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카프카-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 제4장 발제
토라진
/ 2017-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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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
제 4 장 표현의 구성요소
‘나는 단어를 보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고안한다.’
다수적 문학 혹은 기성의 문학은 내용에서 표현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소수적인, 혁명적 문학에서 표현은 형식을 부수어야 하며, 단절을 표시해야 하고, 거기서 세운 가지가 뻗어가도록 해야 한다. 이렇게 부수어진 형식은 이전의 사물의 질서와 필연적으로 단절된 내용을 재구성해 낸다. 이번 장에서는 이를 수행하는 문학적 기계, 글쓰기 기계 혹은 표현기계가 카프카에게 어떻게 드러나고 있는지 표현의 구성요소들을 통해 살피고 있다.
1.편지들 – 사랑의 편지와 악마적 계약
카프카에게 있어서 편지는 리좀이며 망이며 거미줄이다. 또한 그의 편지에는 고유한 흡혈성이 있다. 그것은 누이의 드러난 목을 타고 기어오르는 그레고어의 그것, 혹은 뷔르스튼 양에 대한 K의 키스이다. 그것은 마치 “마침내 찾아낸 샘에다 혀를 던져 넣는 목마른 동물”과 같은 키스다. 그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것은 오직 가족이라는 십자가와 부부라는 마늘이며 그에게 필요한 것은 누군가로부터 공급받는 약간의 피이다. 편지의 흐름은 그 피를 위한 것이다.
카프카의 편지에는 두 가지 주체의 이중성이 존재한다. 표현의 형식으로서 글을 쓰는 주체, 즉 언표행위의 주체와 내용의 주체로서 주체, 즉 편지에서 언급되는 언표 주체이다. 카프카가 악마적 내지 도착적으로 이용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중성이다. 언표주체는 피상적이며 허구적인 것이 된 모든 운동을 떠맡고 언표행위의 주체는 이 현실적인 운동을 피해간다. 이러한 두 주체의 분열, 분신(이중체)은 악마적일 수밖에 없다.
또한 편지는 언표행위의 주체에게 나타난 공포를 언표주체가 물리치도록 기능한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아무것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언표행위의 주체는 그 결백성을 입증할 수 있으며,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기 때문에 언표주체는 또한 결백할 수밖에 없다. 마지막으로 제3자인 수신인(펠리체)도 결백성이 입증된다. 결국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가 글쓰기 기계를 통해 이루어진, 오이디푸스 및 가족을 몰아내는 푸닥거리라면, <펠리체에게 보내는 편지>는 부부 관계를 몰아내는 푸닥거리라 볼 수 있다. .
하지만 이런 결백이 죄의식을 막아주지는 못한다. 여기서 엄격히 말하면 죄인은 언표주체다. 죄의식 그 자체는 겉치레로 꾸며진 외견상의 운동일 뿐이며, 그 밑에 은밀한 웃음을 감추고 있다. 실질적인 위협은 편지 쓰는 기계(언표주체)가 기계 작동자(언표행위의 주체)를 배신하는 것이다. 악마적 결백성의 위험, 그것은 죄의식이 아니라 함정이고, 리좀 안에서의 막다른 골목이며, 모든 출구를 봉쇄당하는 것이고, 모든 것이 막힌 굴이다. 결백한 악마주의의 공식은 죄의식에서 구해주었지만 계약서의 복사본이나 그 결과물인 유죄 선고에서 구해주지는 못한다.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는 이미 카프카에게는 봉쇄된 소송이고, 펠리체에게 보내는 편지는 “호텔에서의 소송”으로 돌아온다.
카프카의 글쓰기는 프루스트의 편지와 비교된다. 두 주체의 교환 내지 분열이라는 측면에서, 죄의식이 언표주체의 외견상 운동으로서 드러난다는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다. 하지만 카프카가 근접성을 몰아내기 위해 공간적인 거리를 확보하려 했다면, 프루스트는 근접성을 과장함으로써 지각 불가능한 상태, 볼 수 없는 상태에 이르고자 했다.
