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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 사기세가 #5 - <조세가>, <위세가>, <한세가>
기픈옹달 / 2017-05-26 / 조회 1,830 

본문

조세가

 

내용이 매우 상세하다. 훗날 삼진三晉으로 불리는 조趙-위魏-한韓 가운데 가장 방대하다. 조세가에서 우선 눈이 가는 것은 조씨 고아의 이야기이다. 사건은 조순의 아들 조삭의 때에 일어난다. 조순은 진영공의 위협에서 벗어나 달아났다. 국경을 넘지도 못했는데 조천이 영공을 시해하였다. 조순은 자리로 돌아온 뒤에도 조천을 벌하지 않았다. 사관은 정경이 되어 역적을 토벌하지 않는다며 조순이 군주를 시해했다고 적었다. 

 

훗날 도안고는 이 일에 원한을 품고 조씨 일족을 죽일 계획을 세운다. 한궐이 이 사실을 먼저 알고 조삭에게 알리나 조삭은 도망가지 않는다. 조씨 가문에 화가 미치리라는 점괘를 받아보고는 도리어 자신이 화를 입고 자손이 화를 피하게 하려는 까닭이었다. 어머니 속바지 속에 숨어 죽임을 피했으며, 목숨을 걸고 자신을 지켜준 가신까지 조씨 고아에 얽힌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진경공 때에 조씨 고아 조무는 조씨의 세력을 회복한다. 조씨 가문이 다시 크게 세력을 떨치는 것은 조무의 손자 조앙, 즉 조간자에 이르러서다. 조간자는 병이 들어 닷새 동안 사람을 알아보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때 조간자를 진찰했던 것이 편작! 그는 조간자가 상제를 만나고 있으니 곧 깨어날 것이라 말한다. 실제로 조간자는 깨어나 자신의 가문에 얽힌 예언을 기록하여 고이 간직한다. 믿거나 말거나.

 

조간자는 공자와 얽힌 이야기로도 유명하다. 공자는 조간자가 군주의 허락 없이 조오를 죽였다며 <춘추>에 ‘조앙이 진양을 거점으로 삼아 모반했다(趙鞅以晉陽畔)’고 적었다. 그러나 <사기>에서 그리는 조간자는 곧은 소리에 귀를 기울일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는 양호(양화)를 받아들였으며, 위나라 태자 괴외를 다시 위나라로 돌려보내기도 했다. 여러모로 공자와 맞지 않았다. 조간자의 아들, 조양자 조무휼은 한씨, 위씨와 함께 지백을 꺾고 진나라를 셋으로 나누어 가진다. 

 

무령왕은 호복을 입고 북방 영토를 안정시키는 것은 물론 기사騎射를 배워 다른 나라를 상대하고자 한다. 그러나 반대하는 소리가 적지 않았다. 

 

臣聞中國者 蓋聰明徇智之所居也 萬物財用之所聚也 賢聖之所教也 仁義之所施也 詩書禮樂之所用也 異敏技能之所試也 遠方之所觀赴也 蠻夷之所義行也 今王捨此而襲遠方之服 變古之教 易古人道 逆人之心 而怫學者 離中國 故臣願王圖之也

 

무령왕의 숙부 조성은 중국, 중원과 오랑캐, 즉 만이蠻夷의 차이를 들어 반대한다. 중원은 수준 높은 문물을 지닌 곳으로 사방 오랑캐가 본받고자 하는 곳이다. 그런데 거꾸로 중국이 오랑캐의 것을 본받으려 하다니 가당한 일인가? 

 

그러나 무령왕은 실용적 입장에서 접근한다. 의복이란 편한 것이 제일이다. 게다가 습속이란 풍속을 따라 제정해야 하는 것이다. 지역마다 시대마다 어찌 문화와 습속이 똑같을 수 있을까? 도리어 습속이란 하나로 통일시킬 수 없는 것 아닌가?

