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0620 발제
단감
/ 2017-06-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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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 6. 20. 『그라마톨로지를 위하여』, 동문선
발제: 단감
제2장 언어학과 문자학
문자학이란 무엇인가? 문자학은 연구대상을 과학성의 뿌리로서 찾으러 가야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과학의 가능성에 대한 과학이 될 수도 있다. 그리고 이러한 질문은 문자에 관한 실증적.고전적 과학에 방해가 된다. 특히 문자학자는 대상의 본질을 기원의 문제로 탐구하게 된다. 그리고 이는 방대한 문헌적 자료에 비해 빈약한 철학적 비판으로 채워진다.
문자의 기원과 언어의 기원은 분리하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인문학 중 과학성의 모범으로 여겨지는 언어학이 문자학에 별다른 영향을 끼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그렇다면 언어학이 과학이 될 수 있었던 형이상학적 전제, 즉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관계에 대한 형이상학적 전제에 이미 문자학과의 단절이 내포되어 있던 것은 아닐까? 이것이 여기서 다루고자 하는 문제로, 이를 위해 소쉬르를 검토해보고자 한다.
언어학은 언어의 과학이 되고자 하며, 모든 인문학의 인식론적 모델이 되고 있다. 이 과학성은 음운론을 토대로 한다. 언어학은 궁극적으로 언어를 소리, 낱말, 로고스의 단위로 규정한다. 여기서 언어의 의미 작용과 행위의 토대가 되는 직접적 단위는 음성 속에서 소리와 의미의 분절된 단위이다. 이에 비해 문자는 파생적, 임의적, 외재적인 것으로, 음성적 기표의 중복 표현일 뿐이다.
그러나 이렇게 언어학을 과학으로 만들고자 하면 모순이 생겨난다. 문자가 태초에 말해진 충만한 언어에 예속된 도구가 되면서 문자학도 종속적 위치에 놓이는 동시에, 음운론적 언어학은 이 일반 문자학의 종속적이고 제한된 분야에 불과한 것이 되면서 문자학의 미래가 해방되기도 하는 것이다.
바깥쪽과 안쪽
소쉬르는 문자의 기능은 협소하고 파생적일 뿐이라고 말한다. 문자는 언어가 나타날 수 있는 여러 양태들 중 하나일 뿐이기 때문이다. 언어는 독립적인 구두상의 전통을 가지고 있고(근원적 제1기표), 문자는 주체에 현전하는 목소리에서 파생된 대리표상, 의미의 즉각적, 자연적, 직접적 의미작용의 대리표상이다. 영혼을 상징하는 목소리와 목소리가 낸 낱말을 상징하는 문자 낱말. 그리하여 소쉬르는 '언어와 문자는 전혀 다른 두 개의 기호 체계이며, 문자의 존재 이유는 오직 언어를 대리표상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표음 문자라는 일정 유형의 문자가 지닌 구조를 기술한 것, 혹은 반영한 것이다. 즉, 표음 문자라는 환경 속에서만 이러한 언어학(나아가 에피스테메 일반)이 성립할 수 있다.
