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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_주체의 해석학] 발제문_0519
연두 / 2017-05-19 / 조회 1,462 

본문

 

 

주체의 해석학

1982.2.24 강의


푸코세미나 20170519 연두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지식의 영적인 양태화: 표상 분석 작업; 정의하고 기술하기; 보고 명명하기; 가치평가하고 체험하기; 영혼의 위대성에 접근하기

 

푸코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명상록>에서 세네카에게서 발견되는 것과 상관관계가 있지만 동시에 대칭적으로 완전히 역전된 영적 지식의 형상을 발견하고 있다. 그는 주체가 이동할 때 운동의 양태가 다른 점을 지적한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세네카와 달리 주체가 세계 내에서 위치하고 있는 지점에서 출발해 이 세계의 내부로 뚫고 들어가는 운동을 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그 어떤 사물도 그 질이나 가치도 빗겨갈 수 없다.” 그에게는 사물에 관심을 기울이는 주체의 미세한 시선이 중요하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의 텍스트를 이해하기 위해 먼저 parrastemata라는 용어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우리가 정신 속에 간직해야 하는 무엇, 목전에 간직해야 하는 무엇으로 여기에서 우리는 진실의 원리와 행동의 규칙의 연결을 발견할 수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파라스테마타를 언급할 때 이것이 의미하는 진실의 원리는 선의 정의, 자유의 정의, 현실의 정의로 생각할 수 있다. 이에 더불어 영적 훈련에 대한 내용이 함께 전개된다. 

그리고 그는 “항시 그 이미지가 정신에 나타는 대상을 규정하고 기술하는 것”을 정신이 가져야 할 원칙으로 삼는다. 이 원칙 전체를 잇는 영적인 훈련의 단계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첫째, 이미지가 정신에 나타는 대상을 규정하고 기술하는 것이다. 그것은 ‘경계를 긋는 행위’이자 사물의 가치를 확정하는 것이다. 

표상 분석 작업은 지성적인 방법과 영적인 훈련으로 명확하게 대립된 형태로 나타난다. 영적인 훈련은 표상의 선과 유출이 즉각적으로 전개되게 둔다. 표상의 자유로운 운동과 이 자유로운 운동에 대한 작업이 표상에 관한 영적인 훈련이다. 지성적인 방법은 표상들의 계기 법칙을 의지적이고 체계적으로 규정하는 데 있다. 데카르트의 여정의 지성적 방법에 속한다. 

표상의 객관적인 내용을 재파악하기 위해 주어지는 그대로의 표상의 ‘포착’은 특수화되고 실제적으로 순전히 지성적인 작업에 영적인 가치를 부여하게 될 두 수련으로 전개된다. 이것은 본질의 명상과 고유명사의 명상으로 부를 수 있다. 

 

본질의 명상은 본래 있는 그대로 표상된 대상을 명상하는 것이다. 요컨대, 그것을 숨기고 에워싸는 모든 것을 걷어내고, 전반적으로, 그리고 그 구성 요소들을 구분하며 파악해야 한다. 그것은 잘 응시하기, 눈을 어디에 고정하기, 그래서 결코 모든 주변으로부터 벗어나 이 시선을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를 의미한다. 고유명사의 명상은 내적이지만 완벽하게 명시적인 발화를 말한다. 이것은 정신 속에 사물과 그 요소들을 고정시키는 데 명백하게 중요하며, 또 결과적으로 이 이름에 입각해 모든 가치 체계의 재활성화에 중요하다. 

이름에 대한 상기 훈련은 시선의 훈련에 동시적, 직접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 시선과 기억은 한편으로 시선을 사물 쪽으로 이끌고, 다른 한편으로는 기억 속에서 상이한 사물들의 이름 쪽으로 유도하는 정신의 유일한 운동 속에서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이 이중적인 훈련에 힘입어 사물의 본질이 완전히 드러나게 된다. 우리는 명명을 통한 시선의 이중화, 이 훈련을 통해 대상의 본질적 현실의 복합적인 풍요성과 시간 속에서 그 실존의 허약함을 파악할 수 있다. 이것이 영적 훈련의 첫번째 단계로 그 현실적 범위 내에서 분석하는 것이다. 영적 훈련의 두 번째 단계는 그 대상의 가치를 측정하려는 데 목적이 있다. 

