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_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1∼2장 후기 +3
namu
/ 2017-05-14
/ 조회 1,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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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프카_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1∼2장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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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정치적인 사람이며, 기계 사람이고 실험적인 사람이다.”_들뢰즈
『카프카_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첫 번째 세미나를 앞두고 저의 심정은 우려 반 호기심 반이었습니다. 마침 『천의 고원』 세미나를 마친 마당이어서, 저는 그렇다면 준비운동은 어느 정도 한 것이 아닐까하는, 내심 흐뭇한 기분이었던 것이죠. 들뢰즈가 "철학이란 개념들을 창출해내는 학문이다."라고 말했듯이 온갖 고원에 출몰하는 유령같은 기괴한 개념들로 인해 어지간히 골머릴 쥐여짠 터였으니 말입니다. 그런데도 아무런 효과를 보지 못한다면, 그런 낭패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그러나 다행이도 이런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카프카_소수적인 문학을 위하여』 는 들뢰즈의 철학적 개념들을 다른 장(문학)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가에 대한 매우 탁월한 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한마디로 이 두 책의 접속은 매우 아름다운 ‘결혼’이었던 것입니다.
카프카의 작품에는 아시다시피 수많은 동물들이 등장합니다. 언뜻 이들 동물로 인해 우리는 교훈적인 알레고리나 고상한 상징, 정신분석과 관련된 원형原型 등을 떠올리고선 해석의 충동을 억누를 길 없겠지요. 하지만 카프카에게 동물들은 이러한 의미화나 기표화가 아닌 코드화되고 영토화(또는 재영토화하는)된 현실을 탈코드화하고 탈영토화기 위한 출구로서의 동물-되기란 것입니다.
<<‘악마적 세력들’의 비인간성(l’inhumain)에 대해 동물-되기의 하위-인간성(le subhumain)이 응수한다. 고개를 숙이고 관료나 감시인, 판사나 피고로 남기보다는 차라리 곤충・개・원숭이가 되는 것, “망설이면서도 처음으로 고개를 들이미는 것”이 낫다는 것이다.>>
카프카의 작품에는 의미를 찾기 위한 수많은 입구(사실 너무 많아 의미를 찾을 수 없는)가 있는 듯 보입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말합니다. “복수複數 입구의 원칙은 적들의 침입이나 ‘기표(signification)’를 막는 것이고, 사실은 실험적으로만 제시될 뿐인 작품에 대해 해석하려는 시도를 봉쇄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일단 무모하게 작품을 해석하려는 시도를 포기해도 괜찮을 듯 합니다. 들뢰즈는 다만 카프카의 작품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 임의적으로 <성>의 첫 부분을 입구로 삼습니다.
“K는 턱이 가슴에 파묻힐 정도로 고개를 숙인 수위의 초상화를 발견한다.”<<성>>
여기서 들뢰즈는 ‘숙인 고개’라는 내용의 형식과 ‘사진-초상화’라는 표현의 형식에 주목합니다. 그리고 다시 ‘치켜든 고개’와 ‘음악적-소리’라는 두 개의 형식을 끄집어냅니다. 우리는 내용의 형식[숙인 고개-쳐든 고개] 사이에서 표면적으로 의미화하는 이항적 관계(가령 복종-저항)를 떠올릴 듯도 합니다. 그러나 ‘소리’에 대해 그렇게 말할 수 없습니다. 카프카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의 붕괴와 관련된 강렬하고(intense) 순수한 음향적 질료로서, 탈영토화된 음악적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카프카의 작품들에 줄곧 등장하는 소리는 의미화나 구성[작곡]을 비켜 가는 비명 소리며, 여전히 지나치게 기표적인 연쇄에 저항하는 단절된 그런 소리, 오직 강렬도만이 중요하고 표현의 비형식화된 질료로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런 개괄적인 논의를 바탕으로 이제부터는 흥미로웠던 지점들을 단편적으로 재정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 <<성>>의 종탑 이미지는 유아기의 추억인가?
