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민 선집 읽기] 첫 번째 세미나 발제문
희음
/ 2017-0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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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 선집 5 - 2017.07.04. 희음
종교로서의 자본주의
벤야민은 지금 여기에서 고찰할 수 있는 자본주의의 종교적 구조의 세 가지 특징을 다음과 같이 들었다(그 종교적 구조의 보다 광대하고 본격적인 측면은 ‘나중’에야 조망할 수 있겠다고 하면서-그 ‘나중’이란 혁명 혹은 파멸의 국면이 보다 가까워졌을 그날을 말하는 게 아닐까).
첫째, 제의종교로서의 측면. 그러나 교리도 신학이라고는 모르거나 갖고 있지 않은 자본주의. 둘째, 제의의 영원한 지속. 주일과 평일의 구분이 없어지는. 모든 날의 축제일화, 주일화. 셋째, 죄를 씻는 것(구원)이 아니라 죄를 지우는(덮어씌우는) 제의만을 갖는 자본주의. 그러므로 이것은 엄청난 추락의 과정 속에 있고, 죄를 보편화하며, 결국엔 신 자신조차 죄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속죄에 대한 관심을 갖도록 하는 것. 그러나 속죄는 간단하지 않다, 제의로도, 종교의 개혁으로도, 종교에 대한 거부로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종말까지 견디기, 신이 완전히 죄 짓는 순간, 세계 전체가 절망의 상태에 닿을 때까지 견디기, 그 절망을 희망하기가 자본주의라는 종교운동의 본질이라고 벤야민은 말하고 있다. 신은 죽지 않고 인간으로 편입됨으로써 그 초월성을 상실했다. 여기에서 니체는 자본주의라는 궤도를 뚫고 나가는 ‘초인’이라는 인간상을 창안했다. 자본주의의 넷째 특징은 그것의 신은 숨겨져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애덤스의 ‘보이지 않는 손’ 혹은 맑스 편에서 그것을 비틀어 인용하면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실’ 혹은 자본주의를 움직이는 메커니즘으로서의 초코드(들뢰즈) 개념이 이에 비견될 수 있지 않을까).
또한 벤야민은 프로이트가 이야기하는 무의식의 지옥 또한 자본주의의 ‘죄스러운 생각’(부채에서 비롯된 죄의식)으로부터 야기된 것이라고 하면서 프로이트를 자본주의의 지배적 성직자 대열에 합류시킨다.
니체가 말하는 초인은 회귀나 속죄, 정화 없이 오로지 파열적인 불연속적 상승만을 가지며, 하늘을 뚫고 자라난 역사적 인간이다. 신전으로 상징되는 하늘을 폭파해 버리는 초인의 이미지. 맑스 또한 자본주의의 비회귀적 측면을 강조한 바 있다. 죄(schuld, 채무)의 기능, 즉 채무는 이자를 낳고, 이 이자가 다시 이자를 낳는 끝없는 치달음으로 인해 자본주의는 사회주의가 된다는 가정.(수탈자가 수탈당한다! - 맑스[자본])
자본주의는 기독교에 기생하여(즉, 베버가 말한 것처럼 근검절약과 같은 종교(의 윤리)적 조건을 가지고) 발달하였지만, 종국에는 기독교의 역사가 자본주의의 역사가 되는 형태로 발전해 왔다고 벤야민은 말한다. 이 단편에서 그 준거로써 들 수 있는 지점은 교리와 구원과 제의 모두를 가졌던 종교 또한 종교개혁 이후로는 제의만을, 그것도 죄를 지우고 죄의식을 더욱 강화하는 것으로서의 제의만을 갖게 되었다는 언급이다(과연 그런가. 종교 안에 더 이상 교리란 없는가. 구원은 요원한가, 구원으로 향하는 길은 원천봉쇄되었거나 지워졌는가, 교회로 몰려든 자들은 속죄가 아닌 죄의 이자를 더욱 두둑히 안고 돌아가게 되는가, 우리 모두는 죄(걱정들-정신병들)로만 점철된 매일의 일요일을 살고 있는가).
신학적·정치적 단편
신의 왕국은 목표가 아니라 종말이라고 벤야민은 말한다. 역사적인 것 자체가 곧바로 메시아적인 것과 연결되지는 않으므로. 메시아는 그 스스로 자신의 사건, 자신의 왕국의 때를 정하고 완성시키므로. 그러므로 신정정치는 정치적 성격을 갖지 않는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이 이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저작이다.
에른스트 블로흐의 [유토피아의 정신] - 박설호의 [자연법과 유토피아] 참조
변화, 해방, 그리고 유토피아: 블로흐는 자아라는 협소한 영역으로부터 탈출하고, 부자유로부터 해방되어, 마침내 신을 섬기는 공동체로서의 묵시론적 공동체 내지는 유토피아로서의 자유의 나라로 향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자아의 해방을 통해 역사 전체가 전복되는 게 중요하다고 믿는다. 그에 의하면 역사란 “그리스도의 삶을 마지막으로 실천하는 오메가의 공동체”로 향해 나아가는 무엇이다.
자유의 나라, 묵시록, 그리고 마지막 장소로서의 고향: 책의 마지막 장에는 “카를 맑스, 죽음, 그리고 묵시록”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그는 맑스의 경제 이론을 높이 사며 그것이 완전한 국가를 낳기 위한 초석이 되었다고 말한다. 하지만 맑스의 무신론적이고도 현세 지향적인 입장 대신 그는 “자유의 나라”라는 진정한 형이상학적 이데올로기를 내세운다. 자유의 나라는 묵시록의 특성을 표방하고, 유토피아적 의미에서의 마지막 상태를 가리킨다. 역사 내지 과정으로서의 세계는 어떤 절대적인 전체성 속에서 자신의 메타 우주적인 경계선을 분명히 긋게 되리라고 그는 설파하고 있다.
