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리다]<그라마톨로지에 대하여> 0613 발제
희음
/ 2017-0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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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부 글자 이전의 에크리튀르
제사(題詞)
어떤 서생(“문자과학에서 빛을 발하는 자는 태양처럼 빛날 것이다.”)과 [언어기원론]의 루소(“그리고 알파벳은 개화된 민족들에게 적합하다.”), [소논리학]의 헤겔(“알파벳 문자는 그 자체로서, 그리고 그 자체를 위해 가장 지적이다.”)에서의 세 개의 제사는 문자의 개념을 지배해 왔던 민족 중심주의, 로고스 중심주의뿐만 아니라, 다음의 개념을 지배하려 한다.
1. 문자의 개념: 표음화된 문자가 감추고 있는 그것의 고유한 역사
2. 형이상학의 역사: 진리 일반의 근원을 늘 로고스에 부여해 왔고, 문자를 하대하고 문자 언어를 ‘충만한’(자신이 말하는 것을 스스로 듣는 구조 속에서, 생명의 직접적 현전을 전제로 하는) 음성 언어 밖으로 내몰아 억제해 온 역사
3. 과학의 개념, 과학의 과학성의 개념: 언제나 철학적인 것으로 분류되던 이것은 실제로 끊임없이 로고스의 제국주의에 이의를 제기해왔다. 이것은 과학의 기획을 발생시켰고, 비표음적 특징을 지닌 규약을 탄생시킨 소통 체계에 언제나 포함되어 왔다. 즉 수학적 산식은 기호화의 형식적 법칙들과 그 어떤 특정한 표현 수단과는 독립적인 통사적 구조들을 표현한다. 표음화된 문자로부터의 세계 문화 독점화의 부적절함은 이제 하나의 운동을 야기하게 된 것이다.
메타포, 형이상학, 신학에 의해 속박당한 문자과학에 대한 암시를 통해, 우리는 문자학(에크리튀르 과학), 즉 그라마톨로지가 세계에 자기 해방의 표시들을 나타낸다고 말하지만, 문자과학은 ‘문자과학’으로서는 빛을 발하는 데 실패할지 모른다. 문자과학을 통해 겨냥되는 모든 것의 통일성이 이미 한 역사적-형이상학적 시대에 의해 결정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 시대의 울타리를 엿보게 할 수 있을 뿐이다.
에크리튀르라 불리는 것에 대한 사색과 엄밀한 탐구는, 문자과학의 실종성이 개발되도록 하면서, 현재 예고되는 괴물과 같은 기형의 형태로 나타나는 미래의 세계에 대한 충실하고 주의 깊은 사유의 방황을 나타낸다. 우리의 전미래를 이끌고 있는 그 무엇에 대해서는 아직 제사가 없다.
제1장 책의 종말과 에크리튀르의 시작
오늘날 언어의 문제는 의도, 방법, 이데올로기에 있어서 실로 다양한 연구와 이질적인 담론으로 다루어진다. 언어라는 기호의 인플레이션, 그 자체. 이것이 가리키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형이상학적 시대가 그것의 문제적 지평의 총체를 언어로써 결정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 현전에 대한 형이상학적 욕망이 언어의 유희로부터 구해 내려고 했던 모든 것이 그 속에 다시 붙들린 상태로 되었기 때문이다.(형이상학을 구축하여 그 구축의 수단이었던 언어로부터 하나의 초월성을 이루어 내고자 했으나, 그것은 여전히 언어 안에 붙들린다는 뜻인 듯하다.)
프로그램
에크리튀르의 개념은 이제 언어의 특수하고 파생적이며 보조적인 형태를 취하는 것을 멈추고, 주기표(음성 언어)의 외피, 기표의 기표를 지칭하는 것을 멈추면서 언어의 외연을 넘어서기 시작하는 것처럼 일어나고 있다. 에크리튀르, 이것은 우발적인 중복이나 이차성을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즉 언어의 부차적인 요소, 언어의 몸종, 언어의 보조자가 아니라) 오히려 언어를 포함하는 것이다. 문자 언어에 한정할 수 있다고 믿기었던 이차성은 모든 기의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도 ‘언제나 이미’ 다시 말해 처음부터 영향을 준다. 언어를 성립시키는 유희, 기의들의 되돌려 보내기 유희를 벗어나는 기의는 없다. 에크리튀르의 도래는 이 유희의 도래이다. 이것은 기호의 유통을 규제하던 어떤 한계를 지우며 안전한 모든 기의들을 끌어들이고, 기호의 개념과 그것의 모든 논리를 파괴하는 것으로 귀착된다. 넘침과 소멸.
