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발제---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7장
걷는이
/ 2017-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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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프카 :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
2017. 06. 14 걷는이
7. 접속구들
특별한 항들은 한 계열의 끝 또는 앞부분에 자리를 잡고 계열들이 연쇄, 변환, 증식되는 방식을 표시한다. 이 특별한 계열은 접속구의 역할을 하는 두드러진 항으로 만들어지는데, 그것은 내재성의 장 속에서 욕망의 접속을 증가시킨다. 카프카에게서 강박적으로 나타나는 젊은 여인들의 유형이 그것이다. 이 각각의 여인은 여러 선분이 연결되는 지점에 있을 뿐 아니라 그 선분 위에서 자신의 관점에 따라 본질적인 것과, 즉 연속적인 무제한적 권력으로서 <소송>이나 <성>과 접촉하고 연계되고 인접한다. 젊은 여인의 역할이 절정에 이르는 것은 그들이 선분을 끊고 그것을 흐르게 하고 그것이 참여하고 있는 사회적 장을 탈주케 할 때, 욕망의 무제한적 방향을 따라 무제한적 선 위로 그것을 탈주케 할 때이다. 멀다고 생각했던 것의 인접성을 발견하고, 그 연속된 것의 힘을 복원하고 수립하는 것은 언제나 젊은 여인들이다.
<소송>과 <성>은 누이⋅하녀 및 창녀의 다양한 질(質)을 결합해서 가지고 있는 이 여인들을 증식시킨다. 소수적인 인물들의 소수적인 질들은 스스로 소수적이고자 하는 문학의 기획 속에 있는 것이며, 그러한 문학이 갖는 전복적인 힘을 그것들로부터 끄집어낸다. 세 가지 질은 탈주선의 세 가지 구성 요소들에 상응한다. 1)누이: 가족에 속하지만 가족 기계를 탈주케 하려는 의사를 최대한 갖고 있다. 카프카는 문학을 황량한 세계의 창조로 정의했는데 그 세계의 주민은 누이들이다. 2)하녀 혹은 하급 고용인: 관료적 기계에서 포착된 바 있듯이 탈주하려는 최대한의 의사를 갖고 있다. 하녀의 언어활동은 의미적이지도 음악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카프카가 찾아내려고 했던 침묵으로부터 태어난 소리로서 거기에는 자신을 감추거나 탈형식화하는 언표행위의 주체가 없다. 그것은 표현의 유동적인 순수 질료다. 3)창녀: 가족적⋅부부적⋅관료적인 모든 기계들이 교차하는 지점에 있어서 가장 탈주하기 쉬운 자리에 있다. 그들이 제공하는 에로틱한 숨막힘이나 발작은 탈영토화의 선 위로 빠져들게 하는 것이다. 카프카가 꿈꾸는 기이한 결합을 위해서는 세 가지 모두가 동시에 필요하다.
누이⋅하녀⋅창녀의 세 가지 요소가 그 전체로서만 유효성을 얻는다는 결합의 공식은 분열적 근친상간의 공식이다. 정신분석학은 누이를 어머니의 대체물로, 하녀는 파생물로, 창녀는 반동적 구성물로 간주한다. 그것은 ‘누이-하녀-창녀’의 그룹을 마조히스트적 우회로 해석할 뿐이다. 카프카는 정신분석학적 책들에서 묘사되는 마조히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결합의 공식을 수반하는 분열적 근친상간은 오이디푸스적이고 신경증적인 근친상간과 대립된다. 후자는 재영토화인 어머니와 행해지는 것이고, 전자는 누이와 행해지는 것이다. 이때, 누이는 어머니의 대체물이 아니라 계급투쟁의 상대편이고 하녀와 창녀의 편이라는 점에서 탈영토화의 근친상간이다. 오이디푸스적 근친상간은 직접적 또는 상징적으로 그것을 금지하는 편집증적이고 초월적인 법에 상응하며, 스스로 이 법을 위반한다. 그러나 분열적 근친상간은 내재적인 분열적-법에 상응하고, 순환적 재생산 대신에 탈주선을 형성하며 위반 대신에 전진을 행한다. 오이디푸스적 근친상간은 사진, 초상화, 어린 시절의 추억과 결부되어 있는데, 이 거짓된 어린 시절은 존재한 적이 없으며 표상의 함정에 욕망을 사로잡는 것이고 욕망의 모든 접속을 절단시키며, 욕망으로 하여금 사회적 및 정치적 장 속에서 자신을 확인하는 것을 저지한다. 분열적 근친상간은 소리가 흘러나가는 방식에 결부되어 있으며, 유아기의 블록이 추억에 얽매이지 않은 채 현재를 활성화하고, 그것의 접속을 증식시키는 방식과 결부되어 있다. 분열적 근친상간과 신경증적 근친상간의 대립은 <변신>에서 잘 나타나는데, 사진으로 나타나는 덮은 목을 가진 부인(오이디푸스적), 드러난 목을 가진 누이(분열적)간의 대립이 그것이다.