 

夫服者 所以便用也 禮者 所以便事也 聖人觀鄉而順宜 因事而制禮 所以利其民而厚其國也 … 鄉異而用變 事異而禮易 是以聖人果可以利其國 不一其用 果可以便其事 不同其禮 儒者一師而俗異 中國同禮而教離 況於山谷之便乎 故去就之變 智者不能一 遠近之服 賢聖不能同 窮鄉多異 曲學多辯 不知而不疑 異於己而不非者 公焉而眾求盡善也 今叔之所言者俗也 吾所言者所以制俗也 

 

숙부 조성을 설득했으나 다음은 신하들의 반대. 신하들은 옛것의 편함을 주장하며 호복을 반대한다. 이에 무령왕은 하왕조와 은왕조의 예를 들어 옛 예법을 꼭 지킬 필요가 없다 주장한다. 만약 옛 예법이 그리 중요한 것이었다면 하와 은이 망한 것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어지는 지적은 더 날카롭다. 만약 괴상한 의복을 입었다고 괴상하게 행동한다면 유자儒者가 많은 추노鄒魯에는 기이한 인물이 없을 것이다. 더불어 오월吳越에서는 빼어난 인물이 나올 수 없을 테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무령왕의 이 말을 만약 공자가 그의 말을 들었다면 무어라 말했을지 궁금하다. 

 

故禮也不必一道 而便國不必古 聖人之興也不相襲而王 夏殷之衰也不易禮而滅 然則反古未可非 而循禮未足多也 且服奇者志淫 則是鄒魯無奇行也 俗辟者民易 則是吳越無秀士也 且聖人利身謂之服 便事謂之禮 夫進退之節 衣服之制者 所以齊常民也 非所以論賢者也 故齊民與俗流 賢者與變俱 故諺曰 以書御者不盡馬之情 以古制今者不達事之變 循法之功 不足以高世 法古之學 不足以制今

 

결국 무령왕은 호복을 도입하고 크게 세력을 떨친다. 그렇게 훌륭한 인물이었던 그도 말년이 좋지 않았다. 문제는 왕위 계승 문제. 그는 총애하던 혜후 오왜의 아들을 일찍 왕으로 삼고 자신은 스스로 주보主父라 부르며 자리에서 물러난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첫째 아들이 왕이 되지 못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 땅을 떼어 그를 또 왕으로 삼으려 한다. 한 나라에 두 왕을 만들려 한 것.

 

결과적으로 나라에 난이 일어나고 첫째 아들은 상처를 입고 주보의 궁에 들어와 죽는다. 주보는 첫째 아들의 죽음을 지켜보았을 뿐만 아니라. 포위한 군대가 물러나지 않아 참새 새끼들까지 잡아먹다 석 달만에 굶어 죽는다. 호복을 입고 말에 올라 이웃 나라를 호령하던 인물의 최후라기엔 너무 초라하다. 

 

이후 조나라는 진나라와의 싸움에서 많은 피해를 입는다. 가장 큰 피해는 장평전쟁. 한나라의 상당 땅을 받아들인 대가였다. 일찍이 평양군 조표는 까닭 없는 이익은 재앙이 된다고 경고하였다. 그러나 평원군 조승은 그와 반대로 찬성한다. 장평의 패배는 수도 한단이 포위되는 데까지 이른다. 이때 조를 구하기 위해 활약한 인물이 신릉군, 춘신군 등이다. 이후 이목과 같은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기는 하나 진의 세력을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위세가

 

위환자는 조양자, 한강자와 더불어 지백을 죽이고 진을 셋으로 나누어 가졌다. 그의 손자 위문후는 여러 인재를 불러 모았는데 그 가운데는 공자의 제자 자하가 있었다. <사기>에 따르면 위문후는 자하에게 경전과 육예를 배웠다 한다. 그런가 하면 위무후의 아들 위문후는 오기를 등용하여 제나라를 치기도 했다. 

 

위무후의 아들 위혜왕은 위나라 군주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다. 결코 좋지 않은 의미로. 위혜왕은 조나라의 한단을 포위하여 함락시키나 제나라의 원군을 맞아 패한다. 이때 제나라의 군대를 이끌고 온 것이 전기와 손빈. 손빈과 방연의 관계에 대해서는 <손자오기열전>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후 위나라는 손빈을 앞세운 제나라 군대를 맞아 크게 패하는데 이것이 그 유명한 마릉전투이다. 제나라에 패한 것도 억울한데 혜왕은 서쪽으로는 진나라의 공격에 시달린다. 이때 진나라의 군대를 이끈 것이 위나라 출신, 상군이었다. 그의 활약은 <상군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위혜왕은 결국 여러 인재를 끌어 모아 새롭게 나라를 이끌고자 한다. 이때 맹자가 위나라에 온다. 그러나 이미 위혜왕은 나이가 많았다. 맹자가 온 것은 위혜왕 35년, 이듬해 위혜왕은 세상을 떠난다.

