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5. 내재성과 욕망
이니
/ 2017-06-01
/ 조회 9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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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프카, 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
5. 내재성과 욕망
2017.05.31.
선과 법의 관계란 칸트 이전에 있어서는 선이 먼저, 그리고 선을 형식화한 것을 법이라 여긴 것이 통상적인 관념이었으나 칸트는 이 관계를 역전시켜 보편적 형식, 즉 법에 의해 선이 규정된다고 보았다. 그러나 카프카가 하려는 작업은, 칸트가 역설한 법의 관념과 같이 초월적이고 불가해한, 그리하여 그 앞에서 그저 무력함을 드러내려는 것이라기보다는, ‘법적 기계가 작동하는 메커니즘을 분해’(104)하는 것이었다고, 저자들은 말한다.
카프카 작품에 나타나는 법은, 그 누구도 내부에 대해서는 알 길이 없이, 선고를 통해서만 드러날 뿐이고, 선고는 형벌로써만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는 죄의식과는 다르다. 죄의식은 인식과 사변의 영역으로 어떤 선험성이 존재해야 하지만, 법은 실천의 영역으로, 언표됨으로써만 결정되는 현실에 해당한다. 장편 《소송》은 이 주제를 다루지만, 이것이 곧 K가 분해하고자 했던 바로 그것이다.
분해의 최초의 국면은 ‘죄의식에 관한 모든 관념을 선험적으로 제거하는 것’(107)으로부터 시작된다. 죄의식은 단지 K의 실질적 행위를 묶어두기 위한 표면적인 운동일 뿐이다. 그 다음 국면에서 K는 법이 그 자체로 초월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언표하는 것에 내재하는 권력의 이름으로, 언표가, 언표행위가 법을 만드는 것’(108)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카프카 해석 중 ‘법의 초월성, 죄의식의 내면성, 언표행위의 주체성’은 빼놓을 수 없는 재료이지만 그것이 은유나 상징으로서의 주제의식으로 해석되기 보다는 ‘그것이 어떻게 기능하는지’(108)에 주목하는 것이 의미 있을 것이라 저자들을 주장한다. 물론, 그러나 여기에서 또 다시 중요한 것은 ‘의미’가 아니다.
위에 언급한 재료들은 실제 표면적 운동을 진행시키기에 필수적이나 그 안에 숨은 의미가 있다고 해석하거나 주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글쓰기 기계의 세 가지 중요한 톱니바퀴인 편지-단편 소설-장편 소설’(109)를 통해 드러나며, 세 종류의 글들은 그 장르만의 주된 정서 내지는 인상을 가지고 있다. 편지의 경우는 죄의식이 아닌 공포를, 단편 소설은 탈주를, 장편의 경우에는 감정, 기분이다. 따라서 앞서 말한 ‘법의 초월성, 죄의식의 내면성, 언표행위의 주체성’은 ‘분자적인 운동과 기계적 배치를 보여 주기 위해 실험을 이끌어 가야 하는 분해의 지점’(109)을 표시하는 재료들에 불과하다.
이어서 저자들은 카프카에 대한 ‘현실주의적 및 사회적 해석을 지지’(110)해야 한다고 말한다. 부정신학보다는 소수적인 것에 대해, 내면 안으로 침잠하기 보다는 외부 세계에 대한 비판으로 말이다. 그의 작품들 속에서 그는 ‘’세상 밖으로‘ 탈주하지 않는다. 차라리 거기서 그는 세상과 그 표상을 탈주케 하려’(111)했고, ‘세상의 탈영토화를 작동시킨다.’(111) 다시 말해, 낯설어진 세계관 자체가, 비-해석을, 탈영토를 가능케 하는 게 아닐까.(어쩌면 《성》과 같은 카프카 작품 속의 세계관과 구체적 지명이 그토록 이질감이 든 이유가 이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카프카의 글쓰기는, 첫째로 배치하되 비-해석의 방향으로, 둘째로는 낯선 배치를 통해 기존 배치를 분해하는 이중적 기능을 한다.