분열적 근친상간은 동성애적 감정 표출이라는 요소 없이는 이해할 수 없는데, 오이디푸스적 동성애와 반대로 이중체의 동성애고, 형제나 관료의 동성애다. 이러한 동성애의 지표는 카프가가 좋아하는 찰싹 달라붙는 옷에서 발견된다. <칼다 철도의 기억>이나 <소송> 등에서 예술가는 유별난 항으로 기능한다. 예술가와의 동성애적 관계는 젊은 여인이나 어린 누이들과의 근친상간적 관계와 결부되어 있다. 젊은 여인들이 기계의 부품들이 접속되는 주요한 점들이었다면, 예술가는 이 모든 점들을 결합하여 내재성의 장을 뒤덮고 나아가 그 장을 앞질러 가기도 하는 자신의 특별한 기계 속에서 그 점들을 펼쳐 보여 준다.
평범한 선분들과 유별한 점들, 특이적 점들 사이의 접속 지점들은 미학적 인상을 갖고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나 카프카의 모든 노력은 반대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데, 인상을 추출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장악하는 것, 인상 속에서가 아니라 대상⋅인물⋅사건 속에서 직접 현실에 대해 작업하는 것이다. 카프카의 문학적 진전 전체는 간결함, 극-현실주의, 기계주의를 위해 프라하학파의 영향력을 지우는 것으로 이루어져 있다. 바로 이것이 객관적으로 작동하는 접속의 점들이 주관적 인상들을 체계적으로 대체한 이유다. 이 접속의 점들은 여성적인 인물이나 예술사적 인물과 일치하지만, 모든 인물은 사법 기계에 의해 규정되는 객관적인 부품이나 톱니로서만 존재한다.
접속구를 이루는 인물들은 욕망, 근친상간이나 동성애에 관한 함축과 더불어 그들의 객관적인 지위를 표현 기계로부터 받는다. 카프카를 따라 예술 기계의 본성을 요약한다면 그것은 다양한 접속을 향해 사회적 장 위로 가지를 뻗어 나가는 독신자 기계라고 말할 수 있다. 독신자란 근친상간적 욕망과 동성애적 욕망보다 더 광범하고 강렬한 욕망의 상태다. 그는 관료적인 범용성, 원환 속을 맴돎, 두려움, 은둔자적 삶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오이디푸스적 경향, 소멸을 향한 자살적인 욕망이라는 나름의 곤란과 약점을 갖지만, 이런 추락을 통해서조차 독신자는 강렬도의 생산이다. 그는 ‘탈영토화된 자’로서 ‘중심’을 갖지 않으며 ‘소유에 대한 거대한 콤플렉스’도 갖지 않는다. 그의 여행은 탈주선이고, 이러한 탈주는 제자리에서 하는 것이며 순수한 강렬도이다. 탈주는 두 발의 끝으로 자신을 지탱하는 것이며, 두 발끝이 세상에서 그를 지탱하도록 할 뿐이다. 독신자는 사회적이고, 기성사회에 대해 위협적이고 배반적이며, 그 자체만으로도 집합적이다. 가장 높은 욕망은 고독함을 욕망하는 동시에 모든 욕망의 기계에 접속되기를 욕망한다. 고독하고 독신적인 만큼 사회적이고 집합적인 기계, 탈주선을 그리는 이 기계는 필연적으로 공동체라는 의미를 갖는다. 이것이 ‘개인적인 문제’라고는 없는 소수적인 문학의 현실적 조건으로 소급되는 표현 기계의 객관적 정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