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프루스트 읽기 : 1권 마지막 후기 +8
세로토닌
/ 2018-09-22
/ 조회 1,4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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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행복이란,
글쓰기란,
어린시절이란.
우리 모두는 매순간에도, 그리고 평생에 걸쳐서도 ‘행복’을 추구한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이 외치는 ‘행복’이란 이름의 그 ‘무엇’이 실은 모두에게 제각각으로 다른 형태와 색깔을 지녔음을 이번 챕터를 통해 새삼 느끼게 된 것이다. 그 ‘행복씨’는 누군가에겐 편안한 모습으로, 누군가에겐 현란하고 짜릿한 느낌으로, 또한 누군가에겐 재미있는 이야기로 다가온다. 이것이 색상처럼 다양한 느낌을 말하는 것이라면, ‘행복’은 형태 또한 다르게 인식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프루스트에게 행복은 건축물의 형태를 띠고 있는 듯 했다. 기초공사에서부터 기반시설과 철조, 목공, 석조공사에 이르기까지, 최대한 견고하고 설계도면과 근접한 형태로 세워야하는 건축물말이다. 그에게 있어 ‘참현실’은 당장에 손으로 만져지는 어떤 물질이라기 보다는 ‘기억’속에서만 확인되는 어떤 것이었다. 가장 선명하고 행복했던 시절, 그의 정신세계의 토양이자 모든 기쁨의 원천이었던 어린시절의 추억의 시공간들과 그안의 사물들만이 그에겐 진정한 현실이자 현실인식의 재료였던 것이다. 따라서 행복의 건축물이 세워지기 위해 희생되는 온갖 현재의 순간들과 고된 작업들은 감수할 만한 것이었으며, 오로지 그 건축물을 세우는 데 삶의 모든 에너지가 집중되었다.
이처럼 ‘잃어버린 시간들을 찾아서’는 문장으로 만들어진 일종의 건축물이었다. 마르셀의 독백처럼, 작가가 되는 것은 프루스트의 꿈이며, 또한 글쓰기에 대한 고뇌는 여느 작가지망생처럼 현실적이면서도 절망과 재능에대한 의구심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왜 그렇게 글을 쓰고 싶었을까? 아니, 왜 그토록 문장으로 과거를 구축하고 싶었을까? 그는 산사나무 앞에서 행복을 느낀다. 그리고 바로 직후, 그 행복의 순간에 대해 그리워하고 의문으로 가득차게 되며 조바심을 느낀다. 그리고 그 안에서 계속 헤어나올 수 없다. 그는 자신이 느낀 그 ‘감정’의 실체를 알아야 했고 규명해야 했다. 이것은 마치 매일 저녁마다 어머니의 키스를 기다릴 때의 조바심과 닮았고,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책을 써내려가야만 했던 절박함과도 비슷하다. 그는 지속적으로 자신에게 찾아왔던 그 기쁨의 감정을 항상 재건하고 싶어하고 규명하고 싶어했으며 문장으로 형상화해야만 했다. 그것이 바로 그의 행복의 방식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프루스트 뿐 아니라 실은 우리 모두는 자신이 경험한 가장 최상의 감정상태로 돌아가려는 경향성을 지닌 채 살아간다. 다만 우리는 지나간 감정상태를 이렇게 프루스트처럼 집요하게 포착하고 실체를 찾아가려는 의도가 약했기에 그러한 경향이 크게 발달하지 못한 것일 뿐이다. 우리 대다수는 그저 자신의 '그 상태'에 근접하려는 것을 조금은 수동적이거나 무의식적으로 행할 뿐이다. 그렇다면 프루스트는 왜 이토록 열정적이었을까? 그것은 그의 신념과 가치판단에서 오는 것 같다. 그가 어머니의 키스에 다른 어떤 연인의 것보다 더욱 큰 가치를 부여한 것은 ‘믿음’과 ‘완전성’의 잣대를 키스에 두었기 때문이다. 그는 어린시절 자신이 사랑하던 산책길에서 만난 나무와 꽃 그리고 소리 향기 그 모든 것들을 온전하게 믿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저녁 침대맡에서 작별 키스를 해주던 어머니의 마음은 다른 어떤 여성의 것보다고 순수하고 온전한 무조건성의 마음이었다고 판단한다. 아마도 그가 말하는 ‘믿음’이란 ‘가장 진실에 근접한 감정을 불러일으킴’에 대한 믿음을 말하는 것 같다. 모든 것이 새롭게 인식되며 평생에 걸친 각인이 이루어지는 어린시절 접하게 되는 자연과 느낌 그리고 인상들은 바로 한 인간이 살아가면서 느끼게 되는 모든 감정 중에서도 가장 순도가 높은 진실한 것일 수도 있다. 가장 진실한 감정을 주었던 산책길, 그 진실한 감정을 일으킨 그곳의 사물들, 그리고 가장 진실한 감정으로 자신에게 키스했던 어머니. 바로 이러한 것들이 프루스트에게는 오로지 어린시절에서만 가능했던 현상들이었다.