우선 단편 소설에서는 ‘기계적 지표들’ 혹은 그 반대의 경우인 ‘추상적 기계들’의 방식으로 나타난다. 전자는, 배치의 구성품에 대해서는 알 수 있지만 어떻게 배치되는지 알지 못하고, 심지어 부품들이 배치의 작동자인 순간에도 배치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는다. 동물-되기, 동물 소설에서 주로 쓰이며, <변신>에서의 인물, 대상, 인물 간 삼각형 구도 등이 이런 기계적 지표들에 해당한다. 후자는, 부품들이 조립된 채 출현하지만 제대로 혹은 더 이상 기능하지 않는다. <유형지에서>에 등장하는 처벌하는 기계가 그 예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하는 기계가 뒤떨어져 보이는 이유는 근대적 법과 대조되어서가 아니라 단지 일반적 법이 추상적 기계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편에서의 이러한 요소들이 장편으로 나아가지 못하도록 만드는데, 배치를 다루지 못하고 단지 기계적 지표들만을 다룬다거나, 추상적 기계들이 등장하면서 전개가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기계적 배치’는 따라서 장편 소설의 영역이다. 기계적 지표들은 동물적이기를 멈추고 증식하며, 추상적 기계들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고, 배치 속에서, 분해를 통해서 기능한다. 여기서 분해의 방법은 단순히 표상의 비판이 아니라 탈코드화, 탈영토화에서, 가속하며 이루어진다.
기계적 배치의 특징이라고 한다면, ‘카프카의 해석이나 사회적 표상이 아니라 실험, 사회-정치적 기록을 제시하는 것이다.’(117) 이런 배치는 어떻게 기능하는가? 《소송》에서 모든 것은 잘못 배열되어 있으며, 인물들은 엉터리이지만, 이런 거짓도 얼마든지 힘을 발휘한다. 그러나 문제적인 것은, 사법이 거짓이든 아니든 ‘그것이 가지는 욕망적인 성격’(118)이다. ‘사법은 욕망이지 법이 아니다.’(118) 필연이 아닌 우연이며, 안정적 의지가 아닌 불안정한 욕망이다. 카프카의 장편에서 인물들이 종잡을 수 없었던 이유는, 그런 욕망들이 다의적(양가적)이기 때문이다. 사법은 억압하는 자는 물론 억압당하는 자의 욕망이기도 하다. 그리고 여기서 주목되고 채택되는 것들이란, ‘욕망과 그것의 우연성을 실험하는 모든 미시-사건들’(121) 즉, 무대 뒤편, 뒷문, 옆방에서 벌어지는 분자적인 동요다. 법은 ‘당사자들’과 관련하여 생각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작 중요한 일들을 위와 같은 공간에서 발생하며, ‘거기서 우리는 욕망과 권력의 진정 내재적인 문제들 및 ’사법‘의 실질적인 문제들과 만난다.’(122) K는 자신의 실험을 통해 사법의 문제들을 드러내게 되는데, 그는 사법-기계의 부품에서 다른 부품으로 나아가며, 그것의 욕망을 따라가면서 (욕망의 인접성) 사법을 발견한다. 법은 그 자체로 초월적인 것 같지만, 그것은 ‘배치의 내재성 안에서’, 언표되는 한에서 초월적일 뿐이다.’(124) ‘사법이란 이처럼 가변적인 한계를 가지고 언제나 치환되기 마련인 욕망의 연속체인 것이다.’(124)
‘화가 티토렐리가 무제한 연기라는 이름으로 분석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과정, 이 연속체, 이 내재성의 장이다.’(125) 티토렐리는 명확한 무죄 방면, 외관상 무죄 방면, 무제한 연기라는 세 가지 가능성을 제시하는데, 애초에 명확한 무죄 방면은 가능하지가 않다. 그것은 욕망의 소멸을 뜻하기 때문이다. 두 번째 가능성인 외관상 무죄 방면은, 그러나 사실상 무제한 연기로 진입하는 방법에 다름 아닌데, 법의 추상적 기계에서 빠져나와 ‘탈코드화된 법과 탈영토화된 욕망의 상호적인 내재성 속으로 들어간다.’(126)
카프카의 작품에서 죄의식과 결백은 주된 문제가 아니다. 오히려 연기야 말로 ‘유한하지만 무제한적이고 연속적’(127)이다. 초월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선분성에 의해 작동하기 때문에 유한하며, 서로 인접하여 선분에 선분을 부가하기 때문에 무한하다. 연기는 차라리 능동적이다. ‘연기는 과정 그 자체고, 내재성의 장을 따라 그려지는 것이다.’(1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