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코]0615 주체의 해석학 세미나 발제
아라차
/ 2017-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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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15 <주체의 해석학> 세미나
1982년 3월 24일 강의 발제 _ 아라차
플라톤의 명상 vs 스토아주의(에픽테토스)의 명상
<알키비아데스>에서 소크라테스는 자기 배려의 실천은 주로 시선의 훈련, 즉 자기가 자기 자신에게 보내는 시선의 훈련으로 특징짓는다. 이 시선이 동일자와 동일자의 관계를 성립시킨다. 영혼 운동은 근본적인 동일성 관계가 있으며 이 운동의 귀결점은 신성한 요소의 파악 및 인정이다. 영혼은 자기 자신을 인식하고 이 자기 인식 활동 속에서 이미 자신이 인식했던 바를 재인식한다. 결국 내적인 객관성에 입각해 영혼의 속성이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는 그런 자기 인식이다.
푸코가 말하려고 하는 철학적 자기 수련은 이 관계가 전혀 다르게 설정된다. 자기에 의한 자기 파악은 동일성의 요소가 아니라 격차 같은 것을 내포하는 일종의 내적인 이중화에서 진행된다. 에픽테토스는 인간이 자신을 돌보고 돌볼 수 있고 돌보아야 하는 사실은 상이한 일정한 자질을 운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 자질이 이성이며 이성을 통해 자유로운 결정과 통제를 가하는 자세로 자기 배려가 수행되어야 한다. 자기를 배려한다는 것은 자질들을 무작정 사용하는 게 아니라 이 사용의 선과 악을 다른 자질에 의거해 사례를 한정할 경우에만 사용하게 하는 것이다. 격차 속에서 자기배려와 자기인식이 행해진다는 것. 시선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 것은 사유에서 일어나는 운동, 사유에 나타나는 표상들, 표상들을 따라다니는 의견과 판단, 육체와 영혼을 동요시키는 정념이다. 영혼의 실체를 파악하는 것이 아니라 표상과 정념의 흐름에서 발생하는 이성의 자유로운 용례를, 아래로 향하는 시선에서 파악하는 것이다. 플라톤에 있어 신성은 자기 자신과 영혼 내에서 발견되지만 스토아주의에서는 자기와 다른 타자 내에서 발견한다.
완전한 독립 상태에서 살기, 자기 자신과 타자에 대해 행사하는 통치의 속성에 대해 성찰하기, 자기 자신의 사유와 대화를 나누기, 자기 자신과 대화하기는 현자와 제우스(신)의 자태이다. 제우스는 자기 자신의 통치에 대해서만 성찰하는 반면 인간은 세계 전반과 우리 자신에게 부과되는 통치를 성찰해야 한다. 이것이 meleté와 meletan의 모든 대상들이다. 우리는 명상해야 하고 상이한 사태에 사유를 적용해야 한다. 사유 자체에 가하는 사유에는 인간을 신성에 근접시키는 무엇이 있음을 알 수 있다.
플라톤의 경우 진실은 타자를 통치할 수 있게 해줄 본질적인 진실이다. 스토아주의의 진실은 인간이 사유하는 바의 진실로 향하는 시선이다. 표상과 표상이 수반하는 의견의 진실을 체험하는 것이 문제이다. 플라톤에서 자기 자신을 향하는 시선은 반성, 기억, 상기의 추상적 의미이고, 스토아주의에서는 자기로 향하는 시선은 자기 자신을 진실의 주체로 구축하는 시련이어야 하고, 이는 명상의 성찰적 실천을 통해이루어진다.
서구 철학 전통의 문제점과 ‘자기배려’의 복구
푸코는 서구에서 세 가지 유형의 사유와 사유에 대한 성찰이 있다는 가설을 세운다. 첫째 기억의 형식을 갖는 성찰. 우리가 상기하고 진실로 가는 형태로 기억 내에서 주체가 자신을 해방하고 자신의 본향과 고유한 존재로 회귀해버린다. 둘째는 명상. 이 성찰에서는 인간이 사유하는 바의 체험, 진실의 윤리적 주체로서 자신을 구축하려는 주체의 변형을 목표로 해 실제로 자기 자신이 체험하는 바를 사유하고 자신이 생각하는 바대로 실천하는 주체인 자기 자신의 체험이 이루어진다. 세번째는 방법. 있을 수 있는 모든 진실을 기준으로 객관적 인식의 조직과 체계화로 나아가는 성찰 형식으로 데카르트의 방법이다.
서구의 철학적 전통은 주체, 성찰, 자기인식에서 자기 인식을 특권화시켰다. 하지만 자기 인식 자체만을 고찰한다면 우리는 그릇된 연속성을 설정하거나 날조된 역사를 창시할 위험에 빠질 수 있다. 플라톤에서 데카르트를 거쳐 후설에 이르는 방법이나 플라톤에서 시작해 성 아우구스티누스를 거쳐 프로이트에 이르는 경험론적인 확장의 의미에서 이루어진 연속적 역사가 그것이다. 양자 모두 철저하게 고안되지 않은 주체 이론이 유포되도록 방치했다.