나의 행복의 형태와 색깔은 무엇일까? 또한 나는 언제 글을 쓰고 싶었을까? 그리고 나는 어린시절에 어떤 순수한 기쁨과 행복을 느꼈으며, 현재의 감정들과는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 바로 이런 부분들을 생각하게 된 시간들이었다.
댓글목록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행복의 건축물에 대한 구축과 그 본질의 탐구'라는 세라토닌님의 분석에 동감합니다.
인간의 가장 깊은 기억을 자극하고 그것의 의미를 생각하게 만드는, 그 심연의 질문들을 프루스트에게서 듣습니다.
글을 쓰고자 하는 것은 어쩌면 세라토님이 언급하셨던 어떤 '믿음'과 '진실'에 대한 갈망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그 믿음과 진실은 늘 흔들리며 보이지도 않습니다. 살아가는 일이 늘 그렇듯 말이죠.
프루스트를 읽으며 어느 철학자가 던진 화두보다 깊고 감각적이며 아름다운 질문과 기억들로 빨려들어가게 됩니다.
그 찬란한 경험들을 함께 쭉 이어나가 봐요~~^^
고민과 성찰이 묻어 나는 후기, 감사합니다.
세로토닌님의 댓글
세로토닌
토라진님 말씀처럼 프루스트의 질문들이 바닷속 심연속에 둥둥 떠 있는 영상이 떠 올랐어요..
과거라는 심해속에서 프루스트는 얼마나 앞이 뿌옇고, 고독하며 꿋꿋했을까요?
지금 막 생각이 났는데, 프루스트는 그랑블루의 잠수부처럼 자기만의 구도를 했던 것 같습니다
모로님의 댓글
모로
후기를 읽으니 잃어버린 시간들에 대한 궁금증이 조금 해소가 됐네요.
근데 왜 어린시절에만 가능할까요?
세로토닌님의 댓글
세로토닌
저도 그러고 보니, 어렸을땐 그냥 눈 앞의 무언가를 그냥 믿었던 것 같아요.
내 앞에 그것이 있구나, 이렇게 생겼구나, ....
지금은 왜 그냥 스쳐지나가기만 할까요?
그래서 간혹 여행속에서 어린시절의 그런 사물과의 마주침을 아주 드물게나마 경험하는 것 같아요...
그 새로운 곳에서는 조금이나마 우린 어린(?)존재처럼 낯선 관계니까......일까요?^^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지난 세미나 시간에 우리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어린아이였을 때, 우리는 과거보다는 '현재'를 거침없이 살아냈던 것 같습니다.
어릴 적의 기억을 불러내기에 적당한 이유는
아마도 어린 시절이 '현재'를 가장 잘 보존되고 있기 때문 아닐까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
자연님의 댓글
자연
가을, '산책'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날들이어라.
마르셀이 소개한 두 개의 산책길(메제글리쪽과 게러망트쪽)에 대해 나와 있는
부분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 1권 펼쳐서 책갈피 꽂아 두었습니다^.^
충만함, 진실함, 슬픔..... 산책길에서 제가 느끼는 복합적인 감정들 같은데...
프루스트처럼 산책하기란 패러디 글을 한 번 써보고 싶다는 야망이 꿈틀거린다는...ㅠㅠ
세로토닌님의 댓글
세로토닌
아마도 저희들이 프루스트의 산책길을 읽었기에 날이 더 판타스틱했던 걸 꺼예요...그쵸.?
산책하면서 최대한 제대로 그 길을 프루스트처럼 느껴보라고...조금이라도 상상해볼 수 있게..
쉽진 않지만 노력해보렵니다...^^
얼마남지 않은 좋은 날들 ~~
패러디 기다리겠습니다~~~^^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자연님의 산책길을 주제로 한 글은 따뜻하고 조금은 쓸쓸하고 그럼에도 충만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자연님의 산책기....다시 보고 싶네요.
저도 기대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