이러한 훈련의 목적은 “영혼을 위대하게 만들기”이다. 이것은 영혼을 둘러싸고 고정하며 한정하는 모든 조직과 피륙으로부터 해방시키는 행위이며, 또 결과적으로 영혼 자신의 진정한 속성과 동시에 그 진정한 목적지를 발견하게 하는, 세계의 보편적인 이성에 영혼을 적응시키는 행위를 말한다. 이 훈련을 통해 영혼은 자신의 진정한 위대성, 즉 세계를 체계적으로 조직하는 합리적 원리의 위대성을 발견하게 된다. 즉 각각의 사물의 각각의 부분을 분석적으로, 또 전반적으로 고찰하면 영혼은 그 순간에 신의 이성에 부합하는 평정이라는 지고의 초연함을 획득하게 된다. 바로 이 초연함이 수련의 목적이다. 

이 목적은 사물에 대한 점검(elegkhein)을 행할 때에만 도달 가능하다. 분석적 점검은 인간의 의심, 기소, 도덕적 비난, 착각을 일소하는 지성적 논박의 흐름을 따라갈 때 가능하다. 이것은 대상이 무슨 가치(axia)가 있는지, 인간에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를 알아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에픽테토스에 있어서 영적인 훈련의 예들 

그에게 이 훈련은 두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산보-훈련이고, 나머지는 기억-훈련이다. 그는 산책하며 세계가 인간에게 제공하는 상이판 표상들과 관련해 수련을 한다. 인간은 각각의 사물들이 무엇으로 이루어졌는지, 어떤 한도 내에서 인간에게 작용할 수 있는지, 인간이 그것들에 의존하는지 아닌지, 그것들이 인간에게 의존하는지 아닌지 등을 알기 위해 산책하며 수련한다. 표상의 내용에 대한 점검에 입각해 사물에 대해 취해야 할 태도를 규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기억-훈련은 사건을 상기하고 나서, 그 사건이 무엇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속성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떤 형식의 작용을 나에게 일으킬 수 있으며, 어떤 조건에서 나는 거기에 의존적이며 어떤 조건에서 나는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다. 

 

표상에 대한 기독교의 주해와 스토아주의의 분석 

기독교의 영성에서 이런 종류의 훈련을 재발견할 수 있다. 4-5세기 수도원 문학이 그러한데, 그 중 카시아누스의 예를 들 수 있다. 그에게 정신은 항시 운동하고 있는 무엇이다. 매순간 새로운 이미지들이 그에게 주어진다. 무엇을 받아들이고, 무엇을 거부해야 할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매 순간 용의주도해야 한다. 여기서 시험/점검(ekegkhos)가 다시 문제시된다. 표상에 대해 감시와 경계의 태도를 취하는 것, 또 각각의 표상을 검증하고 시험하는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로 되돌아가기; 시간 속에서 대상을 분해하는 훈련; 물질적 구성 성분으로 대상을 분석하는 훈련; 대상을 환원적으로 기술하는 훈련

영적 지식의 개념적 구조

파우스트의 형상 

 

 

 

자기 수련(askesis)과 관련한 덕 

자기로의 전향이 인식의 영역을 넘어서 전재하는 수행적 실천을 자기 수련(askesis)이라고 부를 수 있다. 여기서는 덕의 획득이 문제가 되는데 고대에서도 조금씩 다른 결의 방법론들이 존재했다. 무소니우스 루푸스는 덕의 획득을 위해서는 이론적 지식(episteme theoreike) 뿐 아니라, 실천적 지식(episteme prektike)이 모두 요구된다고 했다. Mathesis 못지 않게 askesis를 통해 덕이 획득된다는 관념은 자기 기술과 자기 실천의 흐름 내에서 지극히 전통적인 관념이다. 

푸코가 1,2 세기에 주목하는 이유는 그 시대의 사람들이 차원이 광범위하고 풍요로우며, 그 범위가 어떤 불연속적인 단절을 보이지도 않으며 자기 수양과 자기 실천에 대한 상세한 분석이 가능하게 해 주기 때문이다. 그는 현상의 편의성, 가시성, 가독성 때문에 그 시대에 의거하고 있다. 

