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제4~5장 후기 +4
토라진
/ 2017-06-06
/ 조회 1,7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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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시간에는 제4장 표현의 구성요소와 제5장 내재성과 욕망에 대해 세미나를 진행했습니다. 특히 들뢰즈, 가타리는 이 두 장에서 카프카 문학의 표현양식과 그 안에 내재하고 있는 ‘욕망’의 문제를 제기합니다.
‘나는 단어를 보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고안한다.’라는 카프카의 말은 그가 표현방식의 세계에 얼마나 집중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카프카의 그 지점, 표현이 형식을 부수고 단절을 드러내는 방식을 통해서 소수적 문학, 혁명적 문학이 태어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카프카 문학은 편지, 단편소설, 장편소설 등의 상이한 방식으로 그 소수적 문학의 성격이 드러납니다. 우선 편지는 언표행위의 주체(글을 쓰는 주체)와 언표주체(내용의 주체)가 각자의 결백성을 드러내는 형식으로 나타납니다. 즉 언표행위의 주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음으로 인해 결백하며 언표주체는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음으로 결백합니다.
하지만 이런 결백이 죄의식을 막아내지는 못합니다. 결국 그의 편지는 편지 쓰는 기계(언표주체)가 기계 작동자(언표행의의 주체)를 배신할 수밖에 없는 악마성을 내표하고 있습니다. 은밀한 웃음을 감춘 악마적 결백성의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것이죠. 결국 그것은 죄의식이 아니라 함정이고, 리좀 안에서의 막다른 골목이며 모든 출구를 봉쇄당하는 것입니다. 편지는 결국 악마적 계약과 다름 아닌 것입니다.
단편소설에서는 주로 동물-되기가 주로 다루어집니다. 탈주선을 그리고 출구를 찾는 것은 이를 통해서입니다. 이 때의 동물-되기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며 하는 여행이고, 오직 강렬도 안에서만 체험됩니다. 강렬도의 문턱 넘어서기라고 할 수 있죠. 하지만 이곳에도 막다른 골목이 있습니다. 그 막다른 골목은 가족입니다. 그는 모든 곳에다 출구를 만들지만 이미 동물이라고 할 수 없는 분자적 다양체와 기계적 배치에 자리를 내줍니다. 그 자리에 장편소설이 있습니다.
카프카의 장편소설에서는 일종의 법칙이 존재합니다. 들뢰즈, 가타리는 그것을 다섯 가지로 분류하면서 각 법칙에 해당하는 작품을 그 법칙에 들여 놓습니다. 그들이 가장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세 편의 장편소설 <성> <소성> <실종자>입니다. 그것은 기계적 지표들이 그 자체로 일관된 배치를 구성하는 경우입니다.
들뢰즈, 가타리에 의하면 카프카의 문학들은 항상 소통하며 중단된 시도들이 형식을 통해 넘나듭니다. 모든 것이 유산되지만 모든 것이 소통하는 이런 운동이 카프카의 작품에서 드러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언표행위로 그것은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며 사회적인 것으로 욕망의 정치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음 장에서는 ‘욕망의 정치학’의 문제가 집중적으로 논의됩니다. 추상적 기계의 배치 문제에 집중하면서, 욕망과 권력의 내재적인 문제들 및 ‘사법’의 실질적인 문제들이 제기됩니다. ‘사법은, 욕망하는 자는 물론 억압당하는 자의 욕망이기도 하다.’ 라는 말은 그의 작품에서 드러난 욕망이 가장 잘 표현된 문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름 내용을 정리하고 보니, 복잡하고 난해했던 내용들이 조금은 체계를 잡아가는 것도 같습니다. 특히 <성>과 <소송>을 읽은 후라서 내용을 이야기를 하는 부분에서 좀 더 이해를 잘 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세미나 시간에 나왔던 이야기 중에 들뢰즈, 가타리가 카프카의 장편을 지나치게 도식적으로 규정하고 있는 것 같다는 비판이 있었습니다. 그들의 철학을 위해 카프카 문학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끌어온 것 같다는 반론도 함께 있었죠. 하지만 그들의 해석으로 인해 카프카 문학을 좀 더 다양한 시각에서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고 된 것만은 분명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움직이기를 준비하는 ‘운동’ 안에서의 문학적 글쓰기에 대한 좀 더 선명한 인식과 이해를 가질 수 있게 되는 것 같습니다.
'카프카 문학은 우리에게 어떤 방식으로 낯설어지는가?’ 라는 제 나름의 질문에 대한 중요한 길잡이가 될 것 같은 생각이 듭니다. 다시 다음의 문장이 떠오릅니다. 나는 단어를 보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고안한다.’ 이 문장의 반복은 또 어떤 새로운 차이들을 만들어낼지 다음의 논의들이 벌써 궁금해집니다.
댓글목록
희음님의 댓글
희음
지난 주에 세미나 함께하면서 '욕망의 정치학'이라는 게 뭔지, '미시 정치학'이라는 게 뭔지에 대해
골몰하는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철학 공부하면서 철학 사랑에 빠지게 한 게 들뢰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요즘 드는 생각이, 들뢰즈가 너무 개체의 욕망, 사회나 조직이나 구조에서 뚝 떨어져 나온 욕망 덩어리로서의 개체에게만
집중한다는 것이었거든요. 들뢰즈에 대해 스스로 돋아난 의심을 스스로 변호하기 위한 작업이 필요한 시기인 거죠.
그 작업에 하나의 힌트가 되어줄 만한 것이 '욕망의+정치학'이라는 거. 욕망하기, 욕망 찾기, 시시각각 돋아나는,
시시각각 또 다른 것이 되는 내 안의 욕망을 제대로 알기가 정치가, 또 하나의 실천이 될 수 있다는 거.
과연 어찌 해서 그럴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대한 고민을 내 안에서 오래 묵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쓰다 보니 넋두리뿐이라 좀 미안시러움. 헤헤)
희음님의 댓글
희음
참 카프카의 이 말 '나는 단어를 보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고안한다.'라는 거 말예요.
그리고 토라진 님의 개인적인, 카프카 문학은 어떤 방식으로 낯설어지는지에 대한 질문.
제 나름대로는 카프카가 '단어'를 고안한다기보다는 '배치'를 고안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어요.
문장 안의 단어 배치, 한 단락 안의 문장들 배치, 인물들을 여기 저기에 던져 놓는, 인물들에 대한 공간 배치,
던져 놓음으로써 인물이 어떤 성격(캐릭터)을 스스로 입게 되는 것처럼,
단어나 문장을 작품 안에 던져 놓음으로써 의미나 정서가 스스로 솟아오르게 하는 방식으로
카프카 문학은 낯설어지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단에의 배치....적절한 것 같습니다.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그런데....들록즈가 "표현의 구성요소"라는 장에 카프카의 그 말을 인용한 것은 형식을 부수고 나타나는 "표현"에 집중한 것 같아요. 기존의 형식을 부수고 단절을 드려내는 방식으로의 표현......물론 표현은 배치의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나는 거겠지요....
카프카 문학은 어떻게 표현되는가? 단어를 새롭게 배치하는 방식으로.....어때, 낯설지?
요런 결론이 나오네요....ㅋㅋ
주호님의 댓글
주호
들뢰즈는 텍스트로 대할 때보다 이렇게 사람들과 세미나로 대할 때 더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집에서 혼자 읽을 때는 도통 어려워서... ㅜㅜ
저 없이 즐거웠을 세미나를 떠올리며... 후기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