대스러운 말들을 애정했다. 물론 우주, 영혼... 이것들이 이제는 기피할 단어가 되어버렸으며, 이런 말들이 흡사 "간절히 원하면 우주가 나서서 도와줄 것이다" 했던 (탄핵된) 대통령을 떠올리게 한다는걸 알고 있다. 이런식으로 세네카는 주구장창 우주 꼰대로서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인데, (어렸을 때도 젊었을 때도 그렇게 진지했을라나? 그건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런 세네카에 대해서 니체는, 내가 용인할 수 없는 자들 '세네카 - 덕의 투우사' 라고 그의 자서전에 언급하고 있다. 

 

니체는 또 '우상의 황혼' 서문에서 "지나치게 내면화되고 지나치게 심오해져버린 모든 정신이 했던 위대하고도 똑똑했던 일이 바로 싸움이었다" 고 적고 있다. 투우사는 숙명적 싸움을 직업으로 삼은 사람이고, 세네카는 '지나치게 심오해져버린 상태'로 숙명적인 싸움을 하는 '투우사'로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런식의 숙명론(니체는 '러시아적 숙명론'이라는 표현을 쓴다)적 싸움은 니체에게 용인될 수 없었을 터... 니체의 스타일(유머)을 좋아하지만, 잠깐 세네카를 변호하자면, 내가 발제를 준비하는 동안 이해했던 바로는, "우주 전체와 소통하며 우주의 모든 비밀을 탐험하는데 주의를 기울이는 영혼" 인 세네카, 그가 병에 걸려서 아프지 않고는, 호르몬의 이상 분비로 우울증에 걸리지 않고는 그처럼 심오한 얼굴로 "참으로 요즘은 생활이 재미없구나 - '주체의 해석학' 455쪽" 라고 말했을리가 없다. 사람이 병에 걸려 있다면, 아프면 만사가 다 귀찮을 수 있으니까 그럴 수 있지만...  신체가 건강하다면 우주를 탐험하기에도 바쁜데 심오하고 심심할(재미없을) 틈이 있을까? 우주 어디까지 가봤길래...? 혹시 우주끝까지 가봤다고 생각하는 걸까? 아마도 그건 아닐거다.


신체의 한계 혹은 호르몬 이상으로 더 이상 우주에 흥미를 느끼지 못한 세네카는 "굽어보는 큰 시선에 힘입어 삶과 죽음을 선택할 수 있다"는 평소 견해에 따라 죽음을 '선택'한 것으로 보여진다. 나는 어떤 이유에서라도 '자살' 만큼은 반대하는 입장이었지만, 요사이 생각이 변했고, 변하고 있다. 언젠가 들뢰즈의 자살에 대해서 온전히 이해할것만 같은 순간도 있었는데, 들뢰즈의 자살과 세네카의 자살을 비견할 수는 없겠지만, 이들의 선택에 대해서, 그리고 죽음에 임박한 상황(노년)에서 나의 대처 또는 준비 없이 맞닥들일 죽음에 대해서 충분히 숙고해 볼 여지가 생겼다. 


한편, 세네카의 직업은 지금으로 치자면, '컨설턴트' 라고 할 수도 있을텐데, 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직업(숙명)이 되어 버린 사람의 최후를 본 것 같아 씁쓸하다. 왜 그는 "참으로 요즘은 생활이 재미없구나" 라고 했을까? 이 말이 과연 우주 꼰대의 입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인가? 아마도 말과 실제로 드러난 그의 삶이 다르다는 것이 세네카를 비판하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굽어보는 큰 시선으로 자기를 인식하고, 자연을 인식하라고 말했던 세네카인데 어쩌다가 말과 삶이 어긋난 걸까... 원래부터 그는 말과 삶이 일치하지 않는 사람이었을까? 덕에 대해 말하는 것이 의무가 되다보니 정작 자신은 덕을 취할 수 없었던 걸까? 어떤 측면에서 그는 자기 인식-자연 인식에 지나치게 몰두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자기 배려하지 못한 사례로 제시될 수도 있다. 그런데 이 때 의문시 되는건 내가 감히 한 사람의 삶을 요약・평가하고 누군가에게 하나의 사례로서 제시할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세네카는 주지하다시피 충분히 자기 배려가 되는 사람이었고, 자기 자신을 가치있게 소진한 뒤 기력이 없는 상태로 죽음을 선택한 것일 수 있다. 노년이 되어, 특별히 죽음에 연연하지 않고, 살것인지 아닌지를 선택하는데 있어 그다지 큰 의미부여를 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노년의 지혜이며, 세계에 대한 앎의 해방적 효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주체와 해석학

 

 

to be continued… (여기에 계속)  

댓글목록

소리님의 댓글

소리

와~! 뉴미 님! 푸코 후기라니!! 크흑 감사
뉴미 님만이 쓸 수 있는 스타일의 후기네요. 푸코 세미나를 하면서 니체와 푸코를 연결해서 생각해보려는 뉴미 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제게 세네카는 여전히 신비주의 꼰대 할배의 형상으로 남아있는데...저 또한 좋아하는 니체가 그렇게 말했군요.
세네카가 말하는게 일상생활에서 지켜내기 어려워서 꼰대처럼 느껴졌는지도 모르겠어요. 물론 그러한 덕에 대한 세네카의 고귀할만큼 숭고한 태도가 니체의 무엇을 자극한 것일테지만요! 세미나를 하면서도 뉴미님의 세네카 애정은 느껴졌드랬죠 ㅋㅋㅋㅋ
그 뒤의 내용도 궁금해 지네요! 기다리고 있겠습니당ㅎㅎ좋은 후기 고마워요!!!(세미나에서 계속 보고 싶다 뉴미ㅠㅠ)

빈꽃병님의 댓글

빈꽃병

오.. 기다리던 뉴미님의 후기에요. ^^ 
이렇게 조목조목 성실하게 본인의 이야기까지 보태고 복원해서 이야기를 풀어놓다니.. !!!
전 <주체의 해석학> 언제 읽었었나 싶게 기억에서 까무룩.. 깜까미에요. ㅎㅎㅎ 후기 고맙게 잘 읽을게요~
'진실의 용기', '용기의 진실' 운운하며 <진실의 용기>도 흡사 동어반복-말장난으로 느껴지는 이 빈꽃병.
그래도 끝까지 콜레주드프랑스 완독 코스프레를 위해서 전 끼억끼억... 개같이 바닥을 기는 한이 있더래두.. ㅠ ㅋㅋㅋ
뉴미님, 다음책 <성의 역사>에서 볼 수 있으면 좋겠어요~ 무더운 여름 건강하게! 그럼 총총 ^^

삼월님의 댓글

삼월

'덕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 직업이 되어버린 사람의 최후'라니...
너무 와닿다 못해 마음에 박히게 되는 말들이예요.
'말하기'를 직업으로 삼는 사람들을 볼 때 가끔 그런 걸 느꼈거든요.
자기 말에 눌려 권태 속에서 목이 졸려가는 듯한 표정들을요.
보편적으로 강요되는 덕에 사로잡히지 말고, 스스로의 덕을 찾기 위해 타인의 존재를 필요로 하는 그런 우리가 될 수 있었으면 해요.
니체가 말한, 도덕에 사로잡히지 않는 '열대의 인간'들 처럼요.
마침 여름이네요. 덥고, 비가 내립니다. 열대의 우기처럼. 나만의 덕을 찾는 우리의 우기.
잘 읽었습니다. 고마워요, 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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