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8장 블록, 계열, 강렬도 후기 +1
자연
/ 2017-06-26
/ 조회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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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의 글을 읽으면서 느끼는 감정들은 저마다 조금씩 다른 것 같습니다. 저는 그의 작품이 고독과 불안, 소외 같은 얘기로 꽉 차서 아주 우울한 얘기로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 책읽기를 통해 '카프카적인'이란 단어의 의미를 새롭게 이해하게 되더라구요. [성]과 [소송]을 혼자서 읽다가 자연스레 웃음이 나오는 대목에서 '이건 뭐지'라고 의아해 했었는데, 그게 바로 카프카 특유의 농담이라는 걸 알게 된 거지요. 그래서 이제까지 그의 작품에 관한 많은 글들에서 말하는 '부조리하고 암울한'이라는 편견에 빠져 그의 특유의 농담을 놓친 건 아니었을까란 생각도 했습니다.
이번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란 책을 읽으면서 드는 생각도 카프카의 작품은 일정한 한계 내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면들이 있다는 것이고, 그러기 때문에 읽는 사람 수 만큼이나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고 얘기하는 것 같아요. 정작 카프카 자신은 자신이 쓴 글의 비유를 풀어서 설명하질 않았다고 하는데 말이죠.....쉽지 않은 들뢰즈의 글이었지만 마지막 세미나까지 마치고 나니 뿌듯합니다. 8장, 9장에서는 들뢰즈 철학의 주요한 개념인 블록, 계열, 강렬도, 배치의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책의 내용을 넘나드는 토론으로 가벼움과 유쾌함으로 세미나는 즐거웠습니다. 못 다한 얘기가 많아서 아쉬운 것들이 있다면 이어지는 들뢰즈, 카프카 공부하면서 더,더,더 해 보아요.
들뢰즈가 카프카의 작품에 대한 해석을 설명할 재간이 없어서 8장 발제문을 요약해서 올립니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인접된 것과 연속된 것에 대해 말했던 것들이 불연속적인 블록의 역할과 중요성으로 인해 반박되거나 약화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블록의 테마는 카프카의 작품에서 항상 나타나는 것이고, 극복할 수 없는 불연속성이라는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의 단편소설에서 불연속성은 동일한 편에 서 있다. 권력이 초월적인 권위나 전제 군주의 편집증적 법으로 나타날 때, 둘 사이에 공백이 끼여 있는 블록들의 불연속적인 분할이 부여된다.
카프카는 알려지지 않은 초월적 법 주변을 도는 불연속적 블록들 내지 거리를 둔 파편들이라는 원칙을 포기하지 않는다. 여기에다 장편 소설의 발견에 어울릴만한 또 다른 본성, 제국의 초월적 법이 사실은 사법의 내재적 배치로 소급된다는 것이다. <소송>에서 외견상의 무죄 방면이 무제한 延期(연기)에 자리를 내주게 되며, 사회적 장에서 의무의 초월성이 모든 장을 가로지르는 유목적 욕망의 내재성에 자리를 내주게 된다. 카프카는 더 이상 무한-한계-불연속을 통해 진행하지 않고, 유한-인접-무제한을 통해 진행한다. [장편소설의] 미완성은 더 이상 파편적인 것이 아니라 무제한적인 것이다.
카프카는 블록을 포기하지 않았다. 모든 블록은 서로 인접한 뒷문을 가지고 있다. 정반대로 대립되는 두 점이 기묘하게도 접촉하고 있는 것이다. <소송>에서 K의 은행 사무실에 근접한 골방의 문을 열면 두 명의 감시인을 처벌하고 있는 사법적 공간이 있으며, 화가 티토렐리의 방안 깊숙이 있는 문도 동일한 사법적 장소로 통하고 있다. 아메리카>에서 [폴룬더의] 별장이, 탑 주위에 작은 집들이 모여 있는<성>[의 마을] 역시 그렇다. 무제한히 연속되는 선 위의 두 블록이 서로 아주 멀리 떨어진 문을 가지고 있지만, 그만큼 그것을 인접한 것으로 만드는 인접한 뒷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카프카에게 있어서 두 가지 건축적인 상태는 블록이다.(173 쪽 그림, 174 쪽 표 참고)
따라서 기능하는 두 가지 건축적 군은 무한―제한―불연속―가깝고 떨어짐, 다른 한편으로는 무제한―연속―유한―멀고 인접함으로 나누어진다. 그런데 어느 경우든 카프카는 블록에 의해 진행한다. ‘블록’은 일기에서 끊임없이 나타난다. 들뢰즈는 카프카의 작품 자체를 관통하여 블록이 그 본성과 기능을 변화시킨다고 믿는데, 그것은 점점 더 간결하고 정련된 것을 향해 나아간다. 1) 호―블록 2) 선분-블록 3) 계열―블록 4) 강렬도의 블록 5) 유아기의 블록으로.
유아기의 블록은 현실일 뿐만 아니라 방법이자 규율이다. 이는 끊임없이 시간 속에서 치환되며, 어른 내부에 아이들을 주입하기도 하고 진짜 아이들에게 가상된 어른을 주입하기도 한다. 그러데 이러한 이전(移轉)은 카프카 및 그의 작품에 아주 기묘한 매너리즘을 산출한다. 이는 추억 없는 간결성의 매너리즘으로, 거기서 어른은 어른이기를 멈추지 않은 채 유아기의 블록 속에서 포착된다. 마치 어린이들이 어린이이기를 멈추지 않은 채 어른의 블록 속에서 포착되는 것처럼. 어른의 어린이-되기는 어른 안에서 이루어지고, 어린이의 어른-되기는 어린이 안에서 이루어지며, 이 양자는 두 개의 인접항인 것이다. 카프카에게서 또 다른 매너리즘인 사교계적인(예절의) 매너리즘을 말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매너리즘은 서로 대립적이면서도 상보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다. 예절의 매너리즘은 인접한 것을 멀게 하는 경향이, 어린이의 매너리즘은 그 반대의 경향, 작용을 갖는다. 하지만 이 두 가지 매너리즘의 극(極)을 통해서 카프카의 분열증적 익살이 구성된다.
정신분열자는 두 가지 매너리즘에 대해 잘 알고 있는데, 이는 그것이 사회적 좌표에 맞추어진 탈영토화하는 그들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카프카는 자신의 작품과 삶에서 이를 잘 이용했다. 이는 꼭두각시의 기계적 예술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댓글목록
주호님의 댓글
주호
저 역시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를 끝내고 나니 뿌듯함이 무진장 밀려옵니다. 할 때는 좀 버겁고 힘들었지만요.
카프카 세미나 첫 텍스트가 '성'이었고 그때 제가 발제에서 카프카의 소설을 차라리 희극적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어요.
카프카를 읽지 않은 사람들이나 읽었어도 한 두편 쯤 가볍게 읽은 분들은 그의 소설이 어둡고, 음침하고, 불안하다고 말하지만 사실 그것 첫느낌이고... 계속 반복해서 읽다보면 정말 피식피식 웃음이 터지는 부분이 있어요. 그걸 자연 님도 느끼신 것 같네요.
7월에 새롭게 시작하는 카프카 단편읽기 세미나에서 자연님의 얼굴을 뵐 수 있기를 바라며... 후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