최초의 에크리튀르는 ‘음성 언어에 대한 단순한 대리 보충’(루소)으로 통했던 문자 언어보다 더 근본적인 것이다. 문자 언어는 결코 단순한 ‘대리 보충’이었던 적이 없었다고 해야 하거나, ‘대리 보충’의 새로운 논리를 구축하는 것이 시급한 일이다.(여기서 우리는 ‘단순한 대리 보충’과 ‘대리 보충’의 의미를 구별하는 것부터 해야 할 것 같다.)
소리의 특권은 경제(역사의 생명 혹은 자기 자신과의 관계로서의 존재)의 한 시기에 대응한다. 음성적 실체를 통해 ‘자기가 말하는 것을 듣는’ 체계는 한 시기 전체 동안 세계 역사를 지배해 왔고, 세계에 대한 관념과 세계의 기원에 대한 관념을 창출해 왔다. 이 역사는 문자 언어를, 하나의 궁극 목적, 즉 충만한 상태로 현전하는 음성 언어를 번역하고 그것의 테크닉의 역할을 담당하며 시원적 음성 언어를 대변하고 통역하는 일에 종속시켰다.
그러나 이제 음성 언어(충만한 말)의 역사는 종말적인 헐떡거림의 양상을 보인다. 책의 문명의 죽어감. 그것은 도서관의 발작적인 증가에 의해 나타난다. 그리고 이것은 에크리튀르의 역사, 에크리튀르로서의 역사에서의 새 변화이다.
에크리튀르의 개념은 언어의 개념을 넘어서면서 동시에 그것을 포함한다. 행동·운동·사유·사색·의식·무의식·경험·정서에 대해 언어라고 불리었다면, 이제 이것을 포함해, 문자적 표기의 신체적 동작, 문자적 표기를 가능하게 하는 총체, 기의 자체, 그리하여 일반적으로 표기를 야기시킬 수 있는 모든 것을 지칭하기 위해 이 용어가 사용된다.
에크리튀르, 흔적, 그람(gramme)은 단순성이 결여된 요소인데, 그것은 원종합의 환경, 원종합의 환원 불가능한 원자를 의미한다. 이는 형이상학이 드러내는 대립들의 체계 내에서 규정되는 것이 금지되어야 할 무엇이고, 경험, 혹은 의미의 기원이라고 불러서도 안 될 그 무엇을 말한다.
수학의 에크리튀르를 살펴 보자. 그것은 어떤 음성적 산출에 결코 절대적으로 연결된 적이 없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히 고립된 어떤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가장 지적인 문자로 통했던 알파벳 문자의 불완전성을 환기시키며, 그것 스스로의 고립, 과학적 언어의 실천을 통해 표음 문자의 관념적 측면과 암묵적 형이상학(지식)이 내부로부터 심층적인 방식으로 논박되는 장소, 이스토리아(역사)라는 관념 또한 논박되는 장소가 된다.
기표와 진리
에크리튀르를 지배하는 ‘합리성’은 더 이상 어떤 로고스로부터 나오지 않는다. 그것은 파괴를 개시하는데, 이 파괴는 모든 의미 작용들의 와해가 아니라 탈침전화, 해체이다.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진리의 의미 작용인데, 진리의 모든 형이상학적 규정들은 로고스의 법정, 로고스의 계보 속에서 사유되는 이성의 법정과 다소간 직접적으로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그런데 이 로고스 속에서 소리와의 본질적이고 시원적인 관계는 단절된 적이 없다. “목소리가 내는 소리들이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는 상징들이고, 문자로 씌어진 낱말들이 목소리가 내는 낱말들의 상징인”(아리스토텔레스) 까닭은 이 최초의 상징들을 산출하는 목소리가 영혼과 본질적이고 즉각적인 인접 관계를 갖기 때문이다. 최초의 기표로서의 목소리. 존재와 영혼, 사물들과 정서 사이에는 자연적 의미 작용의 관계가 있다는 것. 그리하여 목소리, 즉 구어는 자연적이고 보편적인 의미 작용의 질서에 즉각적으로 관련되는 규약이 된다.