표음 문자는 매우 중대한 것으로, 이것이 사실 우리의 모든 문화와 과학을 지배한다. 그러나 표음 문자는 절대적이고 보편적인 본질의 어떠한 필연성에 부응하지 않기에, 소쉬르는 언어학의 대상은 문자 낱말과 음성 낱말의 결합이 아니며, 오직 음성 낱말뿐이라고 말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말에서 언어학의 대상은 어떤 종류의 낱말이며, 문자 낱말과 음성 낱말이라는 원자적 단위의 관계는 무엇인지 밝혀내는 것이 문제라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낱말은 의미 및 소리의 단위, 개념과 목소리의 단위, 기의와 기표의 단위이다. 낱말을 생각과 소리의 분할할 수 없는 결합의 단위라고 설명하는 순간,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관계도 자동적으로 도출된다. 문자는 ‘표음적'이고, 바깥쪽이며, ‘생각-소리'라는 음성언어의 외적 대리표상이다. 또한 그것은 필연적으로 이미 구성된 의미 작용 단위를 반영할 뿐, 이 단위의 형성에는 전혀 관련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언어학에서 낱말의 특권을 박탈하면 문자를 천시하는 경향이 약화될까? 그렇지 않다. 마르티네는 언어학이 낱말에 주목하게 된 것은 오히려 문자 텍스트의 시각적, 구조적 영향 때문이며, 구두 언술에 주목하여 언어의 실제적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태소 단위까지 밀고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물론 이러한 경계도 표음 문자에만 한정된 분석이다. 소쉬르는 일단 문자 체계를 상형/표의 문자와 표음 문자로 분류했는데, 둘 다 구어를 대리표상하는 체계인 것은 마찬가지이나, 전자는 종합적이고 포괄적으로 낱말들을 나타내고, 후자는 낱말의 소리 요소들을 음성적으로 나타내는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이러한 경계 설정은 결국 기호의 자의성에 근거한 것이다. 그러나 문자가 '기호들의 체계'이기 때문에 의미를 직접 상징/형상하지 않는다면, 그림 문자나 표의 문자는 소쉬르의 이론과 모순되며, 일반 언어학이 형이상학에서 물려받은 개념 일체를 단념해야 할 수도 있다. 이 개념들도 자의성을 기반으로 한 것으로 자연적 질서와 사회적 법칙 및 기술의 대립을 통해 궁극적으로 역사성을 파생시킨다.
또한 소쉬르는 음성체계, 그 중에서도 알파벳으로 한정한다는 경계선을 확립한다. 이렇게 실제 언어학이 과학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언어학 영역에 엄격한 경계선이 있어야 하고, 내적 필연성에 의해 조정되는 체계여야 하며, 어떤 식으로든 그것의 구조가 닫혀야 한다. 문자가 대리표상이라는 명제는 이렇게 외적/내적, 이미지/실재, 대리표상/현전이라는 닫힌 체계를 만드는 데 정확히 부합한다. 소쉬르는 편의상 표음 문자로 경계를 설정했지만 이는 '내적 체계'의 과학적 요구에 부합하지 못한다. 이 체계는 표음 문자의 잠재적 성격과 '표기'가 외재하는 사실을 인식론적으로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문자언어에 도구로서의 외재성이 있다는 것은 소쉬르도 인식하고 있었고, 그것이 내적 체계의 순수한 개념에 끼치는 영향을 매우 심각하고 해로우며 영속적인 오염으로써 경계했다.
앞서 살펴 본 역사-형이상학적 전제에 따르면, 처음에 시원적 의미와 이를 나타내는 의미들의 자연적 관계가 있다. 이것이 바로 의미에서 소리로 넘어가는 관계로, 소쉬르는 이를 ‘자연적 관계, 곧 소리의 관계' 라고 말하며, 문자언어(이른바 시각적 이미지)가 음성언어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근거로 삼았다. 그러나 이 '자연적 관계'가 문자언어의 원죄에 의해 전복/변질되었으니, 언어과학은 음성언어와 문자언어 즉 안과 겉 사이의 단순하고 시원적인 관계를 되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문자의 요망하게도 '용이함'과 '영속성'으로 생각-소리의 순수한 연결을 변형시켜 피상적이고 인위적인 문자표현을 만들어낸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인위적'이고 '기만적'인 것인가? 이것이 언어의 '자연적 본질'이 아닐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나 소쉬르는 대리표상이 음성(+의미)과 뒤섞여 사람들이 문자로 쓰듯 말하게 되고 마치 음성이 문자의 그림자나 반영에 불과한 것으로 생각하는 지경이 되어 결국 기원은 사라지고 이미지의 자기도취적 상호반사만이 무한히 반복된다고 경고한다. 정말로 기원이 사라지는 것일까? 반영물의 자기반영은 똑같은 것이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 기원에서 출발하여 서로 다른 반영이 늘어가는 것이다. 그러나 문자를 매개이자, 로고스가 자신의 벗어난 현상으로 보는 소쉬르는 문자로 인해 로고스가 자연적, 근원적, 즉각적으로 영혼에 현전하지 못하고 망각되고 은폐된다고 말한다.
