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프루스트 발제 : 1권 207p ~ 끝
세로토닌
/ 2018-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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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1. 일상에서의 일탈
‘이 무렵 아주머니께서는 - ……- 자신이 그렇게도 소중히 여기는 이 단조로운 나날의 누적으로부터, 설령 한순간에 지나지 않았을지언정, 그래도 뭔가 가정 내에서 어떤 천재지변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나는 믿어 의심치 않았다. ’
작은 어긋남의 요일인 토요일을 기다리던 레오니 아주머니는 그 누구보다 시공간적 안전지대를 추구하는 사람이었음에도 동시에 ‘어떤 새로운 사건’에 대한 갈망이 컸다. 이것은 침대에서의 상상놀이에서 나아가 제3자와의 불온한 연극놀이로 해소되곤 하는데, 한 인간의 이러한 모순적인 심신의 태도를 우리는 어떻게 해석할 수 있을까? 그녀는 그 누구보다 무미건조한 일상 안에 갇혀있는 사람이었기에 이러한 인위적인 놀이와 연극으로 더욱더 배설해야 하는 ‘인간의 욕구’를 지녔던 것일까? 아니면, 도리어 삶에 대한 열망과 기대치가 매우 높기에 그것이 좌절되는 상황을 피하고, 대신 ‘방 안에서의 놀이의 방법’을 선택한 것일까?
2. 물리적 심리적 거리와 동정심
‘레오니 아주머니만 해도 프랑수아즈가 자기 딸이나 조카를 위해서라면 어떤 불평도 하지 않고 목숨이라도 바쳤을 테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얼마나 잔인하게 굴 수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의 친척을 제외하고는, 멀리 떨어져 사는 사람의 불행에 대해서만 연민의 정을 느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 “아이고 동정녀 마리아 님! 하느님께서는 정말로 이렇게 불쌍한 인간을 고통 받게 내버려두실 수 있나요? 아, 가엾은 것!” 하지만 내가 이름을 부르자마자 프랑수아즈는 지오토의 ‘자비’가 누워 있는 침대 곁으로 돌아왔고, 그녀의 눈물도 금방 말라 버렸다. ’
이와 같은 프랑수아즈의 심리상태를 화자는 ‘친척에 대한 사랑’과 ‘자기 집안의 크나큰 장래를 확고히 하려는 욕망’, 또는 ‘주인과의 밀착된 관계에서 오는 명예욕과 그로 인한 다른 하인들에 대한 경계심’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심리는 이처럼 극단적이진 않더라도 우리 안에 어느 정도씩은 내재해있다고 볼 수 있는데, 좀 더 풀어서 이야기 한다면 ?
3 3. 두 자아의 상존 그리고 경멸
‘ 내가 “게르망트가 사람들을 아세요?”라고 물으면, 달변가인 르그랑댕은 “아니, 나는 그들을 한번도 알려고 하지 않았다네.”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불행히도 이 달변가인 르그랑댕은 그가 마음속 깊이 조심스럽게 숨겨 놓은 또 다른 르그랑댕에 종속되어 있었는데, 그는 이 또 다른 르그랑댕을 결코 밖으로 드러내 보이려 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이 또 다른 르그랑댕이 우리의 르그랑댕과 그의 스노비즘을 알고 위태롭게 할 이야기를 할지도 몰랐기 때문이다. ’
‘물론 이 말은 르그랑댕 씨가 고함을 지르며 속물들을 공격했을 때 진지하지 않았다는 말은 아니다. 그는 적어도 자신이 속물이라는 사실을 스스로는 알지 못했다. 왜냐하면 우리는 오로지 다른 사람들의 열정만을 알고, 우리가 자신의 열정을 알게 되는 것도 주로 다른 사람들의 가르침을 통해서이기 때문이다. 그 열정은 우리에게 이차적인 방식을 통해서만, 즉 첫 번째 동기를 보다 품위 있는 동기로 바꾸는 상상력을 통해서만 작용한다. 르그랑댕의 스노비즘이 공작 부인을 자주 만나러 가라고 권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단지 그의 상상력에 명령하여, 공작 부인을 온갖 우아함으로 치장된 여인으로 꾸미게 했을 뿐이다.’