목소리는 기의에 가장 가까이 있다. 목소리를 영혼에, 기의화된 의미의 사유에, 사물 자체에 불가분하게 결합시킨다는 점에서, 기표는 파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언제나 테크닉적이고 대리 표상적인 기표. 어떠한 구성적 의미도 지니지 못하는 기표. 헤겔 또한 [미학]에서 “우리의 귀는 눈이 색깔이나 형태를 지각하듯이 동일한 이론적 방식으로 지각한다”고 했으며 “귀는 실제로 대상들로 향하지 않고도 물체의 내적 떨림의 결과를 지각”하고 이를 통해 드러나는 것은 “영혼으로부터 오는 최초의 관념성”이라고 했다.
이런 역사 속에서 우리는 음성 중심주의가 존재 일반의 의미를 현전으로 간주한 역사상의 규정과 뒤섞이고, 이런 일반적 형식에 의존하는 하위 규정들(형상으로서의 사물이 시선에 현전하는 현전, 실체/본질/존재로서의 현전, 지금 또는 순간으로서의 현전, 코기토가 자기 자신에 현전하는 현전)과도 뒤섞인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즉 로고스 중심주의는 현전으로서의 존재자의 존재 규정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고 하겠다. 하이데거의 사상 또한 로고스 중심주의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것은 아니므로, 이 사상을 여전히 존재론-신학의 시대에, 현전의 철학, 총괄적 의미의 철학 속에 붙들어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우리 또한 여전히 이 시대(존재론-신학의 시대)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심층적이고 묵시적인 방식으로 본다면, 기의와 기표 사이의 차이는 형이상학의 역사가 포괄하는 거대한 시대의 총체에 속하고, 보다 명시적이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본다면, 이 차이는 그리스도교적 창조주의와 무한주의의 협소한 시대에 속한다. 주의 깊은 언어학자들, 형이상학이 끝나는 곳에서 자신들의 작업의 과학성이 시작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에 의해서도 이 차이의 구분은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야콥슨은 이렇게 말한다. “즉 각각의 언어적 단위는 두 부분으로 되어 있고, 두 측면을 포함한다는 말이다-하나는 감각적이고, 다른 하나는 예지적이다. 한쪽은 시그난스(소쉬르의 기표), 다른 한쪽은 시그나툼(소쉬르의 기의)이다.”라고. 순수한 예지성의 측면으로서, 기의는 그것이 직접적으로 결합되는 절대적 로고스로 되돌아간다. 이 절대적 로고스는 중세의 신학에서 무한한 창조적 주체성이었다. 기호의 시대는 본질적으로 신학적이다.
우리는 기호의 시대의 울타리 내에서, 간접적이고 언제나 위험스러운 운동을 통해서, 이 운동이 탈구성시키는 것 안쪽으로 다시 떨어질 위험을 끊임없이 무릅쓰면서 신중하고 세심한 담론으로 비판적 개념들을 둘러싸야 하고, 개념들이 탈구성하도록 해주는 기구에 그것들이 속하고 있음(대리보충)을 엄밀하게 지적해야 한다.
기의는 로고스 일반과는 직접적인 관계를 지니고, 기표, 즉 문자의 외재성과는 간접적인 관계를 갖는다. 그렇지 않은 듯 보일 때는 은유적 매개가 이 관계에 끼어들어 직접성을 가장했기 때문. 이 직접성은 플라톤이 [파이드로스]에서 언급했던 ‘나쁜 문자’에 대립시키는 진리의 문자, 신의 문자를 가리킨다. 여기에서도 역시 로고스의 특권을 재차 확인시키고, 그 로고스에 인접하여 영원한 진리를 의미하는 기표는 진리로서의 음성 언어를 뜻한다. 예지적이고 비시간적인 문자는 은유에 의해 명명되고, 감각적이고 유한적인 문자는 고유한 의미에서 문자로 지칭된다. 후자는 인간의 방법, 우발적으로 구현된 존재, 유한한 피조물의 책략이 된다.
