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미니즘] <캘리번과마녀> 1장 발제문
소리
/ 2017-06-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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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한국판 서문
페데리치를 만난 한 선생님의 말에 의하면, 한국어판 서문을 썼을 당시의 페데리치는 암 투병을 하며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었던 시기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한국어판 서문의 글들에 나온 “자본의 ‘플랜테이션’에서 노동하고 있는 이들(여성, 이민자, 노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맑스의 자본 분석의 한계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 탄탄하게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자본주의 구성에 있어서 맑스가 바라본 생산수단의 파괴만큼이나 중요한 것은 핵심적인 노동의 위계와 차별의 여러 층위를 만드는 것이라는 이 책의 핵심적인 대전제에 대한 힌트도 주었습니다.
서문
서문에서 페데리치는 이 책의 내용을 연구하게 된 계기에 대해 먼저 말해주고 있습니다. 미국 페미니즘 운동에서의 여성의 사회적 경제적 착취의 뿌리에 대한 근원적인 답을 내놓지 못하는 것이 그 이유였습니다. 여성에 대한 착취는 초역사적 문화구조에서부터 시작한 것도 아니고, 여성을 배제한 자본주의 발전에서만 있는 것 또한 아니라고 페데리치는 보고 있습니다.
여성에 대한 사회적 경제적 착취의 뿌리에는 재생산의 역영, 재생산 노동에서부터 기인합니다. 그 과정을 보기 위해 페데리치는 봉건제에서 자본주의로의 이행 속에서의 여성사를 봅니다. 사회적 재생산과정, 특히 노동력의 재생산과정에서 자본주의가 야기한 변화를 분석하려 합니다.
나이지리아에서의 교수경험은 자본주의가 공유지에 대한 공격과 노동인구 재생산에 대한 국가 개입의 현장을 목격하면서, 초기 자본의 축적과정 속에서 가족형태와 육아 여성노동과 여성과 남성의 정체성과 관계를 포함한 노동인구 재생산 측면의 변화에 대한 힌트를 얻습니다.
서론
맑스는 남성 임금 프롤레타리아트의 관점과 상품 생산의 발달과정의 관점에서 시초축적을 검토했습니다. 그러나 이 관점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변화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시초축적의 유산과 기능의 평가에 있어서도 페데리치와는 입장이 다릅니다. 맑스는 자본주의 발달과정을 인간 해방을 위한 필연적 결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시초축적을 위한 여성에 대한 폭력을 본다면, 인간해방의 길목에 있는 것이라고 맑스는 말 할 수 없을것이라고 페데리치는 말합니다. 마녀 사냥은 재생산 기능에 대한 여성들의 통제력 파괴를 위한 목적으로, 더 폐쇄적이고 억압적인 가부장적 체제의 기반을 마련하는데 사용되었습니다.
이러한 맑스의 관점의 비판적 사용으로 젠더와 계급 간의 이분법을 넘어선, 다른 형태의 계급관계의 특수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페데리치는 푸코의 관점을 이용하지만, 그의 한계를 지적합니다. 푸코의 관점을 통해 우리는 남성중심적인 착취체제가 여성의 신체를 규율하고 전유하기 위해 사용했던 전략과 폭력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푸코는 권력-기교(테크네, 기술)의 생산적인 성격에 강하게 끌린 나머지 권력-관계에 대한 비판을 사실상 제거해버렸습니다. 그는 권력의 원천, 동기에 대해서는 묻지 않았습니다. 마녀사냥과 악마론의 담론이 추가되었다면, 미시권력의 동학이 희생자와 박해자 사이에 존재한다고 상상했던 역할역전의 공모는 나타나기 어려울 것입니다.
1장
우리가 흔히 갖고 있는 편견과 달리 중세시대는 흔히 말하는 암흑시대가 아니었습니다. 그 시대는 반봉건투쟁의 열기 속에서 지배적인 성적 규범에 도전하고 여성과 남성 간의 평등한 관계 설정을 위한 최초의 조직적 시도가 있던 시기였습니다. 계급투쟁에 있어서도 부의 분배와 권위주의적 지배의 거부에 기초한 평등주의적 사회질서를 위한 움직임이 많았던 시기였습니다.
먼저 농노에 대해 알아봅시다. 농노는 봉건 영지에서 노예처럼 매여있던 존재들이었지만, 노예제와는 처지가 달랐습니다. 이들을 묶어두었던 토지는 이들의 힘의 원천이기도 했습니다. 토지를 통해 먹고 살 수 있었던 농노는 영주와의 사이가 나빠져도 생계의 문제를 당장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폐쇄적인 경제구조로 인해 영주는 농노를 함부로 내쫓을 수 없었고, 상속수수료만 내면 자식에게 토지를 물려줄 수도 있었습니다. 이러한 소유의 경험은 농노로 하여금 자율성을 증대시켰고, 그들 스스로의 삶의 조건을 개선시키기위한 농민투쟁으로까지 번졌습니다.
이렇게 역동적인 시기였지만 여성은 이름도 거의 찾을 수 없는, 모든 면에서 2등의 지위를 가졌습니다. 그럼에도 여성농노는 자본주의 사회의 ‘자유로운’ 여성들보다 남성 친족에 덜 의존했고, 육체적, 사회적, 정신적으로 덜 차별받았습니다. 농노공동체에서 여성에 대한 남성의 종속상태는 제한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농노의 신체에서 삶과 재산까지 영주의 차지였으므로, 영주의 권위가 여성의 남편과 아버지의 권위를 압도했기 때문입니다.