우리는 르그랑댕씨의 내면의 분열된 자아를 얼핏 얼핏 보게 된다. ‘달변가 르그랑댕’과 ‘사기꾼 르그랑댕’으로 말이다. 후자는 ‘스노비즘’을 드러내며, 전자는 그것을 경멸한다. 이러한 분열적 스노비즘을 화자는 르그랑댕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는 우리가 자신의 내면 속 깊은 ‘열정’을 모르는 것과 같으며, 그 열정은 첫 번째 동기를 보다 품위 있는 동기로 바꾸는 상상력을 통해 작용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설명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우리는 가끔 우리 안에서 다른 ‘성질’보다 좀 더 강하게 ‘거부하는 특성들’을 발견하게 된다. 유독 타인에게서 자신이 더욱더 거부하던 그런 특성이 바로 자신에게 내재되어 있음을 발견하기도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성질’은 위에서 언급된 ‘이차적인 방식’ 즉, 좀 더 품위있는 동기로 바꾸는 창조작업에 의해 유지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가?
르그랑댕은 왜 그토록 스노비즘을 경멸하였는가? 경멸의 원인은 무엇이고, 효과는 무엇인가? 르그랑댕의 분열은 경멸의 원인-스노비즘적 자아-가 먼저이고 경멸이 차후인가? 아니면 경멸이 먼저이고 그 효과로 스노비즘적 자아가 강화된 것일까?
** 두 개의 산책 길 – 메제글리즈라비뇌즈, 게르망트
4 4. 감정의 실체와 원인에 대한 집착
‘산사나무 앞에 걸음을 멈추고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고정된 향기를 들이마시며 내 생각 앞에 내밀어 보아도, 내 생각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고, 그 향기를 잃어버리거나 되찾거나 하면서, 산사나무가 젊음의 기쁨과 더불어 여기저기 어떤 음정의 차이처럼 예기치 않은 간격을 두며 곳곳에 꽃을 뿌리는 그 리듬과 일체가 되어 보려 했지만 아무 소용없었다.’
‘꽃이 내게 불러일으킨 감정은 내게서 떨어져 나가 꽃에 가서 들러붙으려 했지만 헛수고였고, 그리하여 그 감정은 여전히 모호하고 막연한 채로 남아 있었다. 산사 꽃들은 내가 느낀 감정을 해명하는 데 아무 도움이 되지 못했다.’
‘지평선에서 종탑을 보면서 느꼈던 기쁨의 이유를 알아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 이유를 찾아내야 하는 의무가 매우 고통스럽게 여겨졌다. ’
‘곧 종탑 선과 빛나는 표면이 마치 일종의 껍질처럼 찢어지면서 그 안에 감추어졌던 것 중 일부가 나타났고, 조금 전까지만 해도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상념이 머릿속에서 단어 형태로 떠올랐다. 그러자 조금 전에 종탑을 보면서 느꼈던 기쁨이 얼마나 커졌던지, 나는 일종의 도취감에 사로잡혀 더 이상 다른 것은 생각할 수 없었다.’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안타까움, 지나간 것에 대한 그리움, 어머니의 키스에 대한 집착….이 모든 것들은 가멸성에 대한 비탄을 담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는 것에 대한 큰 가치부여로 이어진다. 마르셀에게 있어, 산책을 통해 경험한 아름답고 행복한 감정들은 평생에 걸친 큰 기쁨의 원천이었으며, 따라서 그러한 긍정의 감정들을 최대한 이해하고 포착하려고 노력했다. 이는 곧 감정의 실체를 파악함으로써 그것의 소유권과 불멸성을 조금이나마 확보하려는 몸부림이었으며 그가 그토록 추구하는 ‘과거라는 시간’ 도 ‘긍정적 감정의 재생산’을 위한 도구였다. 그리고 이는 곧 작중 화자 마르셀의 글쓰기의 동기이자 목적인 것이다.
5. 환경과 관능의 상호보완
‘때로 고독이 주는 열광에, 그와 뚜렷이 구분되지 않는 또 다른 열광이 겹쳐졌는데, 그 열광은 내 품에 안길 어떤 농부 아가씨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나는 걸 보고 싶다는 욕망에서 비롯되었다……그때 나는 이런 새로운 감동으로, 내 정신 속에 있는 모든 것들, 이를테면 기와 지붕이 반사하는 분홍빛이나 무성한 잡초들, 오래전부터 가고 싶어 했던 루생빌 마을, 그 숲의 나무들, 성당 종탑에 커다란 가치를 부여했다. 왜냐하면 이 새로운 감동을 불러 일으킨 것이 바로 그런 사물들이라는 생각이 들자 그 사물들이 더욱 매력적으로 보였고,…….. 한 여인이 나타났으면 하는 욕망이 자연의 매력에 뭔가 더 열광적인 것을 덧붙여 주었다면, 반대로 자연의 매력은 여인의 매력이라는 지나치게 한정된 매력을 더 풍부하게 해 주었다. 나무의 아름다움은 곧 여인의 아름다움이었고, 그녀의 입맞춤이 지평선의 영혼과 루생빌 마을의 영혼, 내가 그해 읽은 책들의 영혼을 내게 넘겨 줄 것만 같았다. 내 상상력은 관능적인 것과 접촉하면서 힘을 얻었고, 관능적인 것은 내 상상력의 모든 영역으로 확산되어 내 욕망은 이제 끝이 없었다. …..나는 대지와 존재들을 분리하지 않았다. 메제글리즈나 루생빌을 욕망하듯이 나는 메제들리즈나 루생빌의 농부 아가씨, 또는 발베크의 어부 아가씨를 욕망했다. ’
환경의 매력에 의해 발생한 열정은 성적인 열정으로, 또는 성적인 에너지는 다시 우리를 둘러싼 환경의 매력을 강화시킨다. 이러한 상호보완을 통해 우리는 둘 사이를 관통하는 어떤 공통의 성질이나 원리가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욕망이라는 것은 다양한 형태와 성질로 존재하면서도, 하나의 큰 물줄기로 같이 흐르는 것만 같다.
