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캘리번과마녀> 2장 발제문 +1
준민
/ 2017-07-03
/ 조회 1,1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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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장 노동축적과 여성의 지위하락
“자본주의로의 이행” 개념은 대략 1450년부터 1650년까지의 시기를 정의하기 위해 1940-50년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서 “이행” 개념은 자본의 축적이 아직은 완전히 자본주의적이지는 않은 정치구조와 공존했던 사회들이 오래 지체되었다는 사고를 발전시키고, 점진적이면서 단선적인 역사적 발전을 암시한다. 그러나 실제 이 시기는 역사적으로 가장 유혈낭자하고 불연속적인 시대였다. 역사학자들은 철의 시대, 약탈의 시대, 채찍의 시대와 같은 험한 용어들로 이 시대를 묘사한다. 맑스의 시초축적 개념은 “봉건적 반동”을 자본주의 경제발전에 결부시킨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맑스는 시초축적을 산업임노동자 관점에서 분석했다. 시초축적은 유럽 농민으로부터 토지를 박탈하여 “자유로운” 노동자를 만들어 내는 문제였다. 또 맑스는 제국주의와 아동 노동을 언급했지만, 16-17세기에 일어난 “대마녀사냥”은 언급하지 않았다.
자본주의 축적과 유럽의 노동축적
자본주의의 초창기는 “신대륙” 노동력 착취, 재판농노제, 인클로저와 마녀사냥, 노예무역 등을 발전의 도구로 삼았다. 폭력은 경제적 힘이 되었다. 노동축적은 재화약탈과 인간착취 형태로 구성되었다. 노예제 또한 15세기 유럽에서 부활했다. 당시 동유럽을 제외한 유럽에서 노예제는 제한적 현상이었다. 농민저항이 농노제 부활을 저지했다. 권력자들은 반란세력에게 가차 없는 보복을 가했다. 독일 일부 지방을 비롯한 곳곳에서 관습권이 보존되었고, 심지어 영방정부의 형태도 유지되었다. 농민들을 진압할 수 없는 경우, 지배층은 토지 박탈과 임노동의 강제로써 대응했다. 임노동도 남성 성인 노동자들에게 제한적으로 시행되었다. 노예제와 농노제가 복원되지 않은 사실은 노동력 부족이 17세기까지 이어졌다는 것을 뜻한다. 노동착취가 노동인구 재생산을 위협하고 노동력 부족 현상이 악화된다. 이것은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극적으로 폭발했다. 노동,징벌,질병이 토착민 2/3를 죽음으로 내몰았다. 유럽에서는 나치를 제외하면 이런 노동착취는 없었다. 여성의 역사는 위와 같은 역사적 맥락 속에 자리매김해야한다. 왜냐면 자본주의는 노동력을 새로운 형태로 편성,분할하면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변화를 줬기 때문이다. 정책들은 여성을 공격했고, 새로운 가부장적 질서를 구성했다. 그것을 “임금 가부장제”라고 정의한다.
