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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 젠더 허물기: 11장 철학의 ‘타자’가 말할 수 있는가? (0920 발제)
삼월 / 2018-09-20 / 조회 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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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틀러는 스스로가 철학자인가에 대해 분명하게 말하지 못한다. 이 질문에 답하려면 ‘철학’이 무엇인가, 혹은 무엇을 철학이라고 하는가 하는 문제의 답을 먼저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이 문제에 대한 답도 단순하지 않다. ‘누가’ 철학을 정의할 자격이 있는가에 대한 답을 먼저 내려야 하기 때문이다. 아마도 버틀러가 스스로가 철학자인지 말하기 어려운 이유는, 대체로 이 세 번째 질문에 있을 것이다. 버틀러의 논문을 철학으로 ‘인정’해 줄지 말지를 결정할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면, ‘미국철학협회’처럼 합당한 대가를 지불받고 운영되는 조직 말이다.

 

버틀러가 말하기 어려워하는 주된 부분은 자신의 논문이 현재 제도권 철학의 지배적인 통찰 기준에 들어맞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 문제는 글의 철학적 중요성과는 별개이다. 물론 버틀러는 이 책의 10장에서 이미 제도권 철학과 별개로 ‘철학의 행위’를 하고 있는 ‘일반인 철학자들’(버틀러 책의 독자들과 철학적 실천을 하는 이들을 말하는 듯함)에 대해서 말했다. 그럼에도 버틀러는 ‘철학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자신과 같은 연구를 한다면 무엇을 떠올릴지를 궁금해 한다. 버틀러가 보기에 제도권 내에서 ‘철학’이라는 학문적 실천은 철학을 언어도단이라 할 수준까지 이중화했다. 철학은 자신의 바깥에서 자신을 발견했고, ‘대타자’ 안에서 자신을 상실했다.

 

결국 버틀러는 자신의 글에 대해 ‘철학에 관한 것이지만, 철학적인 것은 아니’라고 결론 내린다. 일부러 철학제도와 거리를 두며 철학은 시작에 불과하다고 말하며, 그 시작이라는 것이 보잘것없고 골치 아픈 것이었음을 밝힌다. 버틀러는 비제도적인 방식으로 철학을 공부했으며, 철학과 비철학의 구분에 의문을 품는다. 무언가가 철학으로 인정되고 말고의 문제가 대체 어떤 철학적 가치를 가지는지 회의한다. 제도권 철학은 철학 외부의 작업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에 인색하지만, 역설적으로 철학은 문학적 해석과 현대의 문화연구에서 활력을 얻는다.

 

버틀러가 타자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정체성이 명확해지고, 자신의 경계를 허물면서 타자에 대한 인정이 가능해진다고 한 것은 철학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철학은 다른 학문과의 관계에서 자신을 정의하며, 경계를 허물면서 다른 학문들과 관계를 맺는다. 경계의 존재는 바로 확산의 조건이기도 하다. 철학은 자신에게로 복귀하는 게 아니라 경계를 넘어서면서 확산된다. 인정을 향한 욕망은 대타자 안에서 자신을 발견하려 하지만, 자신이 상실되었음을 알게 할 뿐이다. 상실된 자신은 이미 외부로 나왔고, 자신은 타자성(대타자)에 의해 충당된다. 타자성에 대한 통찰은 자아로의 복귀가 불가능함을 알게 하고, 마찬가지로 철학도 이 지점에서 자신이 ‘철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버틀러는 어린 시절 어머니와 아버지의 책을 통해 이루어졌던 비제도적 철학과의 만남이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이었다고 말한다. 철학적인 직업에 익숙했던 적이 없으면서도 버틀러는, 철학 텍스트를 읽고 철학적으로 사고하는 것이 삶의 문제에 중요한 지침을 줄 것이라고 믿었다. 현실에서 철학이 삶과 분리되어 철학적 개념화의 문제로 이해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슬픔과 상실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철학을 실존적이고 정치적인 딜레마와 연결시키려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버틀러가 페미니즘 이론가로 명성을 얻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게 되면서, 본의 아니게 제도권 철학으로 진입하게 되자 ‘철학자로 인정’받는 문제가 외부에서 다시 불거졌다. 일부 정치이론가들이 버틀러의 강의가 철학 강의인지에 대해 의문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결국 버틀러는 철학이 무엇이며, 무엇이 철학에 속하는가에 대한 문제로 다시 돌아와야 했다. 무엇이 철학에 속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단지 철학 텍스트의 수사성에 대한 문제임도 깨달았다. 이 수사성을 통해 철학이 정치학의 영역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방식도 알게 되었다.

 

버틀러는 페미니즘 철학자들이 제도권의 철학에서 배제되는 현상을 직시한다. 버틀러는 과거의 자신처럼 ‘철학 바깥의 철학’이라는 유령과 같은 상황에 놓인 그 철학자들의 상황을 파악하려 한다. 오히려 눈에 띄는 것은 이들이 마주한 억압적 상황이 아니라, 이들이 이루어낸 학문적 성과들이다. 이들은 학제를 가로질러 대화에 참여하는 철학자들로서, 문학과 과학, 여성학 연구를 통해 철학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이 이렇게 교류하고 있을 때, 철학은 더 외롭고 국지적·방어적으로 고립되어갔다. 버틀러가 여기서 발견한 통찰은, 문화적으로 가장 중요한 철학논의가 철학 제도 바깥에서 연구해왔던 학자들에 의해 발생한다는 사실이다. 철학은 순수성을 상실하면서, 인문학 전반에 걸쳐 생명력을 얻었다.

 

우리가 인정을 갈망하면서 외부에서 자신을 확인하려는 것처럼, 철학도 인문학 속에서 자신을 반향하면서 철학 개념 자체를 스스로에게 낯설게 만든다. 인정에 대한 갈망이 타자성에 대한 통렬한 자각으로 이어지는 것처럼, 철학도 스스로에게 낯선 것이 되어 인문학 속에서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제도권 철학의 배제 행위가 오히려 인문학 전체에 지적인 풍요를 가져다주는 것이다. 9·11 테러 이후 버틀러가 주목하는 공동체의 시작은 헤겔이 말한 이런 방식의 ‘자기-상실’로부터 온다. 우리는 어떤 충만하고 대단한 존재, 분열되지도 않고 상실되지도 않을 주체여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무언가를 해낼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애초부터 분열되었고 타자가 자신인 줄 알고 있었기에 상실이 예정되었던 존재이므로 허물어짐이라는 방식을 통해 공동체를 만들고 연대할 수 있다. 오로지 ‘타자’이기에 우리의 모든 사유와 행위는 우리 삶과 철학을 풍요롭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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