6. 글쓰기의 고뇌
‘내가 철학적이고 무한한 의미를 지닌 주제를 찾으려고만 하면, 금세 내 머리는 작동하기를 멈추고 내 주의력 앞에는 허공만이 보일 뿐이었다. ‘
‘어쩌면 미래에 내가 쓸 작품의 주제를 찾고 있었을 때, 내 머릿속에 각인된 이런 재능의 부재, 이 시커먼 구멍은 견고하지 않은 환상에 불과하며, 이러한 환상은 내가 우리 시대 최고 작가가 될 것이라고 이미 ‘정부’와 ‘신’과 합의를 본 아버지께서 개입하기만 하면 금방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과 같은 식으로 존재하며, 그들처럼 늙어 가고 그들처럼 죽어 갈 것이며, 그들 가운데서도 특히 글에 대한 재능이 전혀 없는 사람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내 사유의 공허함에 대한 이러한 절박한 내면 감정은, 사람들이 내게 해 줄 수 있는 갖가지 듣기 좋은 말보다 더 우세해졌는데, 마치 선행을 했다고 칭찬을 받을 때 악인이 느끼는 양심의 가책과도 같았다. ’
예술적 재능에 대해 갖는 인간적 고뇌를 너무나 동감되도록 표현하였다. 모든 예술가와 지망생들의 내면 속에는 이러한 생각들이 자주 출몰할 것만 같다.
7 . 게르망트 부인
‘이제는 그녀 얼굴에 대해 내가 품었던 온갖 상념이 그녀를 아름답게 만들었으므로 – 어쩌면 이것은 특히 우리 자신에게 있어 최상인 부분을 보존하려는 본능의 한 형태, 말하자면 언제나 실망하지 않으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 나는 그녀를 나머지 사람들 밖에 배치했다. ……..그리하여 내 시선은 그녀의 금발, 푸른 눈, 목 장식에 멈추면서, 다른 여인들의 얼굴을 연상시킬지도 모르는 모든 요소들을 제거하면서, 이렇듯 의도적으로 불완전하게 그린 스케치 앞에서 소리치는 것이었다. “ 얼마나 아름다운 여인인가! 얼마나 고결한 분인가! 내 앞에 있는 분이 저 자랑스러운 게르망트 부인이자, 주느비에브 드 브라방의 후손이구나!” ’
우리 자신에게 있어 최상인 부분을 보존하려는 본능의 한 형태와 실망하지 않으려는 욕망이 우리의 내면에 어떠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지를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자 나는 곧 그녀를 사랑하게 되었다. 우리가 한 여인을 사랑하는 데는, 때로는 스완 양의 경우처럼, 그녀가 우리를 경멸의 눈길로 바라보고, 또 그녀가 결코 우리 것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만, 또 때로는 게르망트 부인 경우처럼, 우리를 호의적인 눈으로 바라보고 또 그녀가 우리 것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할 때가 있다. ’
사랑에 젖어드는 두 개의 양상.
8. 지적인 삶의 원조들과 믿음
‘이렇게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은 내 삶의 수많은 작은 사건들과 연결되어 있었지만, 우리가 나란히 보내는 여러 다양한 삶 중에서도 가장 변화가 많고 이야깃거리가 풍부한, 지적인 삶과 연결되어 있었다.’