유럽의 토지사유화, 기근의 생산, 생산과 재생산의 분리
유럽의 토지사유화는 15세기 후반에 시작됐다. 거주자 추방, 지대 인상 등 다양한 형태를 취했다. 전쟁은 이 시기에 영토적, 경제적 배치를 바꾸기 위한 수단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원래 농민이었던 군인들은 16세기가 되면서 직업군으로 변모했다. 이것은 재력 있는 금융가들이 투자한 결과였다. 그때부터 전쟁은 기근, 전염병을 남기게 되었다. 교회 소유의 토지가 종교개혁 과정에서 몰수되었다. 그 분배에서도 노동자들은 배신당한다. 잉글랜드에서 토지사유화는 대개 인클로저를 통해서 진행됐다. 노동자들의 공동자산이 박탈당한 것이다. 인클로저는 공동 경작제 폐지를 의미한다. 또 공유지에 울타리를 치고, 가난한 농민들의 판잣집을 철거하는 것이다. “근대화론자들”은 인클로저가 농업효율성은 높였다고 주장한다. 농업 공동체주의가 비효율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옳지 않다. 농업의 상품화는 일반인들을 위한 식량공급을 늘리지는 못했다. 지금도 세계은행이 강요한 “수출 아니면 붕괴” 정책 때문에 영양실조가 만연하다. 또 공동 경작은 농가를 흉작으로부터 보호했다. 또 각 보유지가 손질하는 시기가 달랐으므로 손쉬운 경작 일정 관리가 가능했다. “공유지”도 그랬다. 공유지는 소농과 소작인의 재생산에 필수적이었다. 집단적 의사결정과 협업노동 모두 공유지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여성은 더욱 공유지에 의존했다. 토지를 박탈당한 노동자들은 임금에 대한 태도를 바꿨다. 중세에는 자유의 수단으로 보았지만, 토지를 상실한 이후로는 노예화의 도구로 인식했다. “부랑자”와 “주인 없는 자”가 증가하며 임노동을 하느니 사형당할 위험을 감수했다. 반인클로저 운동은 16-17세기에 계속되었다. 1만 6천명까지 모이는 대규모 봉기였으나, 정부군의 공격으로 분쇄되었다. 반인클로저 투쟁은 여성의 참여가 두드러졌다. 여성만으로 이루어진 저항운동도 있었다. 그 이유는 남편이 아내를 법적으로 대신하므로 이뤄졌다는 설명이 지배적이지만, 정부는 이 특권을 없애고 여성들을 체포하기 시작했다. 여성은 토지 상실과 마을공동체 해체로 인해 가장 큰 고통을 겪었다. 여성은 부랑자나 이주노동자가 되기 어려웠다. 남성의 폭력에 많이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활동은 재생산 노동에 점점 더 한정되었다. 생산과 재상산을 위한 활동들이 상이한 사회관계를 대변하고 성별로 차지가 생기게 된 것이다. 오직 시장을 위한 생산만을 가치창조 활동이라 정의했다. 따라서 노동인구 재생산은 무가치한 것이 되며, 노동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이것은 19세기 전업주부가 생기면서 정점에 달한다. 재생산 노동의 평가절하는 노동력 자체의 평가절하를 가져왔다. 그것은 남성노동자에게도 재앙이었다. 이런 전개를 보면 화폐 경제가 출현한 것이 중세 농노의 투쟁 목표가 실현된 것이라고 볼 수 없다. 토지사유화는 자본과 지주를 해방시켰다.
가격혁명과 유럽 노동계급의 빈민화
“가격혁명”은 아메리카에서 쏟아져 들어온 금과 은 때문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나 물가는 금, 은이 유통되기 전부터 상승했다. 물가는 직접 생산하는 음식을 돈을 지불하고 사먹어야 되고, 농산물을 매점매석했기 때문에 상승한 것이다. 물가상승은 소농을 몰락시켰다. 또한 가격혁명은 실질임금 하락현상을 촉발시켰다. 식료품 가격이 8배 뛸 때, 임금은 3배 올랐다. 당연히 구매력은 줄어들고, 농업에서건 공업에서건 임노동으로는 먹고 살 수 없었다. 14-15세기 프롤레타리아트 투쟁의 핵심은 “자유”와 노동량 감소였다. 그러나 16-17세기에는 굶주림이 주요 원인이 되었다. 투쟁은 빵가게나 곡물창고에 대한 습격, 곡물수출에 반대하는 폭동의 형태를 띠었다. 대체로 식량폭동은 여성들로 인해 일어났다. 그 이유는 그들이 가정을 책임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성은 돈이나 고용기회가 적어 더욱 싼 음식에 의존했다. 식량투쟁은 밀렵, 도둑질, 가택습격과 같은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습격하기 위해 불을 놓고, 투기꾼들의 집에 혈액을 뿌려놓기도 했다. 이는 유복한 이들이 끊임없이 전염과 반란의 공포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댓글목록
소리님의 댓글
소리
발제문 일찍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주 분량 조절 실패 크흑ㅠㅠ
이따 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