푸코는 그리스인들의 자기배려의 맥과 토대 위에서 자기인식을 재위치시켜 보려 했고 연구를 시도한 것. 그도 조금은 맹목적이라는 걸 본인도 알고 있다. 자기배려는 단순히 인식이 아니다. 자기배려는 완전히 상이한 성찰의 형식들을 발생시키는 복잡한 실천이다. 자기인식과 자기배려의 접합을 받아들이고 자기 자신을 돌보아야 하기 때문에 자기 자신을 인식해야 한다면 자기 인식의 상이한 형식들을 자기배려의 상이한 형식들에서 찾아야 한다. 자기배려의 역사에서도 자기 인식은 동일한 형식이나 기능을 갖고 있지 않다. 사용된 인식의 형식들이 동일하지 않다는 것. 결과적으로 주체에 대한 일반적이고 보편적인 이론을 전제하는 자기인식의 연속적인 역사를 구축해서는 안 되며, 주체를 있는 그대로 구축하는 것이 성찰의 형식들인만큼 그 형식들을 분석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
기억의 태도와 미래의 태도
나는 내가 인식하는 진실의 윤리적 주체일까. 이 문제에 답하기 위해 스토아주의자들은 여러 수련을 했고 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praemeditatio malorum, 죽음의 명상과 의식 점검이다.
그리스 사상 전반에 걸쳐 미래, 미래에 대한 사유를 불신했다. 자기 자신을 미래에 의해 사로잡히게 방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근본적이 테마였다. 미래가 무(無)이거나 미리 결정되었다는 것은 인간에게 상상력과 무기력을 강요한다.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는 사람은 stultus요, anoêtos이다.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기 때문에 그는 미래를 근심한다. 미래로 향한 나머지 그는 현재에 일어나고 있는 바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이는 그리스의 자기 실천에 있어서 “기억의 우월성”이 늘 강조됐기 때문이다. 미래는 부정적, 과거(상기의 태도 하에서)는 긍정적 가치를 가졌다.
praemeditatio malorum 불행 숙고
기억과 과거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이러한 일반적 맥락 속에서 스토아주의자들은 그 유명한 불행숙고 훈련을 발전시켰다. 에피쿠로스주의자들은 불행숙고에 반대해 두 개의 다른 수련을 내세웠다. 첫째로, 기분전환 훈련. 우리 인생에 도래할 수 있는 즐거움 쪽으로 사유를 전환하며, 불행에 대한 표상과 사유를 우회하는 기능을 담당한다. 다음은 회상 훈련. 과거에 체험한 기쁨을 환기함으로써 발생할 수 있는 불행이나 나쁜 일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고 방어해 준다.
불행숙고는 최악의 것들에 대한 시련이다. 불행숙고는 사유를 통해 수련하고 그것이 무엇이든지간에 가능한 모든 불행이 발생하는 걸로 생각해야 한다. 불행숙고는 최악의 불행이 자신에게 닥칠 것이라는 확신 속에서 불행을 연습하는 것이다. 또 가장 심각을 불행을 넘어 그것이 곧 닥칠 것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미래에 대한 사유에 대한 일반적인 불신 경향에도 불구하고 불행숙고는 이 규칙의 예외이며 분명히 미래에 대한 사유이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면 미래에 대한 사유가 아니다.불 행숙고에서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미래를 막는 일이다. 사유를 통해 체계적으로 미래의 고유한 차원들을 제거하는 것이 관건이다. 최악의 불행들은 인간이 체험하고 있는 현재와 관련해 임박한 위치에 있다. 사실은 그것은 미래 사유에 대한 일반적 불신 내에서 미래의 소거이며 또 현행적인 사유의 체험 내에서 모든 가능한 바를 현재화함으로써 미래를 소거하는 행위이다. 미래를 소거하는 미래의 현재화는 동시에 현실의 축소이기도 하다. 이것이 불행숙고의 또 다른 양태이다. 모든 미래를 이렇게 현재화시킨다면 그것은 미래를 더욱 현실적으로 만들기 위함이 아니라 오히려 미래를 가능한 한 최대로 비현실화시키기 위함이고, 적어도 미래 내에서 불행으로 여겨질 수 있는 바의 현실을 소거하기 위함이다. 미래에 대한 사유가 미래가 일상적으로 모습을 드러내는 곳인 상상력으로부터 끌어내려 적어도 불행으로서는 아무것도 아닌 본래의 현실로 되돌려 놓기 위한 작업을 해야 한다.
고통이 참을 만하여 우리를 죽게 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고통이 약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