중세사회에서는 가족보다는 공동체가 우선했습니다. 거기서 행해지는 여성 농노의 일들-세탁, 바느질, 추수, 공유지에서 가축돌보기-일은 다른 여성들과 협업으로 이뤄졌습니다. 자본주의와 달리 여성농노들의 협업은 고립이 아닌 힘의 원천과 보호로 작용했습니다. 그러나 중세 장원에서여성의 지위는 정적인 것이 아닙니다. 여성의 힘과 여성과 남성의 관계는 언제나 영주에 대항하는 공동체의 투쟁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었습니다.
공유지투쟁
중세 장원은 끊임없는 계급투쟁이 일어났습니다. 영주가 농노에게 부과하는 부담, 토지 이용료의 대가인 공물을 경감하기 위한 끊없는 소송의 형태가 줄을 이었습니다. 부역에 대해서도 농노들은 반항적 태도를 보였고, 전시의 군역에 대한 저항도 강했습니다. 또 다른 갈증의 원천은 공유지였던 숲과 호수, 언덕을 포함한 비경작지의 이용, 세금에서도 원성이 높았습니다. 따라서 농노들은 도망을 가거나 투쟁을 통해 이를 거부하기도했습니다.
이러한 공공연한 투쟁과, 눈에 띄지 않는 저향의 형태로서 “꾸물거림, 시치미, 거짓순종, 무식한 시늉, 의무 방치, 좀도둑질, 밀렵”등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저항의 일상적 형태는 중세에 많았으며, 계급관계를 제대로 파악할 수 있을만큼 가시적인 것이라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영주들은 문서화를 통해 의무와 권리에 대한 “관습”을 정비했습니다. 자신에게 유리한 ‘전통’을 발명해 내는 소작인과 영주 사이의 대립을 통해 다양한 전통의 발명이 시도되었습니다. 결국 13세기에 이르러 영주들이 전통까지도 문서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해방과 사회적 분화
두 가지 변화가 실질적인 농노제를 끝내게 되었습니다. 농노투쟁의 결과물인 정치적인 면에서의 변화입니다. 바로 특권과 특허장의 양허였습니다. 이것은 의무를 고정시키고 촌락공동체의 운영에서 어느정도의 자치를 허용받았습니다. 특허장으로 인해 장원재판소가 부과하는 벌금과 사법절차의 규칙을 명문화하여 자의적인 체포와 기타 권력남용을 경감시켰습니다.
가장 중요한 변화로는 부역의 금납화입니다. 부역을 금납화하면서 빈농은 미래 수확을 담보로 한 만성적인 빚에 허덕이다 토지를 빼앗기게 됩니다. 그렇게 일부 농민들은 프롤레타리아화의 과정을 밟습니다. 토지를 통해 먹고 살 수 있었던 농노는 영주와의 사이가 나빠져도 생계의 문제를 당장 걱정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부역의 금납화로 인해 생산자는 자신이 얼마나 착취당하는지 가늠하기 힘들어졌고, 자유로운 농민은 다른 사람을 고용하여 착취할 수 있게 됩니다.
삶이 상업화하면서 여성은 계급을 불문하고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미혼여성과 과부가 심했습니다. 13세기부터 여성의 이농이 크게 늘었으며, 15세기에는 도시로 이주한 도시 인구 중에서 여성의 비중이 가장 크게 됩니다.
이들은 하녀, 행상, 소매상, 방적공, 하급 동업조합의 회원, 창녀로 일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새로운 사회적 독립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당시에 여성이 혼자 살 수도 있게 되었고, 가장으로서 자식과 함께 살며 공동체를 이룰 수도 있었습니다. 여성은 도시 사회에서 가장 가난했지만 점점 여러 직종에 진출할 수 있게 됩니다.
14세기가 되면서 여성이 학교선생과 의사, 외과의사가 되기도 하면서 대학교육을 받은 남성과 경쟁하기 시작했습니다. 여성들이 독립성을 얻어가면서 이들에 대한 사회생활 기록이 남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와 더불어 여성의 독립성에 대한 여성혐오적 반발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천년왕국 운동과 이단 운동
중세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봉건관계에 대한 현실적 대안을 모색했던 운동으로 천년왕국운동과 이단운동이 있습니다.
천년왕국 운동은 조직적 구조나 계획없이, 카리스마적인 개인을 필두로 운동이 시작되었으나 군사력에 무너졌습니다. 반면 이단운동은 새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한 의식적 노력으로, 박해에도 불구하고 오랜기간 존속할 수 있었으며 반봉건투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교회는 이단을 지우기위해 종교재판소를 짓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민중적 이단은 상인들과 십자군이 들여온 동방종교의 영향을 받아 정통교리의 이탈이라기 보다는 급진적 민주화의 저항운동의 성격을 띄고 나타났습니다. 사회의 모든 노동, 소유, 출산, 여성의 지위에 대한 재정의의 요구와 해방의 문제를 말했습니다. 또한 이단 운동은 대안적 공동체 구조를 제공하기도 했습니다. 중세의 성직자들은 사면과 면죄부, 주교직을 판매하며, 물질적 보상을 요구하는 장례식과 세례가 판매되었는데, 이에 대한 민중들의 경멸이 민중들 스스로의 관점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했습니다. 십일조의 거부, 우상숭배의 거부 등으로 이단 운동의 일종으로 나타났습니다.
이단 운동은 공산주의의 실험과, 성에 관한 극단적 금욕과 방탕 등의 현상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섹슈얼리티의 정치화
성행위를 규제하려는 교회의 시도는 오래된 것입니다. 여성의 배제와 성행위의 배제를 성스러움과 동일시함으로써 성행위가 여성에게 주는 힘을 몰아내려 했습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성에 대한 언행과 생각까지도 지배하려는 ‘고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