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즈마 히로키 4장 중반부 후기 +1
아즈마
/ 2017-05-27
/ 조회 1,898
관련링크
본문
아즈마 히로키, 4장 존재론적 우편적(중반부) 후기
이번 스터디는 아즈마에 대한 비판 몫을 맡아 오신 혜원 선생님이 결석하셔서 최원 선생님의 해설 중심으로 토론이 이루어졌습니다.
①정신분석이 일반이론의 차원에서 규명되는 데는 실패했다는 알튀세르의 입론과 관련해서 국지이론과 일반이론이라는 범주를 설명했습니다. 정신분석은 정신분석의 고유한 대상인 무의식을 발견함으로써 국지이론으로 정착했으며, 이것을 다른 분과학문과의 체계적 연관 속에서 설명할 때 일반이론이 성립할 수 있다고 합니다. 라캉의 명제 “무의식은 언어처럼 구조화되어 있다”는 ‘정신분석+언어학’이라는 차원에서 평가할 수 있는데 일반이론으로 구축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고 합니다.
②아즈마가 초기 데리다 후기 데리다를 구분하고, 초기를 괴델적 탈구축 시기로 도식화한 데 대해서 반증할 근거로 글쓰기와 차이 시기의 「글쓰기와 무대」가 있다고 합니다. 괴델적 탈구축을 초기 데리다의 틀로 볼 수 없다고 합니다.
③아즈마는 프로이트가 ‘사물표상+언어표상’으로 이루어진 의식과 ‘사물표상’만으로 이루어진 무의식(꿈)이라는 개념을 경유해서 데리다의 우편적 탈구축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아즈마는 프로이트가 꿈-작업, 무의식은 ‘형식결정’이라고 강조한 점을 간과하고 있다고 합니다.
④ 아즈마는 부정신학이라는 혐의로 (하이데거를 비롯해서) 라캉을 비판합니다. 이에 대해서 라캉-데리다의 논점을 아즈마가 잘못 이해한 것은 아닌가 의문을 표합니다. 라캉이 근본적으로 억압된 것으로서의 편지가 쪼개지지 않는다고 보았고 데리다는 편지가 쪼개진다고 보고 편지의 복수성을 제기한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이때 둘 사이의 쟁점은 부정신학이 아니라 팔루스-로고스 중심주의입니다. ‘은유 형성’이 이루어지면 필연적으로 편지 혹은 문자가 작동하고 성공적 치료가 보장된다는 것이 라캉의 입장이고 이에 대한 의심을 기입하는 것이 데리다의 입장입니다.
⑤ 더 나아가 (데리다도 인정하는데) 후기라캉은 은유 형성의 필연적 법칙을 부정하게 되면서 데리다의 입론과 수렴하게 됩니다.
⑥마지막으로 은유형성의 차원을 루이스 캐롤과 아르토에 대한 들뢰즈의 논의와도 일관되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최원 선생님은 소수문학, 천의 고원은 확인해 보지 않았다고 전제하시고 의미의 논리에 한정해서 설명합니다.) 의미의 논리는 의미의 정적 발생의 차원에서 ‘합성어’를 통한 루이스 캐롤, 동적 발생의 차원에서는 음소적 조각들을 통해서 의미의 발생이 가능하다는 점을 짚고 있다고 합니다. 이때 동적 발생은 라캉이 음소차원에서 은유 형성을 해명하는 것과 상동합니다.
한편 조이스의 생톰에 대해서도 설명합니다. 아버지의 이름이 아니라 아버지쪽으로의 도착을 통해서 즉 은유 형성의 필연적 법칙이 성립하지 않을 때 예외적으로 무한히 은유생성을 해내는 강자에게서 가능한 방식이라고 합니다. 조이스와 달리 조이스의 딸은 미치게 되는 것처럼 일반화할 수 없는 경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추가적으로 데리다는 차이들이 기록되는 무의식을 강조하고 프로이트는 그게 맞아들어가지 않는 부분이 ‘성’이라고 보는데 이에 대해서 데리다는 ‘성이 그렇게 중요해? 그렇지 않다’라고 하는 식으로 넘어간다고 합니다. 이는 데리다와 프로이트의 논점이 될 듯한데 자세한 설명은 추후 더 생각해봐야겠습니다. 데리다는 무의식을 성적인 것이라기보다 애도로 본다고 합니다. 죽음, 유령성 등? 프로이트의 애도와 우울증, 벤야민의 독일 비애극 등을 생각해 볼 수 있고 아무튼 데리다는 애도가 끝날 수 있느냐? 멜랑콜리가 더 윤리적이다는 입장이라고 합니다. 이는 아마 끝낼 수 있는 분석(자아분석)과 끝낼 수 없는 분석(이드 분석)의 차원과도 관련이 있을 듯합니다.
댓글목록
최원님의 댓글
최원김익균 선생님이 정리를 아주 잘하신 것 같습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추가로 데리다가 프로이트의 논의에서 성적인 것에 대한 논의를 회피하고 오직 에크리튀르의 문제로만 평면화시키고 있는 면이 있어서 그 부분에 대해 제가 문제제기를 했었고, 희음 선생님이 데리다가 그렇게 했다고 할지라도 프로이트의 어떤 면을 특화시켜서 발전시키는 것은 괜찮지 않을까 하는 반론이 있었지요. 사실 세미나가 끝나고 좀 이 문제를 생각해 봤는데, (아즈마 히로키의 주장과는 달리) 라캉 자신은 성적인 것을 무시하지는 않지만 그것을 기표의 문제로서만 바라보려고 하고 있다는 점에서 (예컨대 라플랑슈보다는) 데리다와 조금 더 수렴하는 입장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데리다는 성이라는 문제를 아예 논외로 하는 경향이 있다는 문제는 여전히 있습니다. 이 문제는 저로서는 참 어려운 문제이긴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성 없는 프로이트가 가능할까요? 또는 성을 기표의 문제로만 바라볼 수 있을까요? 늘 제가 이 문제를 맴돌면서도 확실히 생각이 정리가 안 되었는데, 이번 세미나에서도 역시 비슷했던 것 같네요. 계속 고민을 하게 될 듯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