17세기 대합리주의의 시기부터 문자 언어의 단죄는 다른 형태를 취하게 된다. 대표적으로 루소는, 문자 언어는 음성 언어를 무기력하게 만들며, 책들을 통해 천재성을 판단한다는 것은 한 인간을 그의 시체를 토대로 그리려고 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문자 언어는 죽음을 안고 있다는 데 대해, 다른 한편에서 자연적이고 신적이며 살아 있는 문자 언어가 경배된다. 그것은 목소리와 숨결에 결합되어 있다. 성직자의 것, 신앙 고백의 내적인 목소리와 가깝다. 영혼의 문자 언어와 육체의 문자 언어, 안쪽의 문자 언어와 바깥쪽의 문자 언어, 의식의 문자 언어와 정열의 문자 언어, 이런 편가름이 생겨난다.
좋은 문자 언어는 하나의 총체성 내에 포함되었고, 하나의 책 속에 들어가 있었다. 기표의 총체성이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완결될 수 있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기의로 구성된 하나의 총체성이 존재하고 그것의 표기와 기호들을 감시하고 자신의 관념성에 있어서 그것과 독립될 때에만 가능하다. 이것은 문자 언어와는 다른 것이며, 신학과 로고스 중심주의를 박과사전적으로 보호하는 것에 불과하다. 오늘날 모든 영역에서 이러한 책의 파괴라는 폭력은 과거의 필연적인 폭력, 문자 언어에 대한 억압에 부응하여 일어난 것이다.
씌어진 존재
서양의 전통이 조직화되는 필연적 배경의 명증성: 기의의 범주는 기표의 범주와 결코 동시대적이지 않으며, 기표의 이면에 지나지 않거나 기표의 범주가 교묘하게 이동한 평행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기호는 하나의 이질성의 단위가 된다. 기의는 그 자체로서 하나의 기표, 하나의 흔적이 아니기 때문. 기의는 기표와 맺는 관계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기의의 형식적 본질은 현전이고, 소리로서의 로고스와 그것이 인접하는 특권은 현전의 특권이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존재의 로고스, 즉 ‘존재의 목소리에 따르는 사유’(또한 양심의 분석을 지배하는 목소리라는 법정)는 기호의 최초이자 최후의 원천이다. 기표와 기의의 차이를 낳는 최초이자 최후의 원천이기도 하다. 이 차이가 절대적이기 위해서는 어떤 초월적인 기의가 있어야만 하는데, 그 초월적인 기의와도 같이 존재에 대한 사유는 특히 목소리 속에서, 즉 낱말들의 언어에서 나타난다. 목소리는 기표의 소멸처럼 자기 자신에게서 가장 가까이 들린다. 목소리는 순수한 자가정서로서 이것은 필연적으로 시간의 형태를 띠며, 자신의 자발성에서 벗어난 어떤 부수적 기표도, 표현 실체도 빌리지 않는다. 자연발생적인 기의의 유일한 경험. 이 경험을 울타리 내에서 낱말은 기의와 목소리, 즉 개념과 표현 실체의 통일적 단위로 체험된다. 여기서 ‘존재’라는 낱말은 근원적인 낱말이 된다. 다른 모든 존재를 감싸는 낱말로서의 존재. 즉 ‘존재’라는 낱말은 모든 언어에서 그 자체로 미리 이해되는 것이다. 즉 이 존재의 의미는 ‘존재’라는 낱말도 아니고, 존재의 개념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의미는 낱말들로 이루어진 언어를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다. 그것은 어떤 특정 낱말이나 언어 시스템에 연결되지 않았다면, 적어도 낱말 일반의 가능성에 연결되어 있다. 여기서 우리는 다음 두 개의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1. 현대의 한 언어학이 단어의 단위를 파괴하고 단어의 환원 불가능성과 단절하는 의미 작용을 다루고 있다면, 이 학문은 여전히 ‘언어’와 관계되는 것일까? 2. 존재의 문제라는 이름으로 성찰되는 모든 것은, 우리가 여기서 부지불식간에 실천하고 있을지도 모를 단어 중심의 낡은 언어학 속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하이데거의 철학은 학문이 아닌 존재의 문제 자체와 만난다. 그가 형이상학에 제기하는 것이 존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그는 진리·의미·로고스에 대해서도 묻는다. 이러한 명상은 확신들을 복원시키지 않는다. 명상은 존재의 모든 규정이 이루어지기 직전을 탐구하고, 존재론-신학의 안전판들을 뒤흔들어 버림으로써 가장 현대적인 언어학만큼이나 존재 의미의 통일성을, 종국에는 낱말의 단위를 와해시키기에 이른다.