‘나는 메제글리즈 쪽과 게르망트 쪽을, 내 정신적인 토양의 깊은 지층으로, 아직도 내가 기대고 있는 견고한 땅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때 나는 사물들을, 존재들을 믿었다. 내가 이 두 길을 돌아다니며 알게 된 사물들이나 존재들이 아직도 내가 진지하게 생각하고, 아직도 내게 기쁨을 주는 유일한 것이다. ’
‘창조에 대한 믿음이 내 마음속에서 고갈된 탓인지, 아니면 현실이란 기억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서 그런 건지, 오늘 처음으로 내 눈에 보이는 꽃들은 진짜 꽃처럼 보이지 않는다.’
‘…혹은 그보다 더 아름다운 수련이 있는 냇가에 데려간다 해도 내 욕망은 충족되지 않았을 것이다. 마치 저녁에 집에 도착했을 때 내 어머니보다 더 아름답고 더 지적인 분이 저녁 인사를 하러 온다 해도 결코 내가 원하지 않았을 것처럼 말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연인을 믿을 때조차도 연인을 의심하며, 다른 속셈이나 다른 의도 없이 오로지 나만을 위한 어머니의 키스 같은, 그렇게 완전하게 연인의 마음을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
인간의 세계를 크게 물리적 세계와 정신적세계로 나눠 볼 수 있다. 작가는 어느 정도 고정화되어 있다고 보이는 물리적 세계에 비해, 우리 내면의 생각과 감정의 주 무대인 정신적 세계는 가장 변화가 많고 이야깃거리가 풍부하며, ‘두 개의 산책길’이 바로 그 지적인 세계의 토대이자 토양이며 자신이 기대고 의지하는 곳이라고 말한다. 그 누구보다 ‘지적인 세계’에서 많은 삶을 일구고 꽃피우려는 성향의 내향적인 인물이었던 마르셀에게 그것의 원조와 같은 산책길은 참된 삶의 실재하는 공간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그 길에서 만난 사물들과 존재들은 영원히 그의 가장 큰 기쁨이자 유일한 기쁨의 원천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작용은 ‘믿음으로 인한 완전함’에서 근거한다.
‘그때 나는 사물들을, 존재들을 믿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연인을 믿을 때조차도 연인을 의심하며, 다른 속셈이나 다른 의도 없이 오로지 나만을 위한 어머니의 키스 같은, 그렇게 완전하게 연인의 마음을 소유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화자 및 작가의 ‘현실’에 대한 시선은 외부세계에서 실재하는 것 보다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면에서의 인식을 더 중시하고 있다.
‘현실이란 기억을 통해서만 이루어져서 그런 건지, 오늘 처음으로 내 눈에 보이는 꽃들은 진짜 꽃처럼 보이지 않는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지나간 감정에 대한 집착’으로 직결된다. 우리의 삶이 자신이 가장 순수하고 모든 것을 온전히 받아들이던 시기에 각인된 세계나 사물과 감정을 토대로 그 안에서 근원적인 기쁨이나 슬픔을 경험하게 된다면, 그리고 현실이란 자신의 내면에서 기억하고 느끼는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면, 행복하기 위해 취할 수 있는 가장 현명한 방법은 자신의 과거에서 가장 큰 기쁨을 주었던 것을 추구하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본다면, 작가에게있어 ‘행복’이란 여러 정의 중에서도 ‘쾌락’에 가장 근접한 것 같다. 행복을 평온, 안정, 자유, 사랑, 즐거움 등등의 많은 다양한 감정상태들로 굳이 구분해 볼 때, 마르셀이 추구하는 ‘행복’은 ‘순간적으로 가장 자극적이었던 기쁨’의 연장과 극대화로서 구현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마약상태’에 너무 도취된 나머지 다른 시간들의 가치와 의미가 약화되고, 오로지 그 상태에 최대한 머무는 데에만 모든 에너지를 쏟음으로써, 실제적으로는 삶이 황폐화되어 가는 현상과 오버랩되기도 한다. 어떤이에게 행복은 그저 ‘쾌락의 총량의 증가’일 수 있지만, 또 어떤이에게는 ‘여러 긍정의 에너지의 총합’ 일 수도 있다. 즉, 최소의 에너지에 최대의 잉여 에너지. 그로 인해 전반적으로 내 안에 자유와 사랑이 여유롭게 흐를 수 있는 힘의 상태말이다.
후자의 측면에서 본다면, 옛 기억을 포착하고 되살리려는 프루스트의 지나친 노력은 도리어 행복에 역행하는 것만 같다. 아무리 인내의 달콤한 결실을 맺을 지라도, 그것들을 얻기 위해 치뤄야 하는 에너지의 소비와 현재의 순간에서만 빛날 수 있는 긍정의 감정들의 손실이 너무나 엄청나 보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