우리는 흔히 유년시절의 추억하면 당시의 기억을 미화하는 한편, 거기에 집착하며 고착되는 퇴행의 모습을 보이지요. 이는 다시 말해 현재의 삶을 재영토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들뢰즈는 말합니다. “종탑은 유아기의 추억이 아니라 유아기의 블록처럼 작용하고, 욕망을 정형화된 무언가에 포개는 대신 그것을 치솟게 하며, 시간 속에서 그것을 치환하고 탈영토화하고, 욕망의 접속을 증식케 하며 욕망으로 하여금 다른 강렬도를 통과하게 만든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차라리 널리 퍼져 가는 종탑의 순수하고 강렬한 소리다.” “여기에서 유아기의 블록(아이-되기)은 유아기를 구성하던 요소들을 토해 현재 주어진 것을 변형시키고 탈영토화하는 것이며, 현재와는 다른 강렬도의 분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이진경) 그리하여 들뢰즈는 이런 결론에 이릅니다. “음악은 언제나 분해 불가능한 아이-되기나 동물-되기 속에서 시각적 추억과 대립되는 음향적 블록을 취하는 것처럼 보인다.”
▣‘성’_욕망의 또 다른 이름
“길은 마치 일부러 그러기라도 하는 듯 구불구불했다. 그래서 성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거리는 아직도 좁혀지지 않고 있었다.”<<성>>
<<성>>의 의미심장한 한 대목입니다. 성에 이르는 ‘구불구불’한 길은 욕망의 도정이자 욕망 그 차체가 아닐까요? 굴에서 또 다른 굴로 접속하는 리좀이요, 부단한 탈영토화의 몸짓이 아닐까료? 들뢰즈는 말합니다.
“욕망은 형식이 아니라 과정(processus)이자 소송(procès)이다.”
욕망은 지평선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한 발 다가가면 그 만큼 멀어져가는---영원히. 그렇다면 다가가는 발걸음은 허무(무의미)한 것일까요? 노우! 삶은 생산하는 욕망, 끊임없는 탈영토화의 놀이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영어에서 “process”란 단어는 ‘소송, 과정(절차)’란 의미가 있는데, 독일어의 “Prozess”도 마찬가지이며(카프카의 <<소송>>의 원제는 <<Der Prozess>>), 프랑스어에서도 “procès”가 두 가지 의미가 있지만 들뢰즈는 ‘과정’이란 뜻은 엣 문어에서 쓰였음을 감안하여 오늘날의 “processus(과정)”란 말로 기지를 발휘한 듯.)
▣우주의 오이디푸스화
“카프카는 사랑하는 아버지를 증오하고 고발하며 유죄라고 선언하는 신경증적 유형의 고전적 오이디푸스로부터, 결백한 아버지의 가설, 아버지와 아들에 공통된 ‘고뇌’라는 가설에서 움직이는 훨씬 더 도착적인倒錯的인 오이디푸스로 나아간다. 이는 n번씩 거듭 고발하기 위한 것이고, 편집증적 해석의 계열을 통해 어디라고 말하거나 (<<소송>>에서 ‘〔무제한의〕 延期’처럼) 어디로 제한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비난을 퍼붓기 위한 것이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에서 아버지는 ‘악마적 세력들’에 의한 자신의 복종을 자식에게 되물림하는 복종의 화신이자 비겁한 폭군, 영원히 저항해야 하는 적입니다. 들뢰즈는 이에 대해 “오이디푸스 위로, 혹은 가족 안으로 재영토화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 속으로 오이디푸스를 탈영토화하는 것. 그런데 이를 위해 오이디푸스를 어이없는 웃음이 터져 나올 정도로 과장하여 써야 했”다고 말합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저는 들뢰즈의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독해를 전적으로 인정하지는 않습니다. 이번에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5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를 떠올리고선 가슴이 복받칠 정도로 속으로 흐느끼며 불초한 내 자신을 돌이켜보았으니까요. 저 자신만의 감정일까요? 그런 점에서 들뢰즈의 독해는 단장취의 [斷章取義]적인 저 자신의 논리를 위한 확대해석이 아닐까하는 의구심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카프카 작품을 이해하는 새로운 지평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일단 그의 말에 귀기울이기로 했습니다.
카프카에게 중요한 것은 언제나 복종과 대립되는 의미에서의 자유가 아닙니다.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에는 이런 말이 있지요.
댓글목록
namu님의 댓글
namu
(잘려서 여기 나머질 옮겨놓습니다)
"자유가 가장 숭고한 감정에 속하는 것처럼, 그에 상응하는 기만 역시 가장 숭고한 감정에 속합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자유를 원치 않았습니다. 단지 하나의 출구만을 원했습니다.”