하이데거는 ‘존재의 목소리’를 무음성으로써 환기시킨다. 이를 통해 그는 존재의 시원적 의미와 낱말 사이, 의미와 목소리 사이, 존재의 목소리와 음성 사이, 존재의 부름과 분절된 채로 발음된 소리 사이의 단절을 강조한다. 은유를 확인해주는 동시에 은유적 괴리를 부각시킴으로써 이 은유를 의심하게 하는 단절. 이것은 현전의 형이상학 및 로고스 중심주의와 관련하여, 하이데거의 상황이 지닌 애매성을 드러낸다. 여기서 우리가 상기해야 할 것은 존재의 의미가 하이데거에게 단순히 혹은 엄밀히, 하나의 ‘기의’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존재는 기호의 운동으로 포착되지 않는다. 이 명제는 고전적 전통의 반복이면서, 의미 작용의 형이상학적 혹은 기술적 이론에 대한 불신을 드러낸다. 존재는 최초도 근본적이지도 초월적이지도 않다. 존재는 존재자의 범주들을 초월하는 것으로 도출되면서, 그 존재론의 개시는 필연적이나, 일시적인 순간들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존재는 존재 의미의 필연적이고 시원적인 숨김, 현전의 출연 속에서의 은폐, 존재의 역사를 있게 해 주는 그것의 후퇴 등은 근본적으로 아무것도 기표의 운동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이며, 기의와 기표의 차이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또한 서양의 언어적 영역과 철학 내에서 어휘적인 일반 형태로 고정된 모습대로의 존재가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제1의 기의가 아니라는 것이고, 존재는 언어 시스템과 역사적 의미 작용 속에 뿌리내리고 있다고 말한다. 그는 또 초월적 기의와 관련된 어떤 역사를 구성하는 것에 대해, 초월성 자체를 산출한 것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는 ‘존재(존재하다)’라는 낱말에 엑스 표시를 함으로써도 이 점을 상기시킨다. 말소 표시는 단순 부정의 기호가 아니다. 그것은 읽힐 수 있는 상태로 남아 있으면서 지워진다. 즉 기호는 스스로를 보이도록 하면서 파괴되는 것. 이 마지막 기호 표시가 존재론-신학, 현전의 형이상학, 로고스 중심주의의 한계를 정하는 이상, 그것은 또한 최초의 기호 표시이다. 엑스 표시는 기호 표기(에크리튀르)가 로고스 중심주의의 울타리를 벗어나게 한다는 것을 함축한다.
니체와 하이데거의 망설임은 그 이후의 모든 시도들에 고유한 지진과 같은 것이다. 해체의 운동들은 바깥으로부터가 아니라 이 구조 안에 들어앉음으로써만 가능하다.
헤겔은 “상형 문자의 읽기는 그 자체에 있어서 무성의 독서이고 소리 없는 문자”라고 하면서 “들을 수 있거나 시간적인 것, 그리고 볼 수 있거나 공간적인 것 각각은 고유한 토대를 가지고 있”으며 “동일한 가치가 있다”고 말했다. 또한 헤겔은 사유를 기호를 생산하는 기억으로 복원시켰다. 그는 문자로 씌어진 흔적이 없이도 버틸 수 있다고 믿었던 철학적, 소크라테스적 담론 속에 이 흔적의 본질적 필연성을 재도입했다. 그는 책의 마지막 철학자이자 문자의 최초 사상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