 

과학 내에서 주체의 객관적 인식에 대한 참조의 부재 

Askesis는 그 엄격성, 포기, 금기와 같은 내용들 때분에 법에의 복종으로 오해받기 쉬우나, 그것이 결코 아니다. askesis는 진실의 실천이며, 법에 주체를 예속시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 헬레니즘/로마 시대의 사유에서는 자기 수양에서 주체의 대상화가 있을 수 있는지, 즉 세계에 존재하는 사물에게 적용하는 인식과 동일한 방식이 인식을 주체에게 적용할 수 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은 세계에 대한 지식이 주체 안에서, 주체의 경험 안에서 주체의 구원을 위해 일정한 영적인 형식과 가치를 가질 수 있도록 변형시킬 필요성을 발견했는데, 그것을 주체의 영적인 방식화라고 부를 수 있겠다.

 

자기 수련 내에서 법에 대한 참조의 부재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 자신을 무엇으로 만들어야 하는가?’라는 주체와 실천의 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때 그리스/ 헬레니즘/ 로마의 자기 수양에서 실천과 관련된 주체의 문제는 법의 조건과는 와전히 다른 것으로 귀결되어 다음과 같은 의미를 지니게 된다. 그것은 어떤 한도 내에서 진실을 인식하고 말하며 실천하고 수련하는 것이 주체에게 행위해야 하는 바대로 행위하게 해줄 뿐만 아니라 또 존재해야 하는 바대로, 또 존재하기를 원하는 바대로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지를 아는 것이다. 

도식적으로 말하면 근대인들이 ‘인식의 장에서 가능하거나 불가능한 주체의 대상화’를 이해한다면, 고대인들은 ‘주체의 영적인 경험으로 세계에 대한 앎을 구축하기’로 이해한다. 근대인들의 ‘법질서의 주체의 예속’이라고 이해한다면, 고대인들의 ‘진실의 실천을 통해 주체를 최종적인 목표로 구축하기’로 이해한다는 것이다. 

푸코에 따르면 법에의 복종, 주체 자신에 의한 인식과 같은 오늘날의 주체성 장치들은 고대의 사유와 수양 내에 등장하지 않고 근본적이지도 않았다. 대신 ‘지식의 영화, 진리의 실천과 훈련’이 당대엔 문제였으므로 고대의 사유를 해석할 때 오늘날의 주체성 장치에 의거에 왜곡해서 바라보게 되는 것을 주의할 필요가 있겠다.  

 

자기 수련의 목적과 수단 - 장비(paraskeue)를 특징짓기 

자기 수련, 고행에 대해서도 위와 같은 왜곡, 오해가 있을 수 있다. 가령 우리는 자기 포기의 맥락에서 고행을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고대인들에게는 고행을 통해 궁극적으로 자기 포기에 도달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구축하는 것’이 관건이다. 고행의 목적은 충만하고 완결되며 자족적이고 자기에게서 취하는 행복에 해당하는 자기 변형을 이루어 내는 자기와의 일정한 관계를 형성하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즉 자기와 자기의 충만한 관계 구축이다. 

고행을 통해 자기를 구축할 수 있도록 갖추고 소유하는 바, 그것을 장비(paraskeue)라고 한다. 장비를 구축하는 것은 고행의 전술, 수단, 도구가 된다. paraskeue의 예로 견유주의자 데메트리우스가 되풀이해서 활용했던 생활에서 지혜에 도달하고자 하는 자와 운동선수와의 비교를 들 수 있다. 메데트리우스는 훌륭한 운동선수의 훈련은 아주 기초적이지만 모든 상황에 적응할 수 있기 위해, 충분히 일반적이며 효과적인 동작에 대한 훈련이어야 한다고 말한다. paraskeue는 현자의 육상선수적인 훈련이라 할 수 있으며 우리가 실존 전반에 걸쳐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것보다 우리를 더 강하게 하는 데 필요 충분한 동작의 총제, 실천의 총제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자기 초극이나 기독교적 고행과는 다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에게서는 이 개념이 춤과 격투기의 대비로 설명된다. “생활의 기술은 춤보다는 격투기와 비슷하다. 왜냐하면 항시 경계 태세를 할 필요가 있고, 너희들을 갑작스럽게 엄습하는 타격들에 대해 평형을 유지해야 하지 때문이다.” 타격에 의해 전복되지 않고, 외부 세계로부터 오는 모든 적수들, 즉 사건과 싸우며 경계 태세를 갖추는 자가 고대의 운동선수다. 기독교도 운동선수는 자기 자신에 대한 경계 태세를 갖추고 자기 나신을 초극해야 하는 신성함을 향해 무한히 전진한다. 

 

장비의 내용: 담론과 행동 

장비는 우선 담론(logoi)에 의해 구축되고, 행동의 수용 가능한 원칙들을 구축한다. 장비를 잘 갖춘 운동선수는 자기 자신 안에 무엇인가를 각인하고 이식하는 사람이다. 그 담론은 스승의 교훈, 그가 들은 바, 그가 말한 바, 그가 자기 자신에게 말한 바일 수 있으나 중요한 것은 자신이 실제로 듣고 읽고 다시 기억해 다시 발화하고 다시 쓴 문장들을 갖추고 있다는 사실이다. 

담론의 명제들은 합리적이고 동시에 참될 뿐 아니라, 행위 자체를 유발한다는 면에서 설득적이다. 그 담론은 담론을 소유한 사람의 머리, 사유, 마음, 신체에 나타는 순간부터 그가 자발적으로 행위하게끔 하는 행위 유도적인 도식들이다. 이는 행동의 모태의 자격으로 주체에 ‘실제적으로 각인’된다. 

 

담론의 존재 방식

Logos는 주체가 필요할 때마다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현존해야 한다. 즉 Logos는 구조(boethos)여야 한다. 주체와 주체의 제어를 위험에 빠뜨리는 상황과 사건이 발생할 때 Logos는 주체가 구조 요청을 하는 순간 응답해야 하며, 주체에게 자신이 거기 있으며 구조하러 오겠다고 알리며 자신의 목소리를 들리게 할 수 있어야 한다. 사건이 발생할 때 Logos는 이미 거기 존재하며 재활성화되고, 주체에게 해야 할 바를 말한다거나 해야 할 바를 하게 만든다. 이는 그리스 문학에 많은 방식으로 은유화되어 있는데 로고스-약, 항해의 은유, 혹은 갑옷이나 성벽, 요새의 은유 등이 있겠다. 

사건들이 발생함에 따라 일상 생활의 평원에서 주체가 위협을 느끼게 될 때 로고스는 고도에 위치하며, 주체는 로고스인 자기 자신으로 후퇴한다. 바로 여기서 주체는 사건을 물리칠 수 있고 사건과 관련하여 가장 허약한 상태에 있음을 중단하고 사건을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를 위해 주체는 로고스를 수중에 지녀야 한다. 그것을 수중에 지녀야 한다는 말은 그것을 거의 근육 속에 지녀야 함을 의미한다. 그것을 수중에 넣어 즉각적으로 지체 없이 자동적으로 재가동시킬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은 행동, 행위의 기억으로서 고통받는 날이 찾아오면 영혼의 평정을 유지하기 위해 작동해야 한다. 

 

참되게 말하기를 주체에 내장하는 훈련으로서의 자기 수련(askesis) 

푸코의 요약에 따르면, 고대인들에게 자기 수련(askesis)은 충만하고 독립적인 자기와 자기 관계라는 궁극적인 목표 때문에 장비(paraskeue)의 구축을 일차적 목적으로 삼는다. 장비는 합리적인 행동의 모태를 구축할 수 있기 위해 진실된 담론이 취해야 하는 형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또 장비는 로고스를 에토스로 변형시키는 요체이다. 자기 수련은 개인의 장비를 형성하고 확정하며, 주기적으로 재활성화하고 필요한 경우 강화할 수 있는 절차들의 규칙화되고 계측된 총제로 정의될 수 있다. 

자기 수련은 진실 말하기(dire-vrai)가 주체의 존재 방식으로 구축될 수 있게 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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