2. 단편 소설 – 단편소설과 동물 되기
카프카가 자기 방 안에서 한 것, 그것은 동물-되기인데, 그것이 바로 단편 소설의 본질적 대상이다. 출구를 찾는 것, 탈주선을 그리는 것은 바로 그것에 의해서이다. 동물 안에 있는 모든 것은 변신이며, 변신은 동일한 회로 내에서 동물의 인간-되기이고 인간의 동물-되기이다. 따라서 변신은 두 가지 탈영토화의 통접인데, 그 하나는 인간이 동물로 하여금 탈주하게 만들거나 복종케 함으로써 동물에게 부과하는 탈영토화고, 다른 하나는 동물이 인간 단독으로는 결코 생각할 수 없었을 출구나 탈주 수단을 인간에게 알려 주는 탈영토화이다. 여기서 두 가지 탈영토화 각각은 다른 하나에 내재하며, 다른 하나를 재촉하여 하나의 문턱을 넘어서게 만든다.
이 때의 동물-되기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으며 하는 여행이고, 오직 강렬도 안에서만 체험되고 이해되는 그런 여행이다.(강렬도의 문턱을 넘어서기) 그것은 강렬도의 지도이며 인간과 동물이 접목된, 서로 간에 구별되는 모든 상태들의 집합이다. 또한 편지와 달리 동물-되기는 언표행위 주체와 언표 주체간의 이중성을 존속시키지 않으며, 하나의 동일한 과정과 주체성을 대체하는 하나의 동일한 절차를 구성한다. 여기서 탈영토화는 그것이 아무리 느리다고 해도 확실히 절대적이다.
하지만 단편소설은 편지와는 달리 동물적 출구의 출구-없음과 탈주선의 막다른 골목과 부딪친다.(단편소설이 동물-되기가 출구 없음에 이를 때 끝나는 것은 이와 동일한 이유에서이다.) <어느 개의 연구>와 <변신>의 경우를 보자면, 그 막다른 골목은 가족이다. 동물 소설은 두 가지 대립적 현실의 긴장 속에서 사로잡혀 있으며 동물-되기는 출구를 유효하게 보여주고 탈주선을 유효하게 그려준다. 하지만 그것을 따라가거나 이용할 수는 없다.
그래서 그것을 넘어서기 위해 동물-되기는 무엇보다도 우선 분자-되기(분자화)를 지향한다. 카프카에게서 분자적인 다양성은 그 자체로 기계에 통합되거나 기계를 위한 자리를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혹은 부분들이 서로 독립적이지만 그래도 제대로 기능하는 기계적 배치로 통합되거나 통합의 여지를 만들어 내는 경향이 있다.
결국 그의 단편소설들에서 동물들은 막다른 골목에 처해 갇혀 버리고 소설은 중단되어 버린다. 그게 아니라면 모든 곳에다 출구를 만들면서 스스로를 열고 증식시키지만 이미 동물이라고는 할 수 없는 분자적 다양체와 기계적 배치에 자리를 내준다. 이 중 후자는 장편 소설의 경우에서만 제대로 다루어진다.
3. 장편 소설 – 장편소설과 기계적 배치
카프카의 많은 단편소설이 결국에는 포기한 장편 소설을 위한 시험대 내지 조각난 파편들이며 장편 소설은 끝날 수 없으며 완결될 수 없는 단편소설이 할 수 있다. 하지만 장편소설은 그것만의 일종의 법칙이 존재한다.
1) 텍스트가 본질적으로 동물-되기를 다루고 있을 때, 그것은 장편 소설로 발전할 수 있다. : 이 경우에 해당하는 것은 <변신>이다. 동물-되기에 자신을 맡긴 그레고어는 가족에 의해 재오이디프스화되며, 결국 죽음에 이른다. 가족은 관료제적 기계의 잠재력조차 메워버린다.