세속적인 것의 질서는 신의 왕국에 대한 생각에서 구축될 수 없고, 그것은 다만 행복의 이념을 향해 있어야 한다고 말하면서, 벤야민은 세속적인 것의 질서와 메시아적인 것의 관계가 역사철학의 주요한 줄기가 된다고 강조한다. 또한 그것은 일종의 신비주의적 역사관이 된다고 말한다. 세속적인 것이 나아가는 힘(행복 추구)의 방향이 메시아적 집약성의 방향(몰락, 절멸)과 반대에 있다고 할 때, 그 원래의 힘은 오히려 그 반대의 방향 또한 강화시킬 수 있다고 하면서. 그러므로 세속적인 것이 처음부터 그 왕국의 범주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의 적확한 하나의 범주는 될 수 있다고 말하면서. 행복 속에서 (자신도 모르게) 몰락을 향해 치닫게 되는 것. 그리고 행복 속에서만 그 몰락을 발견하도록 예정되어 있다는 것. 종교적 원상복구(불멸)에는 속세적 원상복구(몰락)가 상응하며, 영원히, 총체적으로 사멸해 가는 속세적인 것의 리듬이 곧 행복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는 것이다.(나를 망치러 온 나의 구원자여! - 영화 [아가씨])
경험과 빈곤
아도르노가 ‘아우슈비츠 이후 서정시를 쓴다는 것은 야만’행위라 했던 그 맥락 위에서 벤야민은 경험의 빈곤을 이야기하는 듯하다. 아래 세대에게 이야기해 줄 경험이 사라진 것은 물론이고 경험이라는 것 자체의 빈곤까지 포함해서. 전략적 경험은 진지 전쟁에 의해, 경제적 경험은 인플레이션에 의해, 육체적 경험은 배고픔에 의해, 윤리적 경험은 권력자들에 의해 철저하게 허위였음이 입증된 것이다. 허위의 감각만을 입게 된 몸뚱아리, 아도르노의 말보다 어쩌면 실질적이고 감각적으로 말할 수 없는, 빈곤의 몸뚱아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런데 기술, 그리고 점성술과 과학의 지혜, 스콜라 철학 등으로 인해 더 큰, 새로운 빈곤이 사람들을 덮치게 되었다. 소위 이념에 의한 빈곤의 이면. 우리가 겪는 경험의 빈곤, 허위로서의 경험에 대한 자각은 이런 거대한 (이념적) 빈곤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런 이념과 세계관 등은 우리의 현실적 경험과 결코 연결될 수 없는 깊은 공허에 다름 아니므로. 경험의 헛깨비에 휘황찬란한 옷을 입히는 행위와도 같은 것이므로.)
벤야민은 이를 인류의 경험 전체가 빈곤해졌음을 뜻하는 ‘새로운 야만성’의 시작이라고 일컫는다. 그러면서 그는 이것을 판을 엎어버릴 수 있는 긍정적 계기로 바라본다. 경험의 빈곤은 그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데로 이끌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판을 엎은 자들에 대한 언급이 이어진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단 하나의 확실성만으로 자신의 철학을 시작한 데카르트, 뉴턴의 등식과 천문학의 경험 사이의 작은 불일치로 연구를 시작한 아인슈타인, 엔지니어로서의 파울 클레. 그들은 더러운 기저귀 위에 누운 동시대인에게 눈을 돌리기 위해 경직되고 고결한 과거의 인간상을 박차고 나온다(그들이야말로 역사 속의 숨은 초인들이 아닐까).
셰어바르트가 쓴 소설에 벤야민은 특히 관심을 기울인다. 소설은 망원경과 비행기와 로켓이 어떠한 형상의 신인류를 만들어낼 것인지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인물들은 새로운 언어로 대화한다. 그의 소설에서 가장 도드라지는, 즉 벤야민이 가장 주목하는 설정은 그 인물들이 유리로 된 집들에 투숙한다는 점이다. 유리로 된 것들은 아우라가 없고 비밀의 적이 되며 소유의 적이 된다. 그 위에는 어떤 흔적도 남길 수 없다. 은밀한, 한 개인만의, 지배적인 흔적을. 뒤이어 벤야민은 그의 말을 인용한다. “새로운 유리환경은 이제 인간을 완전히 바꿔놓을 것이다.”(판을 엎은 자들과 셰어바르트에 대한 벤야민의 지지와 찬미는 그의 묵시록적 해방의 정치 이념과도 맥락이 닿는 듯하다.)
‘경험의 빈곤’의 그들에 대해 그 역으로도 이야기할 수 있다고 벤야민은 말한다. 그들은 경험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모든 것을 삼켜 버렸고, 너무 배가 불러 지쳐 버리고 말았다고. 터질 것처럼 몸 안에 들어찬 피로감을 안고 그들은 잠과 꿈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그는 말한다.
벤야민은 말한다. 목전의 경제 위기, 전쟁 발발의 위험이라는 야만 앞에서 그들은 좋은 방식의 야만으로 맞서야만 할 것이라고. 새로운 것을 자신의 일로 만들고, 그 새로운 것을 통찰과 포기 위에 구축한 자들을 따라 그들은 오래, 문화보다 더 오래 살아남을 것이라고. 때론 야만적으로 웃으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