따라서 문자의 중요성에 주목하는 문학 작가나 문법학자는 상상력, 감성, 정열, 시각적인 것에 굴복하여 문자의 함정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비판했다. 이 횡포는 심층에서 벌어지는 영혼에 대한 육체의 지배이며, 정열은 수동성이자 영혼의 병이다. 도덕적 타락은 병리적이다. 자연적인 관계의 전복은 글자-이미지에 대한 타락한 숭배를 낳았다. 그래서 소쉬르는 언어의 자연적인 생명력뿐 아니라 문자의 자연적 습관들을 구제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서는 일반적 표음 문자 내에 과학적 요구나 명확성의 취향을 도입하지 않도록 공통의 철자법을 고수하고 판별용 보조 기호를 증가시키지 말아야 한다.
이러한 소쉬르의 논의는 소쉬르의 전제 안에서 타당하다. 따라서 우리는 자명한 것으로 이미 전제되어 있는 것을 밝혀 그것의 한계를 밝혀야 한다. 첫 번째는 언어 일반의 내적 체계를 밝히면서 왜 표음 문자라는 특정한 문자체계를 외재성 '일반'으로서 배제하면서 자기 영역의 경계를 설정했는가이다. 그리하여 표음 문자는 구어 체계에 외재적인 것이라고 상정되었다. 이 단절과 추방으로 인해 '침입과 훼손'이 발생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음성언어야말로 문자언어라는 타자를 바깥과 아래쪽으로 내던짐으로써만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폭력적인 언어이다. 더구나 표음 문자는 존재하지 않는다. 수학적 기호, 구두법, 공간화 등, 음성언어와 대응관계를 맺고 있지 않는 문자언어 역시 엄연히 문자언어의 체계를 이루고 있다. 구어 체계를 표음 문자에 대질시키는 것은 비(非)표음적인 것의 침투를 모두 도정 상의 일시적 위기나 우발적 일로 해석하도록 이끌어가며, 이러한 목적론은 서구적 민족 중심주의, 수학 이전의 모방주의, 형식주의 이전의 직관주의로 간주할 수 있다. 소쉬르는 비직관을 로고스의 위기로 규정한다. 물론 이때의 위기는 목적론적 전제 하에서만 위기이며, 후설에 따르면 이 위기는 진리의 운동에 연결되어 관념적 객관성의 생산(문자언어 필요)으로 이어진다.
문자의 견고한 영속성으로 인한 구어와의 유리 문제는 어떤가? 구어의 고정성을 통한 언어적 전통은 우월한 것으로 여기지 않았는가? 또 모체 언어가 외부로부터 절대 영향을 받지 않고 완전히 자연적이고 자폐적인 방식으로 역사를 창출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문자언어에 대항해 언어를 보호하기 위해 정지시켜야 할 것은 바로 역사이다.
이렇게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의 관계에서 고정성.영속성.지속성의 개념은 매우 엉성하며 무비판적으로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언어학이 일정한 언어학적 모델들에 입각하여 자신의 안과 바깥을 규정하는 한, 그리고 그것이 본질과 사실을 엄격하게 구분하지 않는 한 일반적이 될 수 없다. 로고스 중심주의, 충만한 음성언어의 시대는 본질적인 여러 이유로 인해 한편으로 문자언어의 기원과 위상에 대한 모든 자유로운 사색을, 다른 한편으로 기술공학과 어떤 기술의 역사가 아닌 모든 문자과학을 괄호 속에 집어넣었고, 정지시켰고, 억압했다. 그러나 문자언어를 명시적으로 다루지 않는 바로 그 순간에 소쉬르는 일반 문자학의 장을 열고 있다. 이 일반 문자학은 더 이상 일반 언어학으로부터 배제되지 않을 뿐 아니라 그것을 지배하고 자신 안에 포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