2) 동물-되기를 다루는 텍스트는 그것이 동물을 넘어서 장편 소설적인 배아(胚芽)를 이루는 기계적인 지표들을 충분히 포함하고 있는 경우에만 장편소설로 발전할 수 있다. : <어느 개의 연구>에서 음악적 지표들, 학문적 지표들이 동물-되기에서 포착된다. 하지만 개들은 다른 종류의 소재들을 통해서만 파악할 수 있는 어떤 것의 길로 카프카를 끌고 가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했다.
3) 장편소설의 배아를 가지고 있는 텍스트는, 카프카가 동물적인 출구를 떠올려 그것으로 끝내려고 하는 경우 포기된다. : <유형지에서>에서는 <어느 개의 연구>에서처럼 장편소설의 배아가 있는데, 이번에는 명시적인 기계와 관련되어 있다. 그런데 이 기계는 너무도 기계론적인데다, 너무도 오이디프스적인 좌표계와 결부되어 있어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한다.
4) 그것이 완결되지 않거나 끝날 수 없는 것인 경우에도, 그것의 기계적 지표들이 그 자체로 일관된 배치를 구성하는 경우에만 장편소설이 된다. : 유일하게 진실로 긍정적인 것으로 세 편의 장편소설들이다. 기계는 더 이상 기계론적이지 않고 사물화되어 있지 않으며, 아주 복잡한 사회적 배치로 존재한다. 그 사회적 배치는 개개인의 비인간적인 폭력 내지 욕망의 효과를 얻을 수 있게 해준다.
5) 역으로 명시적인 기계를 포함하는 텍스트의 경우에도, 그것이 구체적인 사회적-정치적 배치 같은 것으로 뻗어 나가는 한에서만 장편소설로 발전한다. : <유형지에서>에서처럼, 동물-되기가 계속해서 압도하는 경우뿐만 아니라 기계가 장편소설의 활력 있는 질료를 제공하는 사회, 정치적 배치로 구체화되지 못하면 장편소설은 실패한다.
편지, 단편소설, 장편소설이라는 표현의 구성요소들 간에는 항상 소통이 존재한다. 소통은 세 가지 구성요소에 속하면서 중단되지만, 각각은 그 나름의 방식으로 하나의 구성요소에서 다른 구성 요소로 넘어간다. 편지가 중단되는 것은 반송이 그것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단편소설이 중단되는 것은 장편소설로 발전하지 못하고, 출구가 막혀 있는 두 가지 방향으로 갈라지기 때문이다. 장편소설은 카프카 자신이 중단시키는데, 이는 장편소설이 끝날 수 없으며 말 그대로 무한하고 무제한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유산되지만 모든 것이 소통하는 이런 운동을 카프카는 작품으로 만들어냈다. 그는 글쓰기를 통해 매번 강렬도의 문턱을 넘어간 것이다.
또한 그의 탈주선은 그것을 모든 정치, 경제, 관료제 및 사법 장치와 연결한다. 탈주선은 그 모든 것을 흡혈귀처럼 빨아들여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하지만 가까운 미래에 닥쳐올 그런 소리를 울리게 한다.
그는 광대선언을 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차라리 그것으로 인해, 삶의 기쁨에서 기인하는 더없는 즐거운 웃음을 짓는 작가이다. 또한 그는 정치적인 작가고, 다가올 세계의 예언자이다. 왜냐하면 그는 두 개의 극을 가지고 있고, 자신이 그것을 전적으로 새로운 배치 안에서 결합할 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프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을 언표행위였다. 욕망과 함께 하는, 법과 국가, 체제를 넘어서는 언표행위, 하지만 언표행위는 언제나 그 자체가 역사적이고 정치적이며 사회적이다. 다른 모든 심급을 문제 삼는 미시 정치학이이자 욕망의 정치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