 

惠王數被於軍旅 卑禮厚幣以招賢者 鄒衍 淳于髡 孟軻皆至梁 梁惠王曰 寡人不佞 兵三折於外 太子虜 上將死 國以空虛 以羞先君宗廟社稷 寡人甚丑之 叟不遠千里 辱幸至獘邑之廷 將何利吾國 孟軻曰 君不可以言利若是 夫君欲利則大夫欲利 大夫欲利則庶人欲利 上下爭利 國則危矣 為人君 仁義而已矣 何以利為 

 

<사기>에 실린 위혜왕과 맹자와의 대화는 <맹자> 첫머리에 실려 있다. <맹자>를 펼치면 나오는 하필왈리何必曰利의 이야기가 바로 이 대목이다. 위혜왕은 도읍을 대량大梁으로 옮겨 <맹자>에서는 양혜왕으로 기록되어 있다. 덧붙이면 장자에 나오는 혜시도 위혜왕의 신하였다. 그래서 일부 학자는 <장자> 포정해우 고사에 나오는 문혜군이 위혜왕이 아닐까 추정하기도 한다. 여러모로 다양한 사건, 인물과 연관되어 있는 셈.

 

신릉군 위무기는 진의 공세를 맞아 이웃나라, 초나라 조나라 등과 연합하여 진의 공세를 막자고 제안한다. 그러나 진의 다양한 모사들이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았으며, 나름의 복잡한 나라 간의 정세도 힘을 합쳐 진을 상대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결국 신릉군 사후 위는 진에게 멸망당하고 만다. 훗날 황제에 오르는 한고조 유방은 신릉군을 그리 사모했다 한다. 식객을 두텁게 대우하는 것은 물론, 의협의 정신을 지닌 인물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는 <위공자열전>에 실려 있다.

 

한세가

 

조나라, 위나라의 기록에 비하면 매우 간결하다. 신불해와 한비자의 나라 치고는 그리 주목할만한 사건이 많지 않다. 당대의 상황도 조세가나 위세가를 참고하는 것이 훨씬 도움이 된다.

 

소후는 신불해를 신하로 맞아 나라를 이끌었다. 그 결과 한나라는 부강해졌다. 그러나 신불해 사후 그는 가뭄이 들었는데도 높은 성문을 쌓는다. 이를 보고 굴의구가 한마디 한다.

 

昭侯不出此門 何也 不時 吾所謂時者 非時日也 人固有利不利時 昭侯嘗利矣 不作高門 往年秦拔宜陽 今年旱 昭侯不以此時卹民之急 而顧益奢 此謂 時絀舉贏

 

시출거영時絀舉贏, 어려운 때에 사치스러운 일을 벌인다. 역사를 보면 어지러운 상황에 도리어 무리한 일을 진행하여 큰 화를 입는 일이 왕왕 있다. 결국 소후는 굴의구의 말처럼 그 문을 통과해 보지 못하고 죽는다. 

 

신불해 이후 한나라의 인재로는 한비자가 있었지만 진나라가 한나라를 공격하자 한나라 왕은 한비를 진나라에 사신으로 보낸다. 그러나 한비는 다시 한나라로 돌아오지 못하고 진나라의 옥에 갇혀 죽는다. 사마천은 그가 진의 감옥에서 <한비자>의 일부를 썼다고 말한다. 한비자를 시기하여 죽음으로 몰고 간 인물은 이사. 그 둘은 순자의 제자였지만 결국 길이 달랐다. 이들의 이야기는 <노장신한열전>과 <이사열전>에 기록되어 있다. 

 

한비가 진에서 목숨을 잃은 후, 몇 해 지나지 않아 한은 진에게 멸망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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