카프카에겐 가능한 한 덜 중심화되고 덜 의미화한 그런 출구를 찾는 것이 일종의 화두였습니다. 아버지와의 문제 역시 오이디푸스적 문제를 해결하고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니라 아버지가 찾지 못했던 길을 어떻게 찾아낼 것인가가 중요했던 것이지요. 꽉 막힌 우주에 만인이 자유롭게 숨쉴 수 있는 굴을, 구멍을 뚫는 것이지요. 따라서 카프카의 작품세계에서 한정된 공간이나 가족(<<변신>>) 내에서 벌어지는 일들(이를 미시정치적 측면이라면)은 “카프카 안에서 고통스러워하거나 즐거워하는 것은 초자아인 아버지도 아니고, 어떤 기표도 아니다. 그것은 이미 미국적인 기술 지배적 기계고, 러시아적인 관료제적 기계, 혹은 파시즘적인 기계다.”라는 들뢰즈의 말에서처럼 거시정치와 한몸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이런 뜻에서 우리는 “작가는 글을 쓰는 사람이 아니라 정치적인 사람이며, 기계 사람이고 실험적인 사람이다.”는 들뢰즈의 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동물-되기; 탈영토화
“탈영토화의 흐름의 통접은 언제나 영토적인 모방을 넘어선다. 오르키데가 말벌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이미지를 지니지만 , 훨씬 더 심오하게 자신을 탈영토화는 것도 이런 방식으로서이다. 이와 동시에 말벌 역시 이번에는 오르키데와 짝을 이뤄 자신을 탈영토화시킨다. 이는 코드의 파편들을 포획하는 것이지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의 이 문장의 의미는 <<학술원에 드리는 보고>>를 통해 구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작품은 인간이 된 원숭이에 관한 이야기인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원숭이의 인간-되기에 관한 것입니다. 출구를 찾는 문제는 단지 탈주하기 위한 것만도 아니고, 또한 도망은 공간 내에서 불필요한 운동이라는 이유로, 자유의 기만적 운동이라는 이유로 거부됩니다. 탈주가 긍정되는 것은 역으로 앉은 자리에서 하는 탈주, 강렬도적인 탈주로서입니다. “인간들을 모방하고 싶다는 유혹은 없었습니다. 저는 출구를 찾으려고 했기 때문에 모방하였을 뿐, 어떤 다른 이유도 없었습니다.”
다시 말해 오르키데가 말벌의 이미지를 재생산하는 것은 말벌을 유혹하여 자신의 꽃가루를 상대에게 묻혀 종족을 보존하기 위한 것만이 아닙니다. 더 중요한 것은 오르키데라는 식물의 말벌(동물)되기, 탈영토화입니다. 또한 말벌의 식물되기, 쌍방의 탈영토화란 점이지요.
다음 세미나가 무척 기대되네요!!!
*저자들의 인용문에서 들뢰즈/가타리를 편의상 들뢰즈로 통용한 점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주호님의 댓글
주호
들뢰즈의 텍스트가 녹녹치 않다는 건 이미 천의고원 때도 느꼈던 바였죠. 그래도 이 책은 분량이 적은 편이라 다행이랄까요.
친절한 각주들 덕분에 읽어나가기가 아주 어렵지는 않았어요. '소송'과 '성'을 읽으며 저는 그동안 '해석'을 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서인지 본문의 '이것은 해석이 아니다'라는 저자들의 말이 더 크게 와 닿은 것인지도^^
후기 감사합니다. 그럼 다음 시간에 뵙겠습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 자료 업로드시 텍스트 잘림현상에 대한 대처 ]
한글.워드문서를 복사해서 홈페이지에 붙여넣을 때, 텍스트가 부분만 나타나는 잘림현상이 생깁니다.
그것은 한글.워드문서에서 웹문서로 변환되는 과정에서,
한글.워드문서의 속성(밑줄, 볼드, 크기)들이 웹문서의 html태그로 변환되어 용량을 차지하기 때문입니다.
이 경우 한글.워드문서의 텍스트를 복사해서 -- 메모장에 붙였다가 다시 복사해서 -- 홈페이지에 올리면,
원본문서의 속성들이 지워지면서 잘림현상이 해소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우리 홈페이지 개발도구인 그누보드가 적절한 대처법이 없는 듯합니다. 그누보드는
무료료 제공된 오픈소스이므로, 우리 요구에 최적화하기보다, 소스의 특성을 살펴가며 사용해야 합니다.
프로그램을 우리에게 최적화시키는 것도 좋지만, 우리가 프로그램에 맞추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 기계가 들어와 있고 기계에도 인간이 내장되어 있어서, 인간과 기계가 공생해야 하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