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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9장 배치 발제
준민 / 2017-06-21 / 조회 9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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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장 배치란 무엇인가?

들뢰즈가 해제하는 카프카의 세 편의 장편소설(아메리카, 성, 소송)은 배치의 대상이 된다. 배치는 두 측면을 가지고 있다.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 욕망의 기계적 배치가 그것이다. 기계적이라고 하는 의미는 기술적이라는 것만은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사회적인 것이다. 인간은 노동할 때뿐만 아니라 휴식할 때, 사랑할 때, 저항할 때 등에도 기계의 일부다. 예를 들어 사법적 기계는 사무실, 책 등은 물론 그것의 인물, 불특정한 질료를 제공하는 피고 등 그 모든 것이다. 사무실의 타자기는 행정적, 정치적, 사회적 및 에로틱한 분배와 더불어서만 존재한다. 이러한 것들 없이는 ‘기술적인’ 기계는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기계는 욕망이다. 기술적 기계가 ‘기계적’이라고 불릴만한 유일한 경우는 욕망의 기계적 배치가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이기도 할 때이다. 언표는 언제나 기계의 일부를 이룬다. 언표는 항상 법적이고, 정확하게 규칙을 따른다. 요구나 반항이든 혹은 복종이든, 언표는 배치를 분해한다. 언표는 그 자체로 기계의 부품이다. 이 부품이 이번에는 기계를 이루어 전체를 작동하거나, 고치거나, 요동치게 만든다. 세 편의 장편소설에서 k는 기계의 톱니바퀴를 따르는 기사 내지 기계공이고, 배치의 언표들을 따르는 법률가고 소송 당사자다. 욕망의 사회적 배치가 아닌 기계적 배치는 없으며, 언표행위의 집합적 배치가 아닌 욕망의 사회적 배치는 없다. 기계, 언표 및 욕망이 하나의 동일한 배치의 일부이고, 이것이 장편 소설에 동력과 대상을 무제한으로 제공한다. 

그의 문학은 과거가 아니라 장래에 관한 여행이다. 그에겐 두 가지 문제가 있다. 1) 언제 우리는 하나의 언표가 새롭다고 말할 수 있는가? <만리장성의 축조>에서 한 거지가 어느 지방 봉기자들의 유인물을 가져오지만 그것은 옛날부터 들어온 케케묵은 소리 취급을 받는다. 2) 언제 우리는 하나의 배치가 나타났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이미 문을 두드리고 있는 장래의 악마적인 세력들이다. 이것들은 그 자체로 욕망, 기계, 언표인 새로운 배치의 소문, 낡은 배치 속으로 침투하거나 그것과 절연하는 새로운 배치의 소문이다.

언표는 결코 주체로 소급되지 않는다. 언표는 이중체로, 두 주체로 소급되지 않는다. 언표를 방출하는 주체는 없으며, 언표가 방출되는 주체도 없다. 그것은 오직 국민적, 정치적, 사회적 공동체의 기능에 의해서 방출된다. 그로부터 카프카의 두 가지 테제가 나온다. 앞서가는 시계로서의 문학. 민중의 문제로서의 문학. 가장 개인적인 언표행위조차 집합적 언표행위의 특별한 경우일 뿐이다. 언표는 언표행위의 집합적 조건을 앞서가는 ‘독신자’에 의해 ‘채택될’ 때 비로소 문학적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독신자도, 집합체도 주체가 아니며 집합적 배치의 부품일 뿐이다. 언표란 특정한 배치의 톱니바퀴로서만 존재한다. 단편소설에서 모든 주체의 자리는 이미 배치다. 하지만 그것들은 초험적 주체의 형태를 견지하고 있는 초월적이고 사물화된 기계, 주체의 문제를 이미 억압하지만 배치의 지표 역할을 할 뿐인 동물-되기, 동물을 정확한 지표로 삼지만 이미 집합적 주체로서 기능하는 양상의 분자적 집합-화였다.(?) 반대로 장편소설에서 k는 주체가 아니라 스스로 증식하는 일반적 기능이며, 끊임없이 선분화되지만 또한 끊임없이 모든 선분 위로 흘러가는 존재이다. 여기서 일반적이라는 것은 고독한 개체조차 통과하는 계열들의 모든 항들에 접속되는 일반적 기능을 갖게 된다는 뜻이다.

욕망에 배치 안에서 언표행위의 ‘법적’ 측면은 사물 자체의 ‘기계적’ 측면보다 앞서 가고 있다. 그것은 형식에 대한 존중 때문일 것이다. 세 편의 장편소설에서 k가 갖고 있는 특별한 존중은 어떠한 복종도 보여 주지 않지만, 규칙에 따른 언표행위에 대한 요구와 그것의 필연성을 보여 주고 있다. 소송이나 성에서 각각의 계열 안에서 하나의 언표행위를 발견할 수 있다. 성의 1장에서 농부나 교사 등의 구절이나 동작은 언표를 형성하진 않지만, 접속구로서 역할을 수행하는 언표행위다. 즉 표현이 내용에 선행한다. 이러한 우위는 어떠한 ‘관념론’도 함축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표현이나 언표행위는 배치에 의해 엄격하게 규정되는 만큼 내용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배치는 선분적이고, 여러 인접한 선분 위로 자신을 확장하거나 배치를 이루는 선분들로 분할된다.  이러한 선분들은 권력인 동시에 영토이다. 욕망을 포획하고 고정시키고, 영토화한다. 우리는 선분-블록이 재영토화의 구현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배치는 그런 만큼 탈영토화의 첨점들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즉 초월적 법에 반하는 사법의 내재적 장, 블록들의 선분성에 반하는 탈주의 연속적 선, 두 개의 탈영토화의 거대한 첨점이다. 우리는 구체적인 기계적 배치에 추상적 기계를 대립시켰다. 추상적 기계는 무제한한 내재성의 장 안에서 그려지는 현실적인 배치와 대립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관계는 전도되어야 한다. 추상이란 의미에서 그것은 무제한한 내재성의 장으로 나아가며, 욕망의 과정이나 운동 속에서 그것과 구별되지 않게 된다. 하지만 추상적 기계야말로 배치가 자신의 선분들을 해체하고, 탈영토화의 첨점을 밀어붙이며, 탈주선을 흐르게 하고 내재성의 장을 채우는 역량에 따라 각 배치의 현실성과 실존 양식의 밀도를 측정하는 것이다. 강렬도가 생산되는 것, 모든 접속과 다의성이 새겨지는 곳도 그 곳이다. 

배치의 밀도와 양태를 판단하기 위해 여러 가지 기준을 사용할 것이다. 1) 이런저런 배치가 '초월적 법'이란 메커니즘 없이 지탱될 수 있는 것은 대체 어느 정도일까? 그것 없이 지탱될 수 없으면 없을수록, 그것은 덜 현실적인 배치가 될 것이다. 2) 각각의 배치에 고유한 선분성의 본성은 무엇인가? 선분들이 더 경직되거나 더 느릴수록, 배치는 자신의 연속적인 선 내지 탈영토화의 첨점들을 따라 탈주하기가 더 어렵다. 이 경우 배치는 지표로서만 기능한다. 배치가 표시하는 출구가 어떤 것이든, 그것은 실패할 운명이며, 이전의 메커니즘에 다시 사로잡힌다. 3) 선분성의 본성이나 선분화의 속도를 고려할 때, 배치가 자신의 고유한 선분을 넘어설 능력은? 내재성의 장으로 흘러드는 대신, 그것이 내재성의 장을 선분화하는 것이다. 소송의 허위적 종결은 전형적인 재삼각형화를 작동시키기조차 한다. 이러한 종결과는 별개로 소송이나 성의 배치가 보여주는 능력은 무엇인가? 그것은 배치 안에서만 실현될 수 있는 추상적 기계가 아니라, 추상적 기계를 향해 나아가는 배치인 것이다. 4) 자신을 욕망의 내재적 장으로서 이러한 추상적 기계로 만드는 것과 관련해서 문학적 기계의 능력, 언표행위 및 표현의 배치의 능력은 어떠한가? 이와 관련해서 소수적인 문학의 조건은 또 어떠한가? 이 네 가지 기준을 이용하여 그때마다 모든 강렬도를 산출하는 것이 K의 기능이다. 이것이 바로 그의 연속적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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