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 존재론적 우편적 마지막 후기
김혜원
/ 2017-06-13
/ 조회 994
관련링크
본문
아즈마 히로키 마지막 후기
드디어 첫 여정지를 빠져나왔습니다. 시원한 기분을 즐기다 토론의 전반부를 놓치고 말았습니다. 주위에 SOS를 쳤으나 기억에 남기고 계신 분들이 없으셔서 죄송한 마음으로 후반부만 정리합니다.
중반부의 가장 큰 화두는 ‘어떤 실천을 해야 할 것인가’였습니다. 회음님께서 이를 위해 데리다가 펼치는 탈구축의 이론보다는 그가 행한 전이절단의 실천적 행동들이 더 큰 도움을 주었다는 경험을 공유하시면서, 이론과 현실의 접목, 즉 실천의 문제를 생각하는 장으로 논의가 이어졌습니다. 실천=윤리라 볼 수 있다면, 결국 선악의 속성 및 판단근거를 얼마만큼 초월론적 시선에서 볼 것인가, 그리고 다시 어떤 컨텍스트로 내려올 수 있는가가 실천의 차원이 될 터인즉. 선악의 단순한 전도도 문제적이지만, 선악가치구별이 없는-가치평가가 온전히 개별적인 문제로 존재하는-상태에서도 다시 어떤 실천이 요구되기 마련인 관계로, 즉 기존의 장을 탈구축한 뒤에도 다시 어떤 장이 필요해지는 것이므로, 결국 초월론적인 것은 (현실로) 다시 내려와야 초월론이 완결되는 것이 아니겠는가하는 논의가 중점을 이루었습니다.
더불어 데리다 윤리의 중요한 축을 이루는 애도, 즉 레비나스적인 절대적 환대는 인간이라는 제한적 존재에게 얼마만큼의 실천력을 허용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었습니다. 그 환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 데리다에게 윤리인 것인데 이는 불가능한 것에의 접근이라는 점. 모스의 선물론/레비스트로스의 교환론에서 데리다가 옳다고 손을 들어주는 쪽은 레비스트로스라는 것. 그러나 바로 그 불가능하다는 이유로 우리는 다른 길을 찾게 되고, 그러한 모색을 통해 타협점을 열어가게 되므로 이 불가능한 것이 윤리적 드라이브로 기능할 수 있게 된다는 점. 그리고 그러한 윤리적 실천을 가시적으로 드러내주는 실제의 사례들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상 데리다의 핵심개념과 연계되는 여러 문제의식들이 제기되었는데, 어떤 문제의식들이 가능한지는 차후 데리다를 읽으며 명확히 정리해가기로 하였습니다.
마지막 논의는 데리다/들뢰즈 비교분석이 주를 이루었습니다. 포문은 ‘데리다의 탈구축/구축의 과정은 단독성의 통로 같은 것으로 들뢰즈의 영토성/탈영토성, 강도제로라는 형이상학적 평면, 독단성과 관련이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열렸습니다. 들뢰즈가 아르또를 빌어 언어이전의 지평을 개념화/구축할 때는 개념화 분할 이전에 대한 것일 터이고, 전일자라는 상태를 말할 때 그의 평면전체는 너무나 빠른 속도로 잡히므로 (데리다의 탈구축 개념과는 대조하기가 어렵지 않나)라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괄호부분 제가 덧붙였는데 틀릴 수도...ㅜ
이후 나머지 논의는 최원 선생님의 몫으로 넘겨져 마무리되었습니다. 데리다와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신/실체처럼) 전체를 열려있는 시스템으로 전제하면서 자괴하는 괴리의 지점-내재성, 초월성으로 연결되는-에 주목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갖는 듯싶으며, 같은 의미에서 비슷한 시기에 활동했던 프랑스철학자들-들뢰즈, 데리다, 라캉, 알튀세르 등-을 비교연구하며 서로 수렴/발산하는 경향을 살펴보는 것도 흥미로운 작업일 수 있겠다는 말씀이셨습니다. 들뢰즈의 경우 경험주의적으로 초월주의를 이끌어낸다는 점이 (에크리튀르라는 전이transference에서 초월적trans 운동을 읽는) 데리다와 다른 전개를 보이는 것인데, 최 선생님의 혐경험주의(?)에 대한 집단적 관심 덕분에 경험주의사조를 크게 한번 흩어보는 계기를 가졌습니다. 지각작용에 근거하여 물질적인 것으로부터 정신적인 것을 사고/규정하는, 유물론인 듯 비유물론적인 방식에 대한 문제성은 이미 맑스에서 밝혀지며 같은 맥락에서 회의주의/불가지론에 빠질 수밖에 없는 경험주의를 경계하신다는 결론이었습니다.
아즈마의 논의를 쫓아가며 데리다에게 얼마만큼 다가갔는지는 다음 세미나에서의 본격적인 데리다독해를 통과하며 확인할 수 있겠지요. 기대됩니다!!